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선 책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걸 요즘 느낀다. 책 읽는 것조차 귀찮다. 손으로 넘겨야 하고 눈으로 따라가야 하고 이 모든 행위들이 좀 귀찮다. 그래서 아마도 영화를 좋아했나보다. 서울에 오곤 강연을 좋아했었다. 몇번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임경선도 실제로 한번쯤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임경선의 솔직함이나 삶에 대한 태도들이 나에게는 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요즘 머리가 멍하거나 뭔가 좀 힘들다고 느껴질때는 임경선을 고르는 것 같다. 가볍게 재밌게 키득거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그걸 충족해준다. 그리고 최근 고른 소설 [나의 남자]와 에세이 [엄마와 연애할 때]의 화자들이 둘다 37살...지금 나의 나이라서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소개 글에서 적혀 있는 '"엄마 되게 웃겨"가 딸 윤서한테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앞으로도 웃기는 엄마가 되도록 정진할 예정이다.' 이 글처럼 나도 슬찬이에게 재밌고 가벼운 엄마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다시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임경선의 글>
나는 결코 아이에게 "네가 나의 꿈이고 희망이고 미래야. 너의 꿈이 나의 꿈이지" 같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 그 말이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라는 말로 바뀔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유능한 엄마보다 충족된 엄마, 남들만큼 하는 엄마보다 남들과는 다를 수 있는 엄마인 것이 좋았다. 엄마 노릇은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보겠다만, 이기적인 나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이자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존중하고 싶었다. 다행히 아이라는 존재는 여태까지 내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제멋대로인 존재라, 나와 상관없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자기가 알아서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인생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엄마라는 존재는 생각만큼 그리 대단하지도, 대단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깨 힘을 빼고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아이와 함께 호흡하며 걸어나갈 것이다.
서른 일곱 살에 엄마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줄곧 내 안에서는 이기심과 죄의식이 맞부딪치며 갈등을 일으켰다. 나는 그 둘 다에서 약간 멀리 서 있기로 했다.
센 척하지 말아달라는 나의 바람대로 아이가 솔직하게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지금 내게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내게 마음 놓고 어리광 부리고 투정하는 일이 막상 눈앞에 펼쳐지자 이것을 어떻게 넘길까 궁리하며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윤서 어린이집 담임인 정성숙 선생님 왈 "오늘은 윤서가 떼를 쓰며 부탁했으니 일찍 데리러 오지 마시고, 내일 윤서가 울지 않고 부탁하면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시에 데리러 오십시오."
유일하게 네 생각이 날 때가 언제인지 아니? 네가 울거나 떼쓰면서 기분 안 좋게 유치원에 간 날에만 생각나고 걱정돼. 그렇다고 너를 일찍 데리러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네가 울거나 떼쓰거나 이렇게 튕기는 건 꼭 필요하고, 내가 감사히 감내해야 할 몫인 것 같아.
무엇보다도 네가 꾹 참아 버릇해서 마음과 몸을 상하기 전에 말로 너의 마음을 표현하고 알려줘서 고마워. 그건 대견한 일이 아니라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해.
게다 내가 임신 전에 그토록 두려워하던 새침하고 잘 삐치고 예민하고 공주병이고 꽁한 그 성격이 바로 하필이면 내 딸의 성격이었는데, 그것은 어느덧 시크하고 자기 주관 뚜렷하고 세심하고 자존감이 충만하고 심지가 굳은, 꽤 매력 있는 품성으로 탈바꿈되어 내게 다가왔다. 아니면 내가 아이를 낳은 후 인간 스케일이 커진걸까? 설마.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짐승적이었다. 본능적으로 거슬리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피해 다녔다. 의지가 아니라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가 피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냥 후각으로 아니다 싶으면 내쳤다. 친했던 사람이라도 거슬리는 행동이나 말을 할라치면 독을 품고 할퀴며 접근을 금지했다.
어쨌든 그냥 아니다 싶은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그랬다. 그 마음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고, 그것을 왜 내가 누구에게 해명하고 설득해야 할까. 이 아이는 나의 아이이지 않은가.
출산전 검사를 하지 말자는 결정에 남편 왈 "하늘에 맡기자. 운명이 그러하다면 받아들이고 개척해야지. 우리 새낀데 우리가 키우면 되는거지."
그가 만일 그때 남 일 얘기하듯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라든가 "아무리 힘들어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게 어때?"라고 말했더라면 나는 남편을 다시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것 같다. 그날 밤 오랜만에 푹 잤다.
내가 남자한테 차이거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 울적할 땐 주인 상태를 감지하고 먼저 내 품에 들어와 조용히 체온을 나눠주는, 모름지기 개가 갖춰야 할 기본 깜냥은 해냈던 영리한 아이였다. 어떤 형식으로든 사랑하는 이의 곁에 있으려고 하는 것, 사랑하는 이와 닮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구하는 모든 것임을 나는 그 아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반면 어떤 때는 그 사랑이 너무 고통스러워. 너무 부담스러워 자꾸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 심정적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윤서를 사랑하긴 사랑하는구나 하고 시무룩하게 납득했던 것은, 그러니까 너무 행복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당시 내 글발이 몹시 '후졌기' 때문이다.
윤서 사진을 그녀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건 되레 나의 사사로운 기쁨이었다. 나는 윤서가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중심이 잡혀 있고 단단한 성향인 것은 오롯이 그녀의 영향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아이가 언제 그런 어른들의 감정 노동에 신경 썼는가. 일부러 '여시짓'하는 것도, 냉담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잊을 수 없는 나의 천국의 시간은 녹음이 끝나고 혼자 강변북로를 타고 귀가할 때였다. 방송국으로 향할 때는 오늘 얘기할 내용을 아마추어처럼 촌스럽게 암기하느라 늘 어딘가 긴장되어 있었지만 귀갓길은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한껏 감상적일 수 있었다. 넘실거리는 밤의 한강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방송 중 후회되고 반성되는 내용, 당면한 소설 쓰기 과제,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고민 등 온갖 상념에 잠기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고민의 주인공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청취자들도, 내 아이나 남편도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어서 조금은 벅찼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갈 때도 일부러 지친 기색을 하고 가야 왠지 미안하지 않았다. 왜? 애는 어린이집에 맡긴 채 엄마가 너무 희희낙락해 보이면 죄인이 돼버리니까!
무게 중심을 내가 아닌 아이에게 두니 그때그때의 판단이 훨씬 더 명료해졌다. 물론 제3자의 간섭 어린 소음으로부터는 완전히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가능한 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기꺼이 하려고 했다. 아이에게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좌충우돌하며 적응해가기로 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취약한 아이와 있는 그대로의 서툴고 부족한 엄마의 조합.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최대한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것, 무리할 대로 해놓고 죄의식을 가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
나는 나대로 알아서 편하게 하고 있으니까 그런 칭찬과 기대와 부담은 사양할게요.
'다들 그래' '무조건 이래야만 해' 같은 생각에 휘둘리면 아이를 키우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지고, 그러다 아이가 행복해지기 전에 엄마가 불행해진다. 엄마가 불행한 것보단 불완전한 게 백배 낫다.
누가 뭐래도 아이에겐 '내 엄마'가 가장 완전한 엄마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기적 같은 아이의 확신을 있는 그대로 행복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인생의 종착역에 서서 스스로에 대해 하나하나 납득해나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치유 의식이니까.
아끼는 만큼, 직설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만큼, 비판도 매몰차고 냉정했다. 그조차도 사랑의 다른 표현 방식임을 이해하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 섞임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어떤 규칙을 권장하는 전형성이 없고 누구나가 개별적인 존재이고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잡것'이며, 고로 아무도 당신이 누군지 신경을 안 쓰는 것이 당연시된다.
이태원 맥도날드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삶의 방식이 있구나'라는, 이질감에서 비롯한 묘한 안도감이 있다.
타인과의 인간관계 이전에 나 자산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하니까. 그런 인간관계는 우리에게 그 무엇도 줄 수 없다.
다만 '싫은 건 싫다' 할 때의 기본 원칙은 있다고 알려주었다. 첫째, 싫다고 해서 상대를 물리적으로 못살게 굴어서는 안 된다. 둘째, 상대도 나를 싫어할 수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셋째, 어느 우연한 기회에 사이가 좋아질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은 늘 열어놔야 한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내가 먼저 웃으며 손을 뻗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무리해서 힘든 관계를 유지하려는 습성은 조화로움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한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나는 내 자식 예쁘다 해주는 어르신보다 내 자식이 보며 기뻐할 수 있는 예쁜 꽃을 심어주는 어르신이 좋고 고맙다. 어르신을 공경해야 한다는 강박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대신 어르신과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어르신이 있다는 게 얼마나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 별로 친하고 싶지 않은 어르신과 억지로 친한 척해야 하는 고통은 또 얼마나 큰지.
무엇보다도 아이가 무리해서 스스로를 눌러가면서 상대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한다. 남편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여자는 좀 못 될 필요가 있다."
일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아이가 내내 함께이다 보면 아무리 배경화면이 바뀌어도 엄마인 나는 그대로, 바뀔 일이 없다. 그래도 매년 망각하고 여행을 또 가는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토록 괴로운, 아이와 종일 함께 있기 위해서다. 분명 자학적인 일임에도, 일상에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긴 시간 동안 서로에게 집중한 적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아주 가끔 흐뭇하고 가슴 벅찬 순간들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빛나는 순간이 고됨과 피로를 보상해주는 것이다.
엄마 기운을 쫙 빼놓는데도 어쩌면 그토록 존재감이 넘칠까. 피가 마르고 파김치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아이에겐 아이 나름의 삶과 생각들이 있구나, 라는 확실한 감촉이 느껴지니 내가 이 여자아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가 더 잘 보인다.
피플 플리저 : 나보다 남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무리하며 노력하는 성향
어렸을 적부터 전학을 하도 많이 다녀서 새로운 환경에 빨리 받아들여지고자 애썼던 습관이 남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아무리 뭘 잘해도 시원하게 칭찬 한번 안 해준 부모님 탓이었을까?
내 행동은 의무감이나 죄책감에서 비롯한 친절함이었으니 상대의 욕구에 진정한 관심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기대했던 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상처 받았다. 가슴 속 깊이 분노를 차곡차곡 쌓다 보면 삐져나오기도 했다. 화내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니 입 다물고 토라질밖에.
속으로 분노를 느끼면서도 겉으론 친절히 행동하는 모순을 발견하고, 난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내 욕구를 포기시킨 스스로에게 화를 낼까, 아니면 내 욕구를 우선시한 대가로 상대에게 상처를 줄까?
내가 상대에게 화를 내기보다 상대가 나에게 화내는, 즉 나 자신과 문제를 일으키느니 차라리 상대와 문제를 일으키는 쪽을 선택하기까지는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통제력이 강한 채로 성장해서 자신에게 어떤 일을 강요하는 것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남과 껄끄러워질 수 있는 상황을 내 능력(나를 희생시키는 능력)으로 해결하기가 이 세상에 제일 쉬웠으니까. 그런데 진정으로 의미있는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믿지 않는다. 아이들의 잔인함은 순수한 만큼 더 예리하고, 그에 따른 상처도 선명하다.
"혼자 놀면 심심해. 심심하다구."
그말은 솔직하고 정확했다. 그 서글픈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척 할 수는 없었다. '다 잘될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심장이 옥죄고 기운이 축 처지는 일인지를 알았는데 어떻게 엄마로서 못 본 척, 아닌 척 할 수 있을가.
윤서야, 엄마는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냥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조금 버겁더라도 참으렴.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한다. 하루빨리 사귀어야 한다는 강박감만 안 가져도 숨통이 트일 것 같구나. 그리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마음에 들면 사귀고. 그게 아니면 혼자서 지내는 것을 선택해도 된단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조금씩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니까.
기쁨을 주었던 친구가 어느새 슬픔과 고통을 주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조금만 더 관대해지기로 하자. 아무리 버겁고 힘들어도 남는 건 사람밖에 없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밝은 것에 끌린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모 자식 간에 대단한 인연에 비하면 실제로 부대끼면서 지낸 세월이 스무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엄마는 마르잔 사트라피의 엄마처럼 나를 딱 열서너 살에 심정적으로 품에서 놔준 것 같다. 그때부터는 내게 모든 선택권과 결정권, 그와 더불어 책임과 자유를 주었다.
엄마 왈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들한테 기 뺏기며 사는 거 아니다. 여자 인생은 말야, 어쩌면 그냥 옆 못 보게 눈 가린 말처럼 불필요한 것은 안 보면서 그냥 주어진 환경에서 평범하게 하루하루 사는게 최고의 행복인지도 몰라."
자유를 감당하려면 때로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그녀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확고하게 요구했던 것은 자유를 누리는 만큼 최소한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해줘'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너는 계속 부단히 노력하는 너여야만 한다는 것. 일견 자유분방한 듯 보이는 그 엄마들은 실은 고지식할 정도로 냉철한 엄마들이었다.
엄마의 미소는 내게 '넌 너에게 진실했을 뿐이야. 왜 네가 쓴 것을 부끄러워하니? 이것이 너의 한계라고 해도 그것을 인정하고 앞으로 노력해서 더 잘하면 되잖아.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과 정체성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잃으면 안 돼. 있는 그대로의 너라도 괜찮아라고 소리없이 말해주었다.
튀기도 하고 꺾이기도 하고 헛된 욕망에 휘둘리기도 하면서 크고 깊게 아프고 느끼면서, 그렇게 인생의 시고 쓰고 단 맛을 하나하나 맛보는 게 삶 아니던가. 평범하게 살아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부러 지향해야 할 가치는 아니다.
심플함이란 나의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여러 번잡한 소용돌이 속에서 온전한 자각과 의식을 가지고 무엇이 내가 원하는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파악하면서, 길을 가는 도중 버릴 건 버리고 포기할 건 포기하는 태도다. 정말 나에게 의미 있는 것만 남기고 그것을 지키고 더 잘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삶이 명료해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상태를 말한다. 말하자면 심플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전에 그만큼 심플하지 않은 복잡한 많은 것들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소화해 가장 중요한 것만 남겼음을 의미한다.
너절하게 꿈꾸는 삶이 아닌, 집중해서 실천하는 삶 말이다.
나는 나일 뿐이라는 뿌듯함과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한계를 둘 다 받아들이는 것을 기본 전제로, 타인의 인생의 소비자로 사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의 창의적인 생산자로 살아가자는 말이다. 우리 모두 발을 깊숙이 담그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해하지 말고 평생 현역으로 살아냈으면 좋겠다.
엄마는 소비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생산해내는 사람임을 아이가 자연스럽게 알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자신의 꿈을 찾아 생생하게 살고 있는 어깨를 보여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꿈꾸는 사람의 샘플을 보게 되고, 꿈을 어떤 가시적인 형태로 실천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하리라 본다. 그것은 약간의 용기와 끈질긴 인내심의 문제니까. 아이에게 '엄마는 충족된 인생을 살기 위해 지금 이걸 하고 있어'라며 즐겁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나라면 인내하는 모습보다 힘내고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이 더 자랑스러울 테니까.
아무리 봐도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정말로 가급적 아이가 가진 운명을 방해하지 않는 것. 그뿐인 것 같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면 아이는 스스로 원하는 것이 뭔지 파악하고 제멋대로 추구할 능력을 키울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밖엔 없다.
어떤 형식으로든 일하는 엄마들은 자신들이 더 강해지기보다 아이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빌리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대개 일하는 엄마들은 책임 의식에 혼자 끙끙 싸매며 모든 일을 끌어안고 있다.
이 아이가 있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이 남자와 평생 살아야 할 것 같은 체념이 주는 슬픔과 실망감 말이다. 실은 실망스러운 부분은 아직 도래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그저 도망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더 도망가고 싶은 아이러니는 뭘까. 실망스러운 정황이 찾아와 나를 정말로 무너뜨리기 전에 내가 먼저 실망을 예습하며 짜증 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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