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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블로그시작한지1년

[책은도끼다]3강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통찰

내가 좋아하는 알랭드보통으로 한 챕터를 할애했다. 내가 알랭드보통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 생각을 정확하게 말해줘서였다. 내 마음, 생각에 대해 어쩜 저렇게 정확하게 알고 쓸 수 있지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걸 박웅현은 통찰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통찰이라는 표현을 늘 김어준에게 써왔다. 내 주변에 나같은 사람이 별로 없다보니 내가 이상한가하는 생각을 가끔 하는데 책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해주면 역시 내가 이상한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늘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내가 가지는 관심분야가 사람사는 이야기와 예술인데 그 두개를 꼭 분리시켜야하는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알랭드보통의 글을 읽다보면 내가 정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여전히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을 꿈꾼다. 아마도 평생 그러지 싶다.

<박웅현의 생각>

알랭 드 보통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보다 '나는 상대에게 누구인가'가 중요해진다는 이야기죠.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에 초점을 맞춘다는 겁니다. 사실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같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관계없이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는 이게 잘 안 됩니다. 유난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큼은 내가 아닌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중요하지 않고, 저 사람이 좋아해줄까가 중요해집니다. 관점이 모두 상대로 돌아서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알랭드보통의 글>

-사랑에 대한 적나라한 통찰-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우리가 첫눈에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은 우리 머릿속에 작곡된 심포니처럼 멋지다. 우리가 첫눈에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구두나 문학에 관한 취향의 충돌로부터 자유롭다. 음정이 틀린 바이올린이나 늦게 들어오는 플루트로부터 자유로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대의 짙은 눈빛이나 세련된 정신세계 때문이 아니라 저녁 내내 혼자 일기수첩이나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서 연애를 하려고 하는 것은 낭만적인 사랑 개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

플라톤은 예술이란 삶을 모방하고자 분투하지만, 결국 실패할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이상 사회에서 잉여 인간이었다. 로댕이나 클림트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들은 이미 존재하기에 재생산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모방할 뿐이니까. 실제로 침대가 옆에 있는데 침대를 스케치하는 게 무슨 소용 있을까?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예술을 모방한다. 3차원적인 애인에게 받는 키스는 영화에서 보는 키스보다 판에 박은 듯 형편없다는 것이다. 와일드의 낭만적인 미학은 토니 같은 남자들에게 그녀가 내리는 판결문과 같았다. 토니는 사무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앨리스에게 키스를 했는데, 토니의 입에서는 양파 수프 냄새가 폴폴 났고, 행동거지는 오랜만에 돌아온 주인을 맞아 촐랑대는 개와 비슷했다. 앨리스는 특히 앤디 워홀의 작품에 마음이 끌렸다. 생활을 끌어올리는 예술의 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워홀은 소박한 수프 통조림을 가지고 기적 같은 솜씨를 보였다. 예술은 플라톤 적으로 사물을 모방했을 뿐 아니라 와일드 식으로 그것을 고양했다.(...)액자는 이런 의미였다. '여기서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액자 속에는 특별한 것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릴 코널리가 저널리즘은 한 번만 고민하는 것이요 문학은 다시 보는 것으로 정의한 데 따르면, 통조림은 저널리즘적(액체를 담은, 한번 쓰고 버릴 용기)이었다가, 워홀이 액자에 넣음으로써 문학 반열(벽에 진열하고 반복해서 관람하는 것)로 격상된 셈이었다.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오랫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코나 손의 점들을 애인이 칭찬해주는 일은 비슷하지 않을까? 애인이 "당신처럼 사랑스런 손목/사마귀/손눈썹/발톱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라고 속삭이는 것과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어린 여자들은 그 남자의 어떤 면을 세월이 자연스럽게 가져다주는 게 아닌 그 남자만의 장점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단지 지상에 십 년 더 살았기 때문에 얻어진 서른한 살의 성숙함은, 어린 남자들의 서투름만 봐온 스물네 살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이나 인종의 차이가 우월한 지위를 만들어 줄 수 있다. 독일의 육체노동자가 타이로 가면, 역사적으로 독일 경제가 앞서 발전한 점과 환율 덕분에 백만장자인 양 느끼고 행동하게 된다. 평범한 영국인이 북아메리카의 작은 고장에 가면, 이국적인 발음만으로도 매력적이고 세련된 본토인으로 환영받을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린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있는 사람이 된다.

-행복은 선택이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삶, 즉 사람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행불행은 조건이 아니다, 선택이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프루스트와 삶의 변화-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갑자기 생기는 삶에 대한 애착은, 우리가 흥미를 잃은 것은 목적이 보이지 않는 삶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일상적인 형태라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불만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경험이 돌이킬 수 없도록 음울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미세하지만 중요한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책을 읽으면 이런 효과가 있다. 우리는 그 책을 내려놓고 자신의 삶을 계속하면서, 작가가 우리가 다니는 회사에 있었다면 정확히 반응했을 바로 그것들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 그것은 우리가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방에 라디오를 들고 들어온 후에, 조용함이란 오직 특정한 주파수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사실은 처음부터 이 방에 우크라이나의 방송국이나 소형 콜택시 회사의 야간통신에서 나오는 소리의 물결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 그 책은 그 자신만의 발달된 감수성으로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우리의 숨겨진 촉각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책은 그 자신만이 발달한 감수성으로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우리의 숨겨진 촉각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신문 읽기라고 불리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는 지난 24시간 동안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과 재앙들, 5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인들과 배우들의 잔인한 감정을, 그런 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흥분되고 긴장되는 아침의 오락거리로 변형시키며, 이것은 카페오레 몇 모금과 대단히 잘 어울리게 된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모든 것이 예술의 풍부한 소재이며, 우리는 파스칼의 [팡세]에서만큼이나 비누 광고에서도 귀중한 발견을 할 수 있다. "더 잘 쓸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쓸까요?"라고 프루스트는 의심스러워했다. "1871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왜 '모든 연도 중에서도 가장 불쾌한 해'라고 덧붙일까요? 왜 파리에 무조건 '위대한 도시'라는 말이 붙고 들로네에게는 '거장 화가'라는 말이 붙을까요? 왜 감정은 불가피하게 '어슴푸레'하고, 착한 것은 '미소짓고', 사별은 '잔인한' 것이며, 왜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수많은 훌륭한 구절들이 사용된 것일까요?" 그의 대화의 소재를 다른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찾았다. (...) 그는 당신이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대신에 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키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두 살갗이 접촉하게 되면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가, 암호화된 말의 교환은 끝이 나고 드디어 이면의 의미들을 인정하게 될 터였다.

-예술지상주의자 오스카 와일드-

오늘 밤 난 난생처음으로 내가 항상 연기해온 공허한 연극이 알맹이가 없고 엉터리인 데다, 어리석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오늘 밤 난 처음으로 로미오가 추하고 늙은 데다, 화장을 한 것을 의식했어요. 과수원을 비추는 달빛은 속임수이고, 무대 배경은 저속하고, 내가 말하는 대사는 비현실적이고 내 말이 아닌 데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도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어요. 당신은 내게 더 높은 어떤 것을 가져다주었어요. 모든 예술은 단지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 난 그림자에는 넌더리가 나요. "내가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하는 게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건 신성모독인 거예요." 당신은 내 상상력을 자극했었지. 이제 당신은 내 호기심조차 자극하지 않아. (...) 사랑 때문에 자신의 예술을 망쳤다고 제 입으로 말하다니. 당신에게 예술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수기의 느낀점>

박웅현과 나는 바라보는 시선이 비슷한 듯 하다. 어쩜 모든 사람이 비슷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낄 것이다. 본능에 충실하게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여 복잡한 마음을 품어보지 않고 잘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알랭드보통의 책이 좀 어려운 듯 하다. 내 주변에서 몇명에게서 너무 어려워서 읽다가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박웅현도 쉽다라는 표현을 쓰고 이동진도 요즘 많이들 좋아하시죠라고 했었다. 그만큼 요즘 세상엔 복잡한 마음을 품어본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복잡한 마음이란 표현을 쓴 임경선 또한 이런 사람 중 하나인 듯 하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알랭드보통이나 임경선을 더욱더 좋아하지 싶다.

사람과 세상에 관심이 많고 이렇게 복잡한 가운데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다. 그래서 결론도 평범하고 별거 없는 이야기를 참 거창하게 하는군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영 이상하지 않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세상에 저런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