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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블로그시작한지1년

[책]장영희의 '살아온기적 살아갈기적'

이책을 읽으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내가 장영희 교수님이었다면 저런 삶을 살수 있었을까...불편한 몸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게다가 암투병까지...한번쯤은 누군가를 원망해볼 법한데 참으로 유쾌하고 재밌는 사람이다. 장영희답다는 제자의 표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본인의 장애에 대해서는 전혀 게의치않고 정말 조금의 불편함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가벼움을 보며 삶에 대한 의지나 태도가 참 이상적이다라고 느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또 하나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잡생각이 많은 이유가 체력이 남아돌아서라는 걸...건강하게 태어난 이 몸이 너무나 당연한 듯 에너지를 제대로 발산하지 않고 살아왔구나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장영희 교수님의 책속의 글>

오래전 나는 정말 뼈아프게 '다시 시작하기'의 교훈을 배웠고, 그 경험은 내 인생의 소중한 기억 중 하나이다. 나는 그 경험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 중 하나이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서 절망과 희망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 넘어져서 주저앉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

2001년 5월23일 한국의 모 일간지에는 '장영희 교수의 미국에서의 작은 승리'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3주간 겪은 불편,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약간의 보상과 함께 앞으로 장애인 세입자에 관한 특별한 배려를 약속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80세된 루시 메리안 할머니 "운명의 장난은 항상 양면적이야. 늘 지그재그로 가는 것 같아. 나쁜 쪽으로 간다 하면 금방 '아, 그것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군.'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일이 생기거든."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은 사랑하는 사람들, 내일을 위한 희망, 그리고 나의 능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삶을 마무리하고 떠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못 다한 사랑을 해주리라는 믿음, 진실하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아주리라는 믿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주리라는 믿음,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를 때까지 이곳에서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는 믿음-그리고 그 믿음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는 '잊히지 않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지요. 떠난 사람의 믿음 속에서 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삶과 죽음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무한한 가능성 - 갑자기 하늘에서 돈벼락을 맞을 수도 있고, 떠나간 애인이 "내가 잘못했어"하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드디어 한반도가 통일되었다는 저녁 뉴스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무심히 길을 가다 고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맞을 수도 있고, 아무리 믿기지 않아도 눈앞에서 110층짜리 고층 건물이 삽시간에 무너질 수도 있고, "암"은 남의 이야기라는 듯, 잘난 척하며 살던 장영희가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려 죽을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왜?'라는 물음에 나는 별로 논리적인 답을 할 수 없다. 그냥 내 마음이 시켜서 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난 그때 무척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신에게 내가 불운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내 자유의지와 노력만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내 자유의지와 노력만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고, 오로지 건강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우월감을 느낄 사람들이 미웠고, 무엇보다 내가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내 병은 나와 가족만의 비밀로 하고 몰래 투병하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면 헛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늘 반반의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열심히 살아간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 위로를 많이 받았다.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는 데다가 생활 반경이 좁아서 딱히 다른 글감이 없는 나는 한달에 한번 그냥 내 마음 그대로를 고백했다. 가끔은 교수라는 직업 때문에 체면이 좀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숨김없이 내 마음을 고스란히 내어 놓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면 못나고 비뚤어진 나를 누군가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조금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늘 의도와는 달리 남에게 용서받을 일을 하게 되지만, 성서에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리라"(루가 7장 47절)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 나의 잘못을 용서받으면 내가 더욱더 사랑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아름다운 빚을 갚을 의지를 더욱 다지게 될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순형용법 구사가들인지 모른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지만 또 서로 도와 가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 세상이야말로 제일 좋은 모순형용법의 예이다.

우리는 때로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부끄러워한다. 아니 무섭게 덤벼드는 세파와 싸워 이기고 살아남는 길은 내 속의 어린아이가 나오지 못하게 윽박지르고 숨기고, 딱딱하고 무감각한 마음으로 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짓눌러도 우리 마음 속 어린아이는 죽지 않는다. 아무리 숨겨도 가끔씩 고개를 내밀고 작은 일에도 감동하는 마음, 다른 이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는 마음으로 우리 가슴을 두드린다. 아무리 무시해도 가끔씩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감탄하고, 함께 행복해하고 싶어한다.

나는 사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고, 그래서 돈에 관해 초연하다. 아니 내가 돈에 대해 초연하다는 생각을 즐긴다. 그렇다고 무소유가 미덕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어차피 한세상 살다 가는 것인데 이왕이면 편하게 많은 것을 누리며 살다 가고 싶다.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사람이면 누구나 다 메고 다니는 운명자루가 있고, 검은 돌은 불운, 흰돌은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이 돌들을 하나씩 꺼내는 과정이란다. 그래서 삶은 어떤 때는 예기치 못한 불운에 좌절하여 넘어지고 또 어떤 때는 크든 작든 행운을 맞이하여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는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너는 네 운명자루에서 검은 돌을 몇 개 먼저 꺼낸 모양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남보다 더 큰 네 몫의 행복이 분명히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을 남을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다.

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구상의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보쌈을 먹고자 입을 크게 벌린 그 남자의 격렬한 식탐, 꿀꺽 삼키고 나서 그의 얼굴에 감도는 찬란한 희열, 그 숭고한 삶의 증거 앞에 나는 지독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가리라. 그리고 저 치열하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몰랐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지...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one and only 장영희
이 넓은 천지에 유일한 단 한 사람 장영희, 이리저리 방향 못 잡고 헤맬 것이 뻔한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나는 나, 이리저리 미루다가도 코너에 몰리면 그래도 한번 해보겠다고 덤벼 보는 나,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이런저런 실수투성이에 하루가 고달파도 이 세상에 장영희가 있어 조금은 보탬이 된다고 믿는 나, 이리저리 믿게 굴어도 결국은 미워할 수 없는 나다.

'너만이 너다'-이보다 더 의미 있고 풍요로운 말은 없다.(셰익스피어)

오후에 여섯 살짜리 조카가 뜰에서 놀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아이가 큰 소리로 울자 동생 부부가 동시에 맨발로 뛰쳐나가 아이를 안고 들어와서는 허둥댔다. 동생은 아이를 꼭 껴안고 어쩔 줄 몰라 눈물을 글썽이고 동생 남편은 당황해서 연고 찾는다고 이리저리 서랍을 뒤지느라 분주했다. 그때 어머니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야단법석 떨지 마라. 애들은 뼈만 추리면 산다."
뼈만 추리면 산다-성품이 온화한 어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말씀이다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지만 얼핏 그것이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 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 거리는 시간에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 길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연함과 용기, 당당함과 인내의 힘이자 바로 희망의 힘이다. 그것이 바로 이제껏 질곡의 삶을 꿋꿋하고 아름답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힘인 것이다. 그러고 어쩌면 어머니가 무언으로 일생 동안 내게 하신 말씀이었고, 내가 성실하게 배운, 은연중에 '내게 힘이 된 한 마디 말'이었을 것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까지 이리저리 들추어내고, 그 상처가 없어질세라 꼭 끌어안고, 자신은 상처투성이라 아무것도 못 한다며 눈물 흘리고 포기하는데 이들은 여전히 꿈과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가족들, 내 학생들 그리고 내 독자들의 '잘 싸워 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용감한 싸움은 계속한다.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생산적 발전의 '장애'로 여겨 '장애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못 해서가 아니라 못 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장애인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이다. 내 주위에는 늘 좋은 사람들만 있다. 내게는 내가 사랑하는 일이 있다. 남이 가르치면 알아들을 줄 아는 머리와 남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 몸은 멀쩡하다손 쳐도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듣는 안하무인에, 남을 아프게 해놓고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적어도 기본적 지력과 양심을 타고났으니, 그것도 이 시대에 천운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름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은 그 어떤 이름으로라도 여전히 향기로울 것을."

이아러니컬한 것은, 나는 이제껏 나만 보고 살았는데, 열심히 나를 지키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나만을 보살피며 살았는데, 그러니까 이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

<수기의 느낀점>

그냥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면 즐기자는 마음으로 대했지만 '나는 이 일을 좋아한 적은 없어'라고 끊임없이 부인하며 그저 열심히 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 대체적으로 좋았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내가 참 좋았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조금은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위해서냐고 물으면 참 어려웠다. 그냥 '그러는 제가 좋았어요...' 이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직장, 가정 둘다 열심히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미리 난 못해'라고 단정짓고 시도조차 안 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렇게 내 일상에 대해 참 열심히던 내가 남탓하며 마음을 못 잡았다. 그리고 블로그를 통해서 내가 평생 진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도 꽤 잘 살아온 것을 느꼈다. 그동안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를 보면 참 운이 좋았다. 상담할 때 나에게 물었다. 사는게 만만하냐고...내가 그때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고 대답을 했고 몰랐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그런데 블로그를 하면서 깨달았다. 적당히 실패를 경험해봤다면 삶을 좀더 진하게 느꼈을 것이다.

세상을 사는 진짜 의미를 알게 해주려고 슬찬이가 나에게 왔다. 그리고 나는 더이상 슬찬이 핑계 대지말고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당과 블로그가 나자신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일이기에 그 결과 또한 좋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