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주변에서 이 책을 많이 읽고 있었다. 제목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설을 좀 읽어야지...하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글에는 관심을 줄이고 싶었다. 그런데 책을 거의 읽지 않는 남편이 어느날 이 책을 읽더니 괜찮다며 집에 갖다둬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고 한동안 글이 안 읽혔다. 그래서 아주 더디게 읽었다.
블로그를 멈추고 싶지는 않은데 생각도 멈춰버린 건지...뭔가 내 삶 자체가 정지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버티듯 꼭 해야할 일들만 겨우겨우 하며 한달정도 지냈다. 그 사이 틈틈히 이 책을 읽었고 마지막에...."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 이 문구를 읽는 순간 갑자기 잠에서 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바뀐게 확 느껴졌다. 예전에는 아름답던 것들이 별게 아닌게 되어 있는...약간은 시큰둥한 시선이 되어 있는 요즘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읽다보니 마음에 담아둔 글을 정리하며 다시 읽어보니 처음 읽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왜 마음에 들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이기주 작가도 시선과 태도가 참 마음에 든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말을 좀 줄이는 연습을 하고 싶어졌다. 때와 장소를 가려 말을 하고 싶어졌다. 그동안은 너무 떠들기만 한건 아닌가 싶어졌다. 그래서 내가 방전되어 멈춘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책 속의 글>
우린 늘 무엇을 말하느냐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고,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때론 어떤 말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다. 입을 닫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잘 말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 내 언어의 총량에 관해 고민한다. 다언이 실언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종종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본다. 말 무덤에 묻어야 할 말을,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묻으며 사는건 아닌지....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우린 사랑에 이끌리게 되면 황량한 사막에서 야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그 나무를, 상대방을 알고 싶은 마음에 부리나케 뛰어간다. 그러나 둘만의 극적인 여행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 서늘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내 발걸음은 '네'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역시 사랑의 씁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한기주 씨! 미안할 때는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자존심 세우면서 사과하는 방법은 없어요."
-드라마 '파리의 연인' 중
미안함을 의미하는 'sorry'는 아픈 '상처'라는 뜻을 지닌 'sore'에서 유래했다. 그래서일까. 진심 어린 사과에는 '널 아프게 해서 나도 아파'라는 뉘앙스가 스며 있는 듯하다.
사이비.
비슷하기는 하지만 가짜인 것을 의미한다. 물건으로 치면 정교한 모조품이다. 사이비는 진짜와 비슷하다. 그래서 때로는 진짜와 구별하기 어렵고 때로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이비의 생명은 짧다.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 않다. 진실한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그 실체가 탄로 나고 만다. 물건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고, 감정도 그렇다.
위폐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꾸민 흔적이 역력해요. 어딘지 부자연스럽죠. 가짜는 필요 이상으로 화려합니다. 진짜는 안 그래요. 진짜 지폐는 자연스러워요.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요.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본질은 다른 것과 잘 섞이지 않는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엉뚱한 방식으로 드러나곤 한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관심은 폭력에 가깝고 상대에게 노력을 강요하는 건 착취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안내판이 없다는 건 그릇된 길로 들어서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보다는, 애초에 길이 없으므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뜻에 가까울 것이다.
정해진 길이 없는 곳을 걸을 때 중요한 건 '솔직함'이 아닐까 싶다. 눈치와 코치에만 연연하다 재치 있는 결정을 내리기는커녕 삶을 그르치는 이들을 나는 수없이 봐 왔다.
가끔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내 욕망과 상처를 끄집어내 현미경 들여다보듯 꼼꼼하게 관찰해봄 직하다.
솔직히 말해, '솔직하기' 참 어렵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남'을 속이면 기껏해야 벌을 받지만 '나'를 속이면 더 어둡고 무거운 형벌을 당하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형벌을...
세상이 변해도 너무 빨리 변한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이 낯설기까지 하고, 심지어 옳음과 그름의 기준도 시시각각 변한다.
정답은 없다. 아니,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고 모두가 오답이 될 수도 있다. 복잡한 사실과 다양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세상에 '원래 그러한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삶도, 사람도 그리 단순할 리 없다.
철저한 자기반성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숙연한 자세로 과거를 되씹어 봄 직하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 비하나 부정은 희망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법,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비관주의로 물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정도면 애썼다고, 잘 버텼다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그러면서 슬쩍 한 해를 음미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내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기주야,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다.
어떤 유형이 됐든, 깊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어떤 자세로 노를 젓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건너고 있는지 살면서 한 번쯤은 톺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 번쯤은.
톺아보다 : 샅샅이 톺아 나가면서 살피다.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아마추어'라는 라틴어 아마토르에서 유래했다. '애호가' '좋아서 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취미 삼아 소일거리로 임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마추어는 어떤 일이나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 같은 요소가 사라지면 더는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의 입장에선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새삼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인지 모른다고.
살다 보면 프로처럼 임해야 하는 순간이 있고 아마추어처럼 즐기면 그만인 때도 있다.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는 구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프로가 되는 노력은 그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
기다린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바람과 기대를 품은 채 덤덤하게 혹은 바지런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이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몸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만큼은 미래를 향해 뜀박질하는 일.
그렇게 희망이라는 재료를 통해 시간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과정이 기다림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공백을 채워야만 오는 게 있다.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진짜 소중한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가끔은 되살펴야 하는지 모른다. 소란스러운 것에만 집착하느라, 모든 걸 삐딱하게 바라보느라 정작 가치 있는 풍경을 바라보지 못한 채 사는 건 아닌지,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드는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눈을 가린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사실 유머와 개그는 조금 결이 다른 개념이다. 개그는 상대방을 웃기기 위해 끼워 넣는 즉흥적인 대사나 우스개를 뜻한다. 웃기는 게 유일한 목적이다.
유머는 그렇지 않다. 익살과 해학과 삶의 희로애락이 적절히 뒤범벅된 익살스러운 농담을 의미한다. 유머 앞에서 우리가 왁자지껄 웃어젖히다가도 어느 순간 씁쓸한 눈물을 쏙 빼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머의 어원도 흥미롭다. 유머는 라틴어 우메레에서 유래했다. 물속에서 움직이는 유연한 성질을 지닌 물체를 지칭한다. 그래서일까. 적당한 유머는 삶의 경직성을 유연성으로 전환하고 획일성을 창의성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시인의 말처럼 우린 종종 슬픔에 무릎을 꿇는다.
그건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잠시 고개를 조아려 내 슬픔을, 내 감정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과정일 터다.
그러니 섣불리, 설고 어설프게 슬픔을 극복할 필요는 없다. 겨우 그것 때문에 슬퍼하느냐고, 고작 그런 일로 좌절하느냐고 누군가 흔들더라도, 너무 쉽게 슬픔의 길목에서 벗어나지 말자.
차라리 슬퍼할 수 있을 때 마음에 흡족하도록 고뇌하고 우록 떠들고 노여워하자. 슬픔이라는 흐릿한 거울은 기쁨이라는 투명한 유리보다 '나'를 솔직하게 비춰준다. 때론 그걸 응시해봄 직하다.
'나를 아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세상을 균형 잡힌 눈으로 볼 수 있고 내 상처를 알아야 남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란 것도 나를, 내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곤 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일도 그렇다.
때로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발 뒤로 물러나, 조금은 다른 각도로, 소중한 것일수록.
난 바둑 용어는 잘 모르지만 바둑판에 돌을 내려놓던 순간 뜨거워지던 이세돌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 눈빛에서 난,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비장함, 패배에서 승리의 요인을 찾겠다는 열의를 보았다.
"이 구단은 오늘 아주 중요한 삶의 이치를 증명했습니다. 지는 법을 알아야, 이기는 법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상대보다 앞서 걸으며 손목을 끌어 당기는 사랑도 가치가 있지만, 한 발 한 발 보조를 맞춰가며 뒤에서 따라가는 사랑이야말로 애틋하기 그지없다고. 아름답다고.
분노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지 모른다. 살다 보면 누구나 상대방을 죽일 듯이 물어뜯고 싶은 순간이 있고 그런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경우도 있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비우는 행위는 뭔가를 덜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움은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며 자기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여백이 있는 공간을 만들면 신기하게도 그 빈 공간을 다른 무언가가 채우기 마련이다.
설령 사랑이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람이 변하고 만다는 것을.
감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이모션의 어원은 라틴어 모베레다. '움직인다'는 뜻이다. 감정은 멈추어 있지 않고 자세와 자리를 바꿔 가며 매 순간 분주하게 움직인다.
종종 공백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폴 발레리
여행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tour'는 '순회하다' '돌다'라는 뜻의 라틴어 'tornus'에서 유래했다. 흐르는 것은 흘러흘러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을 지닌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언젠가는 여행의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인지도 모른다.
행여 여행길에서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다 해도 낙담할 이유는 없다. 방황이 끝날 무렵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훗날 그 방황은 꽤 소중한 여행으로 기억될 테니까.
우린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무언가 시도하지 않았거나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니 가끔은 단 한번도 던져보지 않은 물음을 스스로 내던지는 방식으로 내면의 민낯을 살펴야 한다. '나'를 향한 질문이 매번 삶의 해법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삶의 후회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살다 보니 그런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선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자세히 응시하는 행위는 우리 삶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관찰=관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도 한다.
사람은 관심이 부족하면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궁금할 이유가 없으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외면하는 것이다.
우울한 사람의 마음을 가장 많이 위로한 사람도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질 수도 있다는 것, 인생의 바다에선 누구나 한 번쯤 길을 잃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어쩌면 수많은 윌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것, 뭐, 어쩌면 우리 모두일 수도 있을 테고.
가끔 삶이 버겁거나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비겁함으로 둔갑하려는 순간마다 나는 숀 교수가 들려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곤 한다.
그러면서 하릴없이 되뇐다.
살면서 내가 용서해야 하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나'인지 모른다고.
우린 늘,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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