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만에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내가 이 소설의 영향을 엄청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 속에 그린 삶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역시나 잊었었다. 그리고 이 책을 내가 더욱 나이가 들어 읽는다면 또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처음에는 너무 재밌었다. 그리고 처음 시작부분에 나오듯 나는 명랑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으로 힘든 가정환경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남는 엄마나 낭만이 있는 이모 두명의 인생극장같은 삶의 모습이 적절히 섞이면 참 좋을텐데 싶었다. 한 사람 같았던 쌍둥이 자매가 결혼과 동시에 둘로 나눴다. 그리고 삶이 너무 달라졌다. 각자의 자존심과 미안함 때문에 편하게 속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사이가 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엄마와 이모가 솔직하게 자신의 힘듦이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면 이모가 자살을 하지도 엄마가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었을까...하며 나는 또 편하게 생각한다.
20살 때 나는 안진진의 마지막 선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안진진은 영리한 선택을 한 것 같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하는 듯 하다. 그리고 이모와도 아버지와도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세상의 수많은 안진진들이 너무 생각만 하지 말고 현실을 잘 살아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제 재밌는 이야기나 읽어야겠다. 내가 사람이나 소설, 날씨의 영향을 엄청 많이 받는 사람이란 걸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흐린 날씨, 우울한 이야기에 내 기분이 쳐지는 것을 나 스스로가 참을수가 없다.
<인물탐구>
1. 엄마 : 결혼 전 별 걱정없이 유복한 가정에서 잘 자랐다. 결혼하고도 친정에 가면 아버지께서 딸들은 움직이도 못하게 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이려고 어머니를 고생시키곤 할 정도로 사랑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억척스러운 가장이 되었다.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포기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2. 이모 : 엄마와 쌍둥이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잘 자라 경제력있는 남편과 결혼했다. 딸, 아들도 잘 자라 외국에서 유학중이다. 그래서 늘 외로웠다. 생일이자 기념일인 4월1일 만우절날이면 남편은 늘 상상할 수 있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큰 걱정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진진이 너, 그런 일은 그냥 잊어버려. 아니면 나처럼 재미있었던 모험담 정도로만 생각하거나. 안 그래도 지루한 세상, 그땐 무지 아슬아슬했었는데, 하면서 말야."
"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너한테 정말 미안해...."
'이모에게도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그것은 첫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자꾸 어긋나는 것 정도여야 어울린다고. 남루한 일상의 고통에서 홀로 자유로운 이모를 보는 것이 내 삶의 큰 위안이었다.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거든.'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3. 아버지 : 너무나 여린 사람이다. 나약함을 술만 취하며 폭력으로 감추려한다. 그러나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줄 아는 낭만이 있어 가족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기보다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치욕에 예민했고 자신에 대한 모독을 가장 못 견뎌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접시를 가져오라고, 그것도 쟁반에 담아오라고 말했을 때, 갑자기 무언가가 내 몸을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는 것 같았어. 정말이야. 참을 수가 없더라구. 안방 벽들이 나를 가두는 감옥 같았고, 달려온 당신은 나를 가두는 간수 같았어. 당신은 몰라. 그 절망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나는 생각했다. 누구나 똑같이 살 필요는 없다는 아버지의 말은 인정하지만, 그렇지만 하필 아버지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참 궁금하다고, 저토록 극심한 고통을 겪어가면서까지 남하고 다르게 살아야 하는 일일랑 나는 못 할 것 같다고.
4. 동생 진모 : 주인공 진진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이 있고 억척스럽지만 끝까지 자신을 보살펴주는 어머니나 누나에 대해서도 고마움은 있다. 하지만 철없는 생각과 행동으로 사고를 계속 친다.
진모의 삶은 진모의 것이었고 진진이의 삶은 진진이의 것이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삶의 공식인가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나는 한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실례의 발언을 하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내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나의 것이지만 그러나 진모에게는 누나의 인생이기도 하고 어머니에게는 딸의 인생이기도 한 것이다. 내 인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나의 남동생의 인생도 가끔씩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5. 나영규 : 철두철미하고 진진이를 위해 자신의 생각과 시간을 정확하게 쓸 줄 아는 남자로 진진이 입장에서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영규 자신의 그 철두철미함을 좋아하는데 자기가 그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느끼기에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치명적인 결함은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하고 있는 남자, 현재를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먼 훗날의 회상 목록까지 계산하고자 하는 그의 도도한 힘이 나에게는 조금 성가셨다.
이 남자와 같이 지낼 앞으로의 네 시간에 대해 아무런 궁금증이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고 다니는 남자. 이 남자 나영규와 앉아 있으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현실이 보인다. 너무나 일목요연해서 어디 제멋대로인 꿈이나 상상 같은 것은 전혀 끼어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잘 정리된 남의 집보다 적당히 너저분한 남의 집이 묵어가기에는 훨씬 편한 법이다.
6. 김장우 : 진진이가 사랑한다고 깨달은 남자. 자신의 형을 자기자신보다 더욱 사랑하는 남자.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나영규의 활짝 웃음이 옆 사람까지도 웃게 만드는 전염성 강한 것이라면 김장우의 수채화 웃음은 여운이 길어 웃음이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난게 만드는 묘한 웃음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스럽게 거기에 생각이 미칠 터였다. 김장우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잘 몰랐다. 나영규라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잇는지 충분히 짐착할 수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하지만 김장우라면 아무 때나 씨익, 수채화 붓질하듯이 한 번 웃고는 얼른 입을 다무는 저 남자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유추하기란 몹시 어렵다.
마음에 담아둔 것을 내보이는 데 한없이 서투른 사람, 그렇지만 마음속에 모든 것이 다 있는 사람.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 안진진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사람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가만히 주의를 살펴보니 내가 아는 착한 애들은 모두 바보였다. 그 당시 나는 단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아주 생각이 깊어졌다. 무슨 일이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주의 깊게 관찰하는 습관도 제법 익숙해졌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타인들 앞에서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를 장악할 수 없어 스스로를 방치해버리는 순간을 맛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결단코 '나'를 장악하며 한 생애를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못 했지만 나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극복은 의외로 쉽다.
순진하지 않은 나, 몽롱해지지 않는 나, 이마는 뜨거워도 머릿속은 한없이 명료하기만 한 내가 정말 싫었다.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특별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찾는 대신 많은 인생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택하기로 했다. 삶의 비밀은 그 보편적인 길에 더 많이 묻혀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작가의 글>
작가란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현실을 소설 위에 세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 번뿐인 삶을 반성하고 사색하게 하는 장르가 바로 소설이라고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믿어왔다. 남의 소설을 읽을 때나 내 소설을 쓸 때도 나는 이 기본원칙을 벗어나지 않았다.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야기와 새로운 현실에서 얻은 감동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다.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레 변해버린 요즘, 불안하고 당황스럽기만 한 시절에,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용기를 잃고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이 소설을 시작했으나, 모순으로 얽힌 이 삶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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