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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블로그시작한지1년

[말하는대로]홍석천의 버스킹 별종 톱 게이로 사는 법

<홍석천의 버스킹>

여러분 '홍석천'하면 떠오르는 것은? '대머리, 사장님, 패션왕' 다양한 수식어들이 있죠. 그 중에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톱 게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2000년에 커밍아웃 유일무이하게 여전히 외롭게 싸우고 있어요. 단 하나의 캐릭터 대한민국 '톱 게이'입니다.

종로와 이태원이 게이의 고장이거든요. 여기에 게이가 있으시면 손 좀 들어 보실래요? 한 분 정도는 있을텐데...

얼마전 저희가게에 놀러온 지인 "오빠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저도 모르게 스스로 "오빠는 좀 별나, 오빠는 좀 별종이야" 저는 스스로를 여러분들하고 약간 다른 스페셜한 매력을 지닌 별종이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 또래의 남자애들이 들판을 뛰어 놀았을 때 별나게 여자 친구들과 핀치기(땅바닥에 놓고 손으로 쳐서 따먹는 게임)라든가 고무줄 놀이를 하고 놀았어요. 핀치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동네누나들 실핀을 싹쓸렀어요. 따먹기만 했으면 그저 그런 평범한 아이였을 텐데 핀치기에서 딴 실핀을 옷핀에 20개씩 꽂아서 50원씩에 팔았어요. 저희 아버지께서 저를 보시더니 "왜 여자애들 노는 짓을 해!"라며 실핀을 모두 재래식 화장실에 버렸어요. 화장실에 빠진 실핀을 대나무로 수거해서 동네 누나들에게 재판매했죠.

제 정체성이 조금 별난 학생이라는 것을 초등학교4학년때부터 느꼈는데 제 정체성을 제 스스로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렸습니다. 대학교 때까지도 이성친구와도 교제도 했구요. 사람들이 말하는 '평범'을 위해 노력했어요.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보면 제 심장이 평소와 똑같이 뛰어요. 근데 이렇게 파란 재킷을 입은 남자를 보면 심장이 쾅쾅쾅쾅 해요. 심장의 신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죠.

고향이 충남 청양인데 시골에서 튀는 행동을 하면 친구들한테 놀림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살짝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중학교 때로 기억을 하는데요. 소위 말한 '일진 친구들'에게 끌려가서 폭행도 당하고 성폭행도 당하고 했어요. 그때 당시 학교에서 공부를 꽤나 잘하던 녀석이었는데 그 일 후 성적이 계속 떨어졌고 말하지 않아 저희 부모님도, 선생님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어요.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했지만 빈 껍데기 상태였죠. 그 악몽을 어떻게 극복을 해야 할까? 오랜 시간동안 벗어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어느 날 순간! '내가 먼저 용서해야겠다. 내가 먼저 그 친구들을 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고향에서 친구들을 만났어요. 악몽 같은 시간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내 인생이 망가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힘들었지만 나를 위해 용서를 했어요.

제가 커밍아웃을 2000년도에 했는데 굳이 커밍아웃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 당시 <남자셋여자셋>시트콤에서 독특한 캐릭터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랬던 제가 왜 갑자기 서른살에 뜬금없이 "나는 게이다."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나는 게이다"라고 말했냐.

커밍아웃을 하기 전 우연히 알게 된 지인이 민속주점을 오픈했어요. 전화로 저를 부릅니다. "석천아 형이 오픈했어. 한번 떠줘야 되지 않겠니?" 그래서 갔더니 상의없이 준비된 '민속주점 사인회'를 했어요. 세번이나 계속된 무리한 부탁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왜 가야하는지 모르겠어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그래서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돌변해서 갑자기 욕설을 합니다. "너 안 오면 기자 부를거야. 이 호모XX야." 제 정체성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해요. 나의 정체성이 나의 약점이 되더라구요. '과연 나의 인생은 언제까지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야 하나? 커밍아웃을 해야겠다.' 라고 결심했어요. '최초' 타이틀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러던 중 <야한밤>이란 방송에서 친분이 두터웠던 김한석이 "여자를 좋아해요? 남자를 좋아해요?"라고 물었는데 제가 스스로 "이때닷" 생각해서 방송에서 커밍아웃을 했어요. 방송은 편집됐구요. 그때 생각했죠. '대한민국에서 성소수자로서 커밍아웃하는 것이 참 힘들구나.' 그 이후에 기자의 요청으로 잡지 인터뷰로 커밍아웃하게 되었어요. 제 의지로 커밍아웃을 선택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택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숨 죽이고 무작정 섭외만 기다리고 있어야 했죠. 답답했던 그 순간 돌파구가 되었던 건 음식이었어요.

여기서도 제가 별종인 짓을 또 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강남에 가게를 낼 것을 권유했는데 겁도없이 이태원에 냈어요. 심지어 당시엔 생소한 루프탑스타일을 게획해서 특이하게 최초로 옥상에 식당을 오픈했어요. 진짜로 가게가 잘 될 줄 알았어요. 2년동안 망할 뻔 했어요. 매달 천만원씩 적자가 났구요. 경제적 어려움보다 힘들었던 것은 동네주민들이 '호모XX, 너 어디 한번 해봐라.' 하는 차가운 시선이었어요. 동네 건달들이 와서 이유없이 저희 직원들 두들겨 패고 가구요. 손님들이 저를 보고 도망까지 가기도 하구요. 가장 힘들었던 건 건물주와의 관계였어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도 있잖아요. 저도 4억을 들여서 7년 넘게 잘 운영해오던 가게에서 1원 한푼 못받고 쫓겼난 경험도 있어요. 울고 불고 사정 얘기를 해도 협박하며 쫓아내더라구요. '이렇게 세입자로서의 생활이 불행하다면, 내가 건물주가 되리라.'하고 결심했죠. 이태원의 허름한 건물을 매입해서 다시 시작했어요. 물론 은행이 80% 소유중이구요.

별종 톱게이 홍석천

이렇게 제 버스킹은 끝입니다. "전 게이입니다. 그래서요?" 제가 게이라고 여러분들이 저 때문에 게이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만 한가지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요 저와 같은 성향을 가진 친구들 중에 다르다는 이유로 친구들한테 왕따 당하고 심지어 성폭행도 당하는 그래서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는 그 아이들이 여러분의 동생이 될 수도 오빠가 이거나 직장동료일 수도 아들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변의 많은 성소수자들이 어떤 욕을 들어도 참을 수 있고 살 수 있는데 부모가 자신을 외면하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더라구요. 가까이 한 걸음만 먼저 다가와 주시면....오늘 너무 멋진 시간 감사합니다.

<친구중에 성소수자들이 좀 많은데 그 친구들이 고민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 무엇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중요해요.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걸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들어주고 따끔하게 이야기할땐 이야기해주는 것이 중요해요.

<수기의 느낀점>

홍석천에 대해서는 좋지도 싫지도 않고 그냥 봤다. 방송에서 늘 밝은 모습을 보여줘서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예민하게 생각하고 느끼다보니 한번씩 참 힘들텐데 저렇게 밝게 열심히 사는 모습이 참 좋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오늘 방송을 보면 참 외롭고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째 계속 내 카톡 프로필은 '지금 여기 무조건 행복 - 평범한 삶을 위한 용기'라고 적어놨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평범하게 산다는 것도 참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외형도 다 다르듯 마음도 다르고 생각도 다 다르다. 이것을 틀렸다가 아니라 다르다로 받아드리고 인정하는 사회분위기가 정착되기까진 시간이 걸린 듯하다. 그리고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슬찬이도 평범하게 잘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특별하다는 것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야기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조금은 더 힘들수도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밤은 책이다>에 적힌 글 중에 우산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우산은 원래 여자들만 쓰던 것이라고 한다. 지금과 같이 남성들도 우산을 쓸 수 있게 된데는 영국 신사인 조나스 헌웨이 덕분이라는 글이 있었다. 1750년부터 비가 내리건 해가 내리쬐건 우산없이 외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깔보기 시작했고 조롱했다.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남은 인생 30년을 우산을 쓰고 다녔다. 사람들은 점점 비가 내릴때마다 마차를 부르기보다 한번만 투자하여 우산을 찾는 편이 싸게 먹힌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조나스 헌웨이가 1786년 세상을 뜰 때까지 우산은 비가 오는 날이면 영국 신사들 손에 들려 있었고 '헌웨이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세상의 편견과 맞서싸우고 있는 홍석천의 용기에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자기자신에 대해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성소수자들 중에 용기를 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세상의 기준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것, 누려야 할 것들에 대해서만 최소한으로 엄격하고 그 외에는 마음을 열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