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틈틈히 읽어 새벽에 지하철에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읽다가 눈물이 나서 결국 덮었다. 본문의 마지막 3장 정도 읽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너무 잔인할 정도로 글을 잘 썼다.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이 잘 읽히고 그려진다. 책을 읽었는데 영상을 본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너무나 내 이야기 같아서 복잡미묘한 기분이 완전 달갑지는 않지만 또 한번 내가 보편적이라 느끼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영혜와 언니, 영혜의 남편과 형부..다들 자신들의 결핍으로 관계가 시작되었다. 상대방이 그 결핍을 충족해줄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서. 아마도 언니와 영혜의 남편이 보통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간혹 영혜와 형부가 가지고 있던 욕망을 마음속 깊이 숨기고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고등학교때까지는 언니처럼 살았다. 그리고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영혜처럼 살았다. 지금 나의 모습이 영혜에 가까운지 언니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기대한 남편은 형부였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났더니 영혜의 남편과 닮아 있었다. 이렇게 우리의 모습 또한 수시로 변하며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산다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때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배웠을때 '이세상 소풍처럼 살다 가겠다'는 표현을 너무 좋아했고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왜 사냐건 웃지요'란 말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그저 웃지요'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래서 돈을 벌고 난 후부터 내가 버는 돈으로 즐겁게 사는 것이 재밌었고 이렇게 사는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의 행복을 담보로 무조건 참고 견디는 삶을 나는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여전히 사는 것에 정답이 없다. 어떻게 살아가는게 답인지도 모르겠다. 어제 '사람 관찰'에 대한 글을 썼는데 이 책을 읽으며 시선이 참으로 무서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한번 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시선을 던졌을 뿐인데 사람들은 해석을 하기도 하고 어떤 감정을 담아 보내는 시선도 많다. 영혜가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꿈...어린 시절 좋아했던 개를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끌고 달렸던 순간 개의 시선...영혜의 다리를 다치게 했기에 그정도의 고통은 당연하다고 느끼면서 연민도 일었던 순간이 떠오른 건 우연일까...나는 늘 생각한다. 모든 일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첫번째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의 시선이다, 그리고 몽고반점은 형부, 마지막 나무 불꽃은 언니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영혜라는 본질을 무시한 채 본인들의 욕망을 담아 영혜를 단정지어버린다. 영혜의 남편은 회사일로 바쁘다. 그때 중요한 프로젝트 중이었고 영혜에겐 현모양처로 자신을 내조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언니처럼 사근사근하지 못한 성격에 불만이다. 그 불만을 영혜 또한 당연히 느낀다. 그리고 두번째 형부는 영혜를 자신이 꿈꿨으나 현실과 타협해버린 자신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도구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영혜는 너무나 순수한 영혼이라 성적욕망에 대해서조차 별 감정이 없다. 그저 몸에 그려진 꽃이 이쁠 뿐이다. 대상이 형부가 아니어도 되었고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자신이 꿈꾸던 식물로 변해갈 수 있게 된 계기가 될 뿐이었다. 그리고 언니와 영혜는 같은 고통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방관을 견디며 스스로 살아냈다. 그때 언니는 조숙함 또는 비겁함으로 아버지의 술국을 끓여주는 것으로 아버지의 폭력을 피할 수 있었기에 영혜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니에게는 영혜가 무거운 짐이자 죄책감의 대상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렇게 사람에 의해 상처받고 상처주며 살아가더라도 언니에게 6살 지우가 살아가는 힘이 되듯, 사람이 답이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의식하고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낀다.
이제 해설을 읽는다. 지금까지는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이다. 이 책 속에 또다른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하다.
<한강의 글>
예전부터 난, 누군가가 도마에 칼질을 하는걸 보면 무서웠어. 그게 언니라 해도, 아니, 엄마라 해도, 왠지는 설명 못해. 그냥 못 견디게 싫은 느낌이라고밖엔.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들한테 다정하게 굴곤 했지.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책임의 관성으로, 차마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내와 비교한다면 훨씬 못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처제의 모습에서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언제나 좋은 여자였다. 좋기만 한 것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런 여자였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마무리했던 작업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것으로 기억된다는 데 그는 놀랐다. 그가 거짓이라 여겨 미워했던 것들, 숱한 광고와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들,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들의 눈물 들을 인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었던 작품이었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그녀는 놀라울 만큼 호기심이 없었고, 그 덕분에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탐색도 없었으며, 당연할 법한 감정의 표현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당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 둔감한 그는 그녀의 몽고반점을 알기나 했을까.
웃음이 가신 뒤, 자신이 퍽 오랜만에 웃었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이제 괜찮아.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는데, 그것이 아이를 달래려는 것이었는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의 독특한 무방비상태가 그녀까지 경계를 풀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가 그에게 바란 것은 자신의 힘으로 그를 쉬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써 기울인 여러 배려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지쳐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그는 고지식해 보일 만큼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든 과장이나 아첨의 말을 하지 못했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그런 게 감동을 줘. 그 말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오히려 그가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아니었을까.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다운 말이었다. 미안하다는 고백도, 용서를 빈다는 애원도 생략한 채, 단지 아이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예민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얼마나 자존심에 상처입기 쉽고 잘 좌절하는 사람인지. 그녀가 단 한번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연락해오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라는 것을. 그것을 알면서 아니, 알기 때문에 그녀는 대답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만 기적처럼 고통이 멈추는 순간은 웃고 난 다음이다. 지우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그녀를 웃기고 그녀는 문득 멍해진다. 어떨 때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더 웃기도 했다. 그럴때 그녀의 웃음은 즐거움이라기보다 혼돈에 가까울테지만 지우는 그렇게 그녀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훅, 숨을 들이켠 아이가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를 웃기기 위해 지나치게 애쓸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막막하게 하는 울음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것도, 도움을 청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슬픔을 느끼기 때문에 소리없이 우는 것이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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