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이적 노래에 빠져 있었다. 예전에는 이적이 너무 튄다 싶었다. 나는 늘 무난한 듯 평범한 듯 하지만 깊이 있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어릴때부터 김동률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이적도 알았지만 목소리부터 보이는 모습 모든 것이 독특한 것이 겉만 화려하다는 편견으로 이적 노래를 깊이 있게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예전의 노래보다 요즘의 노래가 좋은 것은 아무래도 지금의 이적이 너무 좋아서인 듯 하다.
그래서 이적이 궁금해졌다. 이적보다 이적 엄마가 더 궁금했다. 예전에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을 읽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것을 보면 대충 읽었거나 내용이 너무나 무난해서 특별하지 않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려고 찾아봤지만 안 보여서 그 책과 함께 더 오래전에 나온 이 책을 같이 주문해서 다시 읽어봤다.
개인적으로 두 책 중에는 이 책이 더 마음에 든다. 박혜란작가님께서 더 젊을 때 육아와 더 밀접해 있을 때 썼던 글이어선지 날것의 냄새가 나고 스스로에 대해 미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더욱 느껴졌다.
슬찬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란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렇게 노력하지 않고도 잘 자라는 모습에 노력없이 이런 성취감을 느낄 수도 있다니 늘 혼자서 뭐든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나에게 이런 일이....생소하지만 가장 행복한 일이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나 자신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마음에 대한 따뜻한 위로가 되는 책이다.
이적이 서울대를 가서가 아니라 음악을 하기 위해서 사회학을 선택했다는 점.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면서 성장한 지금의 모습이 너무나 좋다. 예능에서 약간의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늘 배려하고 예의바른 듯한 모습도 좋다. 이 모든 모습이 설정이 아닌 자기주관대로 경험이 쌓인 모습 같다.
책 속에는 이적보다는 첫째 형과 엄마의 관계를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형이 어릴때부터 철든 모습으로 잘 버텨주고 자라주었기에 동생들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들로 자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준 부모님들도 정말 대단하다. 불안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불안하지만 그대로 믿어주지고 바라봐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책속의 글>
받아쓰기 시험에는 한 번도 만점을 받아 본 적이 없지만, 열 문제 가운데 겨우 두세 개 맞던 아이가 여덟 개까지 맞았을 때의 성취감은 대단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이 뜻대로’ 사는 모습을 보려면 무엇보다 부모들의 ‘참을성’이 필요하다.
“거친 황야를 홀로 걷는 기분이었어요.”
큰애가 웃지도 않고 읊는 대사는 마침 얼마 전 청문회에 출석한 한 5공 인사의 입에서 나와 신문 가십난에서 씹힌 것과 한 자도 틀리지 않는 그 대사 그대로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깔깔대고 웃었는데, 결국 그 웃음 끝에 눈물이 따라 흐르고 말았다. 그동안 ‘별난’ 엄마 밑에서 아이 혼자 견뎌 냈을 그 황야, 그 바람, 그 외로움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기 때문이다.
교사에게 돈 봉투를 가져다주는 엄마들의 변명도 똑같다. 다른 엄마들이 다(?) 가져다주는데 혼자만 안 가져다 주면 결국 우리 아이만 미움을 받게 되니 울며 겨자 먹기로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더구나 교사가 보기에 그 집 부모라면 객관적으로 가져다줄만한 형편이라고 판단될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해지기 때문에 알아서 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촌지에 관한 한 전부터 태도를 분명히 정해 놓고 있었다. 간단했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므로 하지 않기로. 나는 원래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 만큼 평소 생활 원칙 같은 것을 딱 부러지게 정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고집스러웠다. 아마도 내 어릴 적 상처들이 너무 깊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 자식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다른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나쁜 어른은 되지 않겠노라고 결심한 것이다.
엄마들이 우려했듯이 우리 아이들은 내가 보기에 바보가 되지도 않았고 기가 죽지도 않았다. 아마 부모를 닮아 성격이 워낙 무딘 편이라 선생님이 구박해도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가끔 가다 내가 보기에도 지나치게 표가 나는 선생님을 만날 때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대개 대범하게 웃어넘기는 것 같았다. 내 친구들 말에 따르면, 남자 아이들이라 그렇지 딸이었으면 너도 별수 없었을 거라고 하는데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그렇게 황야를 걸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아이들로 하여금 홀로 바람 부는 황야를 걷게 내몰고는 이제 와서 ‘그렇게 힘들었니?’하며 새삼 놀라고 새삼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는 이 구제받을 수 없는 엄마 같으니라고.
이 엄마 밑에서 자식 노릇 하느라고 정말 애썼다. 얘들아, 그렇지만 산다는 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미리 겪어 보는 것도 괜찮은 일 아니니.
아홉 살밖에 안된 아이들이 벌써부터 타협의 고수가 되어 버렸다면 웃어야 할 노릇인가, 울어야 할 노릇인가. 아이는 단 한번의 깊은 상처로 이미 타협이 편하다는 걸 눈치 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모르는 건 끝까지 모른다고 해라.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사람처럼 바보는 없다.’
“동훈아,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한 사람은 네 선생님이셔. 선생님이라고 해서 뭐든지 잘 알고 뭐든지 옳은 일만 하시는 건 아니란다. 선생님도 틀리실 때가 있어. 왜냐하면 선생님도 사람이시거든. 그리고 선생님들도 다 똑같지는 않으셔. 사람은 누구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야. 어떤 분은 선생님을 직업으로 택하셔도 그 직업에 잘 안 맞는 경우가 있어. 그러니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모르는 건 끝까지 모른다고 해야 해.”
‘시험은 평소 실력으로’라는 게 내 평소 소신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에게 시험공부를 시켜 본 적이 없다. 교실에서 배운 것은 교실에서 익혀 놔야지 그걸 나중에 따로 공부한다는 게 우스웠다.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뭐든지 다 알 수는 없어. 전에 배운 걸 다 머릿속에 넣어 둘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 그러다간 머리가 터질지도 모르잖니. 많이 배운다는 건 지식을 많이 쌓는게 아니라 지혜를 배우는 거야. 답을 몰라도 답을 찾아가는 방법은 안다는 뜻이지. 네가 그 문제를 어디까지 풀다가 엉켰는지 나한테 한번 설명해 봐. 엄마는 전혀 모르는 문제니까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줘야 해.”
“교과서도 시대에 따라 자꾸자꾸 바뀌니까 니네들이 엄마 세대보다 어떤 면에서 훨씬 유식할 수도 있는 거야. 네가 아는 걸 엄마가 모른다고 해서 엄마를 무식하다고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정말 무식한 거야.”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겠다고 죽어라 하고 공부를 할 필요는 없다. 사전에 담긴 지식을 다 외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사전 찾는 법만 알고 있으면 된다. 더 좋은 방법은 아이들이 엄마에게 사전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기보다는 스스로 사전을 찾도록 버릇을 잡아주는 것이다.
평소에도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신물 나도록 봐 왔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이 오히려 나를 소극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둘째는 고등학교 때 수학 때문에 애를 먹었다. 반면 큰애는 수학이나 물리는 공부를 안 해도 저절로 해답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고 했다. 같은 형제라도 아이들은 그렇게 각자 능력과 적성이 다른 법이다.
우리 부부는 자라 온 환경이 아주 다르다. 남편은 경상도 출신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집안의 막내아들이고, 나는 해방 전에 단신 월남한 함경도 출신 실향민의 맏딸이다.
이북 출신에다가 친척이 없이 단출하게 가계를 일구어 온 친정집은 일체의 격식을 거부하는 분위기였다. 친정어머니가 자주 쓰시는 어록 중에는 ‘웃으이(웃으면) 집안이 무고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일단 웃고 보자. 그러면 모든 것이 편해진다는 지극히 낙천적인 철학이 담긴 말이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잔소리라는 걸 모르셨다.
반면 남편 쪽은 상당히 형식을 추구하는 집안이다. 며느리인 내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뼈대를 찾는 집안으로 보여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시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막내며느리라고 들어온 것이 예의도 없고 살림도 제대로 못 꾸리는 것 같으니 속깨나 태우셨음직하다. 그래도 워낙 교양이 있으신 분이라 속에서 열불이 나도 꾹꾹 눌러 오다가 정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본데없는 아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타이르셨다.
남편은 결혼 전후에는 처갓집 분위기가 자유롭고 즐겁다면서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자기 집은 너무 폼을 재고 갑갑해서 숨이 막히는 데 비해 처갓집은 사람들이 펄펄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흑백 논리에 사로잡혀서 예의와 자유를 전혀 반대의 개념으로 설정하는 우를 범했던 건 아닐까. 또 하나, 우리는 아이들과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해선 무조건 반말을 써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존댓말은 부모 자식 간에 거리를 만든다는 선입견에 대해서 왜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까.
그동안의 예절 교육을 되돌아보면, 존댓말은 안 가르쳤지만 식탁 인사는 철저하게 가르쳐 왔다. 밥 먹기 전에 반드시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다 먹은 후에는 반드시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게 했다. 남편이 솔선수범했다. 엄마가 애써서 마련한 음식이니 엄마와 음식 둘 다에게 고마움을 표하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어디서 밥을 먹게 되더라도 꼭 식탁 인사를 했다.
실제로 우리 수입에 비해 파출부 비용이 부담스러웠다는 점, 그리고 건강한 주부가 알량한 정신노동을 핑계로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건 일종의 죄라는 결벽증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콧방귀를 뀌거나 위선이라도 욕할지 모르지만, 절벽을 기어오르는 듯한 정신노동의 피로를 한숨에 씻는 데는 가사노동과 같은 정도의 육체노동이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하루는 겨우 스물네 시간밖에 안되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가끔씩 하는 청소 등 생활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가사노동은 어떻게 겨우겨우 굶지 않을 만큼 해 갔지만, 계절에 맞게 아이들 입성까지 챙겨 줄 시간은 여간해선 잘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쪽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보니 사태는 그야말로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부모 있는 고아들’이 따로 없다 싶어 내 무심함에 더 화가 났다.
도대체 뭘 사달라고 조르는 법이 없이 엄마가 사다 주면 그걸로 대만족이다. 아이들이 평소부터 집안 형편이나 엄마의 성격을 환히 꿰고 있기 때문이라고나 해야 할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둘째는 형의 옷을 물려 입기 싫어했는데, 그건 헌 옷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엄마가 사 주는 옷은 아동틱하고 센스가 없다나 뭐라나. 자기 마음에 드는 옷은 다 해져서 너덜너덜할 때까지 입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은 아무리 비싼 옷이라도 절대로 입지 않았다.
“엄마가 일일이 너희들 옷이나 운동화를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제발 필요한 게 있으면 엄마한테 알려 줘.”
그토록 무덤덤하던 첫째가 자기도 메이커 신발을 신고 싶다는 의사를 집안 형편이 어떠냐는 말로 완곡하게 전해 온 것이다. 훈이는 그 돈을 내게 도로 돌려주었다. 메이커 신발을 정작 사려고 보니 월드컵하고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더라. 그리고 막상 신어 보니까 자기한테는 월드컵이 훨씬 편하더라나.
나는 인심은 인심대로 쓰고 돈은 돈대로 굳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안쓰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좀 철딱서니 없게 굴어도 좋으련만.
남편은 내가 군데 문제에 관한 한 평소의 나답지 않다고 흉본다. 아이들과 관련된 다른 일들-예를 들면 과외나 촌지 따위-에 대해서는 비정하리만큼 원칙론자가 되는데 왜 군데 문제에 대해서는 원칙 없이 우왕좌왕하느냐는 것이다. 엄마가 비틀거리니까 아이들도 아이들도 ‘이상하게’ 논다는 거다. 한마디로 어미나 자식이나 영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남편의 생각은 이렇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국방의 의무가 부여되어 있는 한 젊고 건강한 남자들이 군데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 또, 군대 생활은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썩는’ 세월인 것만이 아니라 ‘사람 만드는’ 기간도 되기 때문에 자신은 자기 아들들이 반드시 군데에 가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 마음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은 군대 가는 것 자체보다 불공정한 이 사회에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군대는 같은 또래의 청년들에게 똑같이 부여된 의무가 아니라, 조금만 양심을 가리고 조금만 편법을 쓰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함정 같은 그 무엇이었다. 제 발로 함정에 빠지는 것을 선택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재빠르고 유능한 부모들이 저마다 귀한 자식들을 빼돌려도 대부분의 대한민국 보통 젊은이들은 ‘의무’라는 굴레를 쓰고 군대에 가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식들이 군대에 가기 싫어한다고 해서 못된 녀석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의무로 정해져 있는 한 안 가는 쪽이 아니라 가는 쪽에 서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마음 편한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나 이기적인 엄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한편에서는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엄마를 잘 이해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나는 이내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이제까지 맺어 온 아이들과의 관계는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 아이들은 상당히 얌전한 편에 속했다. 악을 쓰면서 울거나 발버둥질 치면서 떼를 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물로 그게 천성이었는지 내가 그렇게 훈련을 시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고 해도 조곤조곤 타이르면 다 알아듣는다는 게 내 평소의 믿음이다.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그리고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대개 아이들이 ‘똑똑하고 착하게’ 자라길 바라는데 실제로 그런 아이들을 찾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이들은 자기들과 재미있게 놀아 주던, ‘절대로 공부 잘할 것 같이 생기지 않은’ 사촌 형제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부담과 동시에 훈이는 자신감도 얻은 것 같다. 서울대 공대에 들어간 큰형은 훈이가 생각하던 전형적인 ‘공붓벌레’와는 담을 싼 인상에다가 팝송을 무지 좋아하는 ‘날라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훈이는 자신의 목표를 서울대로 잡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불안했던지 자기가 과연 서울대에 갈 수 있을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서울대에 충분히 갈 수 있는 잠재력이 있어. 그런데 네가 지레 서울대는 무슨 천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단정하고 주눅이 든다면 못 갈수도 있겠지. 문제는 네 마음에 달렸어.”
결국 사촌이 이웃보다 더 가까운 관계로 남으려면 그 부모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요즘 세상이란 게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면서 살기에는 너무 복잡하지 않은가. 누군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 전에는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라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즘 아이들 너무 응석박이인 데다 버르장머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잖아요. 아이들이 제 몫을 하고 엄마를 도와주는 걸 당연히 여긴다면 좋아하실 일이지 불쌍하게 여기실 일이 아니에요.”
집안일을 잘하던 아이들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게을러진다. 학교에서 워낙 늦게까지 붙들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희들이 직접 도와주지는 않을망정 아이들은 엄마가 하는 가사노동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귀찮은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엄마가 없으면 라면 한 끼도 못 끓여 먹는다거나, 엄마가 올 때까지 고스란히 굶는 아이들 때문에 꼼짝달싹 못한다고 넋두리하는 주부가 있다면, 자신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무능력자로 만든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연변에 간 지 여섯 달 만에 학교 행사가 있어 잠시 다니러 와 보니, 집 안은 내가 살림할 때보다 모든 것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마루 벽에 흰 메모판이 새로 걸려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연락장으로 쓰고 있었는데, 그 밑에는 ‘오늘 엄마 오심’과 누구, 몇 시 귀가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영리한 살림꾼들.
어떤 교육학자는 ‘당신의 자녀는 흔들리고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했지만, 흔들리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아이들이 흔들리게 된 데는 사회와 시대의 책임이 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책임져야 할 당사자는 흔들리는 부모들이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 뒤에 소유욕과 명예욕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들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을까.
물론 요즘 엄마들은 자식들에게서 경제적·육체적 부양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서적 지지에 대한 욕구는 윗세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것 같다. 저희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살아온 엄마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헤아려 주고 저희들의 인생에 엄마가 들어갈 자리를 조금만이라도 비워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엄마들이 아이들을 키워 온 방식을 되돌아보면 아이들이 엄마를 제 인생에 끼워 주기를 바라는 게 아예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아이들이 크는 만큼 나 자신도 함께 커 가는 것을 느낀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담긴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무한한 신뢰를 받는 기쁨 속에서 나 역시 인간에 대한 신뢰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업 주부 10년의 경력은 나에게서 한군데 집중하는 능력을 완전히 빼앗아 갔다. 책을 읽으면 글자들이 눈에까지만 들어올 뿐 뇌에까지는 좀처럼 전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자정 넘어서까지 거실에 앉아서 공부를 하다가 너무 속이 상해서 혼자 밥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돌대가리일 수가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하고 자탄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엎드려 울고 있는데 조그만 몸이 내 등 뒤에 실려 왔다. 둘째였다. 오줌이 마려워 깼다가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놀랐나 보다.
“엄마는 우리한테는 꼭 1등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해놓고 엄마는 지금 욕심대로 안되니까 속이 상한 거지? 엄마, 꼭 1등 안 해도 돼.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아이의 위로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긴장으로 메말랐던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 주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는 늘 영원한 천적처럼 나를 비판하고 입씨름을 하던 아이들은 내가 우울해하거나 힘이 빠질 때면 마치 오빠들처럼 나를 위로하고 달래 주었다. 아마 저희들이 외로워할 때 내가 위로해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나 보다.
다른 면에서는 상당히 둔감한 나는 이상하게 외로움에 대해서는 전염이 잘 되는 편이었다. 아이들이 외롭다고 호소할 때면, 나는 조그만게 무슨 외로움이냐고 야단치는 대신 아이를 따뜻하게 꼭 껴안아 주었다. “엄마도 외로울 때가 많아”라면서.
정말 고맙게도 나는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남의 아픔을 위로했던 방법 속에 깔려 있던 이기심과 폭력성이 새삼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런 것들 역시 아이들 말 대로 내가 오십에 발견한 바다의 일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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