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 읽었다.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이다. 읽으면서 나름 감명깊은 글을 타이핑 해놓고 이해 안 되는 글은 다시 읽어보고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박웅현의 시선이 나랑 닮았다는 것은 예전에도 썼다. 이 책을 읽으며 나에 대해 다시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고 정말 잘 살아온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 열심히 잘 살고 싶어서 흔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꼭 끝까지 읽기 바란다.
<박웅현의 글>
7강 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주리니,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는 전인미답의 인생을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이 읽으면 특히 좋은 책입니다. 그들이 겪어나갈 사고의 혼돈, 인생의 질곡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과 행동이라는 걸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자살은 충동적이에요. 다만 개연성은 있어요. 미시적 우연이지만 거시적 필연인 것이죠. 미시적으로는 충동적인 것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늘 자살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바람기는 다른 말로 '다른 생에 대한 동경'이에요. 다른 곳에 더 나은 인생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동경이죠. 결혼하고 이게 더 심해지는 이유는 결혼과 동시에 다른 선택의 문이 닫혀버리기 때문이에요.
<인생의 지도를 펼치다>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이에요. 비슷할지언정 어떤 인생도 전인미답이 아닌게 없어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어떤 상황에 처음 닥쳤을 때 내 감정 상태를 모르거든요. 이게 사랑인가? 질투인가? 미움인가? 정의인가? 잘 몰라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길을 잃지는 않을 거예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한 여자를 중심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골목골목 세밀하게 표시된 지도처럼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를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진정한 인간의 무리로, 그들에게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우아하고 아름답고 도량이 넓고 대담하고 쾌활하고 온갖 정열에 얼굴을 붉히는 일 없이 몸을 던져야 하며, 그 이외의 온갖 것들은 모두 웃어넘길 수 있어야 했다.'
짓눌린 생기-저는 이걸 안나의 바람기라고 봤는데요. 사실 이것은 그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라고 봐요.
자신이 키티를 바라보는 눈빛과 브론스키를 좇는 키티의 눈빛이 같다고 깨닫죠.
'하느님은 하루를 주었고 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하루도 힘도 노동에 바쳐졌으며, 보수는 노동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정치적 지론이나 견해를 자기가 직접 선택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주장이나 견해가 자연스레 그한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마치 그가 모자나 프록코트의 스타일을 고르지 않고 어느 사람들이 입고 있는 그대로 따라 입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진짜 믿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얘기해야 멋있으니까 하는 사람들, 자신의 실체를 실체화한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니까 유행하는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죠.
'만약 그가 자유주의적 주장을 존중하고 있는 것에 어떤 이유라도 있다면 그가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다 현명한 것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생활 양식에 한결 잘 맞기 때문임에 불과하였다.'
<사랑에 빠지다>
'지금 레빈에게는 세상의 모든 처녀가 명백히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한 부류에는 키티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처녀들이 속해 있고,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온갖 약점을 지닌, 말하자면 아주 범상한 처녀들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류는 약점이라곤 전혀 없는, 모든 인간성을 초월한 오직 그녀 한 사람 뿐인 것이다.'
"나도 마치 스위스의 산줄기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그 하늘빛의 안개를 기억하고 있고 또 알고 있어요. 그 안개는 바로 유년 시절이 끝나가는 그 행복한 시기에 온갖 것을 가리우고 있죠. 그러나 그 거대하고 즐거운 세계에서 나오면 앞길은 차츰차츰 좁아져요. 겉으론 밝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외길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우리는 누구나 다 이런 길을 지나오게 마련이죠."
'특히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남편을 보는 순간 일어났던 자신에 대한 불만의 감정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던 익숙하고 위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녀는 이전에는 이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뚜렷하고 가슴 아프게 그것을 의식한 것이었다.'
<보편적 인간들>
어느 스님이 '사람은 물이다'라고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하죠. 물은 고요한 곳으로 흘러갈 때는 얌전하지만 폭포를 만나면 거세지죠. 물의 성격이 그렇습니다. 저도 그래요. 나쁜 사람 만나면 거칠어지고, 좋은 사람 만나면 착해지고, 조용한 사람을 만나면 차분해지죠. 이게 저고, 안나고, 브론스키고, 바로 우리들입니다. 때문에 톨스토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주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죠. 극적인 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인 거예요.
우리 주위에도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들을 보면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이 있어요. 물론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를 옥죄는 자물쇠가 될 수 있는 그런 눈빛이죠.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설정의 세계에 살아요. 스스로 '나만 한 남편이 어디 있겠어! 완벽하잖아'라고 생각합니다.
'느닷없이 그 다리가 부서지고 밑에는 깊은 못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 심연이야말로 인생 그 자체였고, 다리는 알렉세이 안드로비치가 지내왔던 인위적인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 심연이 인생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은 보지 않고 살았던 거죠. 자기가 설정해놓은 세계에만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늘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실제의 세료쥐아와 전혀 닮지 않았고 책 속에나 있을 것 같은 그가 멋대로 상상한 어린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알렉세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세료쥐아는 아버지가 자신과 닮지 않은 아이를 멋대로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늘 그런 책 속에 있는 어린이처럼 꾸며 보이려고 애를 쓰죠.
니콜라이는 아나키스트 같은 사람입니다. 책 속 인물 중에서 가장 과격하게 차르시스템을 붕괴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죠. 모든 걸 책과 이론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시골에 들어가 삶을 살아가는 레빈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죠.
레빈은 키티에게 버림받았지만 올곧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아요.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레빈처럼 원한 것을 얻지 못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가 생기잖아요?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자신의 몫인데, 레빈은 그 시간들을 조용히 견디는 쪽을 선택합니다.
레빈에게는 '라스카'라는 개가 있는데 레빈은 그 개를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 결심을 해요. 자족에 대한 깨달음이죠. 자족에 대한 깨달음이죠.
'지금까지 그리고 있던 가정생활의 꿈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무의미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모든 게 훨씬 간단하고 훨씬 뛰어나다....'
다른 곳에 답이 있는 걸 알지만 이제 여기에도 답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사는 이 삶을 잘 살면 답이 나온다는 걸 이제 알아요. 다른 어떤 생에 대한 동경도 없어요. 큰 부자, 사회적 명예와 성공보다 집 앞 공원을 지나면서 풀을 보고 초록을 느끼는 내 삶, 내 인생이 좋아요.
'시골에서 그는 자기에게 맞는 장소에 있음을 스스로 똑똑히 알고 아무데도 허겁지겁 나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조급한 생각을 품고 있는 날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도시에서의 그는 마치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항상 허둥거리고만 있었다.'
'모든 것을 더 낫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개조하려는 끊임없이 치열한 노력이 있었던 반면에 다른 한편에는 사물의 자연적인 질서가 있다.'
문을 쾅 닫아버리는 대화죠. 우선 책 좀 읽고 와서 얘기해,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대화야, 이런 식입니다.
<행복, 사랑, 불행의 삼각관계>
성취가 아닌 '성취를 향한 갈망'이 진짜 행복인 것이죠.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불행으로 마무리됐지만 책의 마지막은 레빈과 키티가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납니다.
'자기 마음속의 올바른 재판관'
'나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레빈은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어서 절망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자문하는 것을 그쳤을 때는 마치 자기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왜냐면 그는 씩씩하고 원기 왕성하게 활동하고 또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삶이 있다고 믿었던 안나. 인생은 바로 여기 있다고 믿는 레빈.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책을 통해,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 속에 올바른 재판관을 들일 수 있다는 겁니다.
박형규의 해설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먼 후손들이 꾸준히 그의 작품을 대하며 그것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제가 이 책에 빠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분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혹은 어떤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의연히 삶의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저는 지금도 때때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보며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받은 지도로 길을 찾습니다. 그러면 나를 더 이해하고 상황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실존은 단순히 오늘을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고 사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했어요. 감정은 늘 기복이 있고, 인생은 무상하고, 똑같지가 않고 늘 변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올바른 재판관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지, 그 순간에만 충실하겠다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요. 만약 서른까지만 살 인생이라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평균수명이 늘어 칠십이 넘게 살아갈 인생인데 오년 후, 십년 후, 이십년 후의 삶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어요. 그 순간의 솔직함이 전부는 아니죠.
8강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우리는 지금 미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여태까지 우리가 사는 시대만큼 급변하는 시대를 경험한 적이 없어요. 1350년에 살던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1850년으로 오면 그다지 살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1850년에 살던 사람이 1950년으로 가면 기절해서 정신을 못 차리겠죠. 1950년에 살던 사람이 2010년으로 가면 또 정신을 잃을 거고요. 백 년 전의 사람들만 해도 두 발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전부인 시절이었어요. 시간과 거리에 대한 해석을 포함한 우리의 전반적인 상태가 그 시대와 완전히 다른 겁니다.
<시야를 열다-손철주와 오주석>
뭔가를 더 얻겠다고 바쁘게 움직이는데 왠지 더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인간사 옳고 그름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노라. 그저 꽃이 피고 지는 것만 바라다볼 뿐'
만약 손철주의 한 권을 읽는다면 [인생이 그림 같다]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뼈빠지는 수고를 감당하는 나의 삶도 남이 보면 풍경이다.' 모든 근경은 전쟁이고, 모든 원경은 풍경 같습니다.
책을 통해 얻는 시선의 확장이죠.
'말짱한 영혼은 가짜다.'
저는 이전의 박웅현과 이후의 박웅현을 다르게 만들어주는 책을 좋아하는데 그런 책 중 하나입니다.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그야말로 '안목'이 생기는 것이지요.
'형상이 드러나지 않은 여백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마치 위대한 음악의 중간에 침묵의 몇 초를 기다리는 순간과 같은 마음 졸임이 있는 까닭이다.'
'침묵의 위대함은 앞뒤의 음향이 만든다. 그림 속 여백의 의미심장함은 주위의 형상이 조성한다.'
오주석은 설명에 앞서 "예술은 궁극의 경지에서는 단순해진다. 그리고 분명해진다"라고 이야기하죠.
'단순하다는 것은, 특히 그림이 단순하다는 것은 핵심적이라는 말과 통한다.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은 종종 노년에 다다라서야 얻어지곤 한다.'
통찰이죠.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 법칙을 뽑아내라."
멋지게 보이고 잘 그리려고 노력해서 그린 그림은 티가 난다는 거죠. 그런 그림은 썩 높이 평가하지 않는데, 열심히 그리려고 노력한 자취는 보는 이의 긴장을 유발한답니다. 또 심각한 것도 문제라고 했습니다. 심각한 것은 긴장을 하니까 참마음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림을 노래하듯 편안하게 그리는게 문인화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예술의 격조란 정확히 감상자의 수준과 자세만큼 올라간다.'
<마음을 열다-법정 그리고 동양사상>
지식은 바깥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나오는 거라는 생각을 했죠. 복잡한 사변과 논리를 지혜로 훌쩍 뛰어넘은 글들은 어렵게 읽히지 않아 더 좋아요. 그래서 법정 스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돈오,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어요. 아, 이게 삶의 핵심이구나. 문장 하나를 통해 번쩍하고 깨닫게 되는 겁니다.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법정 스님은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씀도 남겼는데, 불교적인 내용이죠.
긴 흐름으로 봤을 때 제가 칠십 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그만큼의 박웅현이라는 객체는 객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수억 년의 흐름에서 칠십 년인 건데요. 끊임없이 이어진 기다란 띠에서 점 하나 찍는 정도도 안 되는 순간을 제가 사는 겁니다. 큰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제 몸뚱이는 잠깐 동안 뭉쳐졌던 덩어리죠. 어느 순간 생겨나서 칠십, 팔십년 살다가 죽고, 죽으면 썩을 거예요. 땅속에 묻어두면 벌레들이 먹을거고 누군가의 자양분이 되겠죠. 그러면 나란 실체, 존재는 없어지죠. 이렇게 흩어져버리는 게 죽음이고 이게 큰 기의 흐름이라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가 바로 이 얘기인 것이죠. 그렇게 보면 소유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삶의 의미가 있을 겁니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산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고 내 뜰처럼 즐길 수 있다.'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은 마치 장력에 의해서 휘어지는 것처럼 나라는 주관이 들어가면 다 휘어진다는 거죠.
'제가 늘 말하지만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혜의 불로 제련해서 세상에 다시 없는 부자가 되라는 것이 금강경의 내용입니다.
'펼치면 팔만대장경이지만 압축하면 마음 하나로 귀착된다.'
'돈오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살면서 계속해서 그 깨달음을 기억하고 되돌아보고 실천해야겠죠.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좋은 책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책에 대한 긍정적인 편견이 있습니다. 책이면 다 좋다는 편견이죠. 하지만 읽는 시간이 아까운 글들도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점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돈오하려면 깨달음을 줄 만한 좋은 책들을 찾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기필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아만을 버려야 합니다.'
호학심사 심지기의,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는 뜻입니다.
물리적인 거리감이 심리적 거리감을 확보해줬으니까요. 여기는 여기대로 또 좋아요. 행복해요. 다음에 다른 곳에 가더라도 저는 행복할 거예요. 이게 제 삶의 태도입니다.
카프카로 돌아가면 책이 얼어붙은 내 머리의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읽었다고 얘기하기 위해 읽는 건 의미가 없어요. 단 한 권을 읽어도 머리속의 감수성이 다 깨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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