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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블로그시작한지3년

혜민스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아마도 슬찬이가 아주 어릴때 5년전쯤 읽었었다. 그때는 그냥 좋은 말 잔치...정도로 여겼다. 기억에 남는 것은 딱 하나 "자기 자신에게 먼저 친절하세요." 그 말을 읽고는 한참을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짐을 정리하기 위해 책들도 좀 정리를 할 마음으로 읽고 팔자란 생각에 다시 집어들었다.

참 주옥같은 글들이 많았다. 그리고 왜 '치유'의 대명사가 되셨는지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꽤 완벽해보이는 모습의 스님이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살아가시는 모습...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느낀 일상적이 고민들에게 대해 참 편하고 쉽게 쓰신 글을 읽으며 나 또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자기 감정에 솔직할 것,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 이미 충분히 가치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

<책 속의 글>

나마스테 "내 안에 깃든 성스러운 신성이 당신 안에 깃든 성스러운 신성께 경배합니다."

좋은 말을 자꾸 해주거나 서둘러 방법을 찾아주려는 것은 어찌 보면 상대의 힘든 상황을 보는 나 자신이 힘들어서일 수도 있어요. 내가 빨리 편안해지려고 자꾸 좋은 위로의 말이나 방법을 찾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세요.

상처가 깊을 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한 분노와 미움은 손상된 자아가 그 사람과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고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일으키는 지혜로운 감정이다. 분노는 일종의 보호 장벽과도 같아서 깨지고 부서진 자아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회복될 때까지 나름의 역할을 한다.
용서하겠다는 머릿속의 결심을 가슴으로 이끌어주는 중요한 통로는 다름 아닌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다.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일어나는 분노와 미움을 부정하거나, 혹은 자각 없이 그 감정 안에 빠져 지내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허락하고 지켜보는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아이의 마음 상태를 엄마가 지켜보듯 내 감정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내 안의 분노와 미움을 따뜻하게 보고 있으면 더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의 속 모양이 드러난다.
나를 향한 자비의 눈길로 먼저 내 감정들을 지켜보다 보면 신기하게도 굳었던 내 마음이 점점 녹으면서 열리기 시작한다.
용서의 목적은 과거 상처에 얽매여 힘든 내 감정의 족쇄를 스스로 풀어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즉,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가 내 안의 상처와 응어리로부터 자유로워지자고 하는 것이다. 그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경우에는 나와 똑같이 삶이 외로워서, 아니면 나이 드는 것이 서럽고 불안해서 저러는구나 하는 것이 보인다. 그 상태에서 불안하고 외로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내 아픔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면서, 내 안의 비통함은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자비함으로 전환되게 된다.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래서 삶이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 때, 부디 내 안의 그 자비한 눈빛과 마주하시길 깊이 소망한다.

언어의 경계 너머에 있는 본성을 굳이 말로 표현해야 한다면, 텅빈 채로 깨어 있는 마음이 참으로 묘하게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서 이 우주 전체 가득히 자기 홀로 있다. 모양을 가진 우주의 만물들이 바로 이 텅 빈 채로 살아서 홀로 깨어 있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또 안다. 이 마음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세상으로 모습을 나투지 않았기에 죽어 사라지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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