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모르게 주입되어 그게 애초부터 내가 꾼 것으로 착각한 어린 날의 꿈이 있었다. 스스로의 보잘것없는 능력을 눈치 챈 뒤 일찌감치 접은 젊은 날의 꿈도 있었다. 꿈이 아예 없던 시절도 꽤 길었다. 때로는 차선을 찾아 나섰고, 때로는 그저 최악을 피하려 했다. 어느새 영화평론가 혹은 라디오DJ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게 지금의 나는 낯설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며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환영처럼 흔들린다. 그래도 나만이 나를 견딜 수 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다. 나는 책을 펴든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 이동진 |
언제부턴가 책 욕심이 있었다. 책을 읽고 싶다기 보다 갖고 싶었다. 나의 대학시절을 생각하면 공강시간때 도서관에서 책읽는 시간만큼은 참 행복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블로그 포스팅 거리를 찾다 중학교때부터 좋아했던 이동진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고 책을 소개한다고 하니 참고해서 읽고 블로그에 써야겠다 정도로 생각하고 골랐다. 처음 표지를 넘기는 순간 내가 왜 이동진을 좋아했는지 알게 되었고 표지가 다시 보였다. '시간과 연민, 사랑에 대하여' 이동진과 함께 읽는 책들. 이동진도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왔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낀 이동진은 따뜻하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다. 책욕심이 있어 책 사는 걸 자제할 수 없고 사놓고 읽지 않은 책도 많고 읽고도 얼마 안 지나 기억이 나지 않는 책도 많단다. 참 인간적어서 더욱 좋아졌다. 그리고 표현하는 것에 서툴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경에 대한 글이 있다. 중학교2학년때부터 오랜 세월 안경을 써왔지만 늘 평범한 안경테에서 벗어나 본적이 없던 그가 안경점에서 빨간테를 써보고는 내려놨다가 결국 다시 선택했다. 이 책의 자기 소개와 함께 있는 사진이 빨간안경테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그저 안경테 하나 바꿨을 뿐인데 튀는 안경을 소화하는 작은 용기와 작은 의지는 곧 세상에 대한 저의 태도에 작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 작은 변화는 결코 작지 않은 또다른 연쇄적 변화를...' 이 글을 읽으며 이동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적 없이 튀지 않고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오고 있지만 내면의 갈망들이 있는것이 느껴졌다.
이 책은 전형적인 야행성인간인 이동진이 자신이 좋아하는 밤과 관련된 책을 읽고 느낀 자신의 생각에 대해 펼쳐놓은 책이다. '밤은 치열한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부드러운 동화가 시작되는 시간일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밤에 쓴 편지를 낮에 부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낮의 어른은 밤의 아이를 부끄러워하니까요. 하지만 밤의 아이 역시 낮의 어른을 동경하지는 않을 겁니다.' 전형적인 아침형인간인 나에겐 밤은 늘 지쳐있는 시간이다. 저녁6시이후로는 모든 기능이 마비된다고나 할까...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이동진에게는 혼자만의 밤시간이 정말 중요한 듯하다.
내가 전체를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하지만 무진하면 안개가 자욱한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무진기행>이 늘 떠오르곤 했다. '쉽지 않은 나날들을 통과할 때였지요. 그리고 그때마다 <무진기행>을 노트에 따라 적는 작업은 기이한 방식으로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무진기행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약간은 벗어나서 기분을 환기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은 꼭 필요하다. 나는 그 무거운 감정이 싫어 여행을 다녔다. 이제는 공간에 제약을 덜받는 조금은 쉬운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이동진이 소개하는 많은 작가 중 이승우에 주목한다. '이땅의 많은 작가들이 특정한 캐릭터를 창조하는 일에 골몰하지만, 이승우씨는 인간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며 이승우 <생의 이면>의 일부를 소개하고 말한다.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이라고요. 사랑은 내 안에 있거나 상대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좁혀지기도 하고 넓혀지기도 하는 공간에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 조그맣고 불안정한 공간과 모든 것을 변화시키며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열정이 아니라 노력이고 본능이 아니라 본능을 넘어선 태도입니다.' 나는 '열정이 아니라 노력이고 본능이 아니라 본능을 넘어선 태도입니다'라는 글에 정말 공감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요즘 든 생각이 그거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에 따른 태도가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내 모습이 그려진다고 믿고 있다.
이동진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두번 나온다. 이동진이 느끼기엔 아버지의 삶도 그닥 평탄하지만은 않으셨던 거 같은데 이동진이 아버지가 병환중이실때 집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가려다 같이 식사를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아버지께서 누워계신 방으로 가서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감수성이 여리고 따뜻한 이동진도 성인이 되고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여한이 없다.'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떠나신 뒤 장례를 치르고 나니, 마음속이 온통 회환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버지께 제가 잘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끝없이 머릿속에서 반복해 상영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자책으로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그 마지막 대화는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마지막 모습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했던 행동,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나누었던 말들이 긴 시간 동안 마음의 우물에서 계속 울려대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마지막을 통과하고 있는 그때, 우리는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기 어렵다는 겁니다.' 나에게 죽음이란 강박이 늘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는 꽤 엄격하게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정작 나중에 후회할 일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했을때 든 생각이 슬찬이에게 마음으로 잘 해주지 못한거라고 했듯이 나중에 잘해줘야지라는 말로 지금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또한 후회로 남을것이다.
<신의 궤도>라는 책을 소개하며 역도에 대해 이동진의 생각이다. '역도에서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중 가장 강해 보이는 역사의 강인함이 아니라, 그렇게 강한 인간조차도 한계 앞에서 안간힘을 쓰며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는 나약함인지도 모릅니다. 한계선 근처에서 스스로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끝끝내 버텨내려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숭고해질 수 있습니다.' 한번도 역도를 본적이 없다. 농구, 배구, 야구 이런 경기는 재밌게 봤어도 혼자서 자기 무게의 몇 배가 되는 역도를 들어올리는 그 경기가 도대체 왜 하는지 알수 없었다. 이제는 역도경기를 보게 되면 그 선수의 도전에 정말 응원하게 될 것 같다.
<행복의 지도>을 소개하며 행복에 대한 이동진의 생각이다.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에서 비관적인 성향을 타고난 저자는 상대적으로 행복해 보이는 10개국을 떠돌면서 행복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결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과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성실하게 시간 속을 걸어가는 자에게 뜻하지 않게 주어지는 일상의 보너스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행복을 앞에 두고서 일직선으로 내내 좇아 치달리다 보면 어느새 행복이라는 관념 자체에 쫓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할까요.' 내가 블로그를 하고 정말 행복했고 나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행복한 순간들에 대해 정말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결과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고 그들이 본능적으로 원하는 것들을 나는 돌고돌고돌아 이해하고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일상을 소중히 감사히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행복이라는 것을 이제는 정말 알겠다. '오늘이 비록 먼 여정 위의 작은 점 하나 같은 짧은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그 하루만의 행복과 보람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까요. 미래는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목표라는 것은 변할 수도 있으며 결국 하루하루가 없는 삶 전체란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이동진이 생각할 때 최고의 배우를 꼽으라고 한다면 말론브랜도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말론브랜도를 흉내냈던 제임스딘에 대한 세상의 평가에 대한 이동진의 생각이다. '제임스 딘 뿐만 아니라 마릴린 먼로와 커트 코베인에서 체 게바라와 존F.케네디까지, 20세기 역사를 통틀어 신화적 인물로 남게 된 사람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요절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혹시 그건 시간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 건 아닐까요. 도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온전히 피어나지 못하고 불현듯 허리가 꺾여버린 영웅이나 사랑은 결국 그와 같은 불능을 통해 완전해집니다. 말하자면 이건 시간 속에서 결국 패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목도한 인간들이 더 일찍 시들어버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통해 역설적으로 꿈꾸는 방식일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동진의 생각을 읽으며 이동진도 정말 시간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 느껴졌다. 그리고 제임스딘에게 자신의 삶을 살아라고 충고했던 80까지 살았던 말론브랜도의 수많은 작품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이 책에서 또 하나의 기억에 남는 일화는 기타노다케시 감독이 포르쉐를 타고 깨달은 것이다. 포르쉐를 사고 타고 난 뒤 깨달았다. 자기가 타고서는 그 차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친구한테 그 차를 몰아달라고 말하고 택시를 타고 뒤쫓아갔다는 글이 있다. 정말 이래서 기타노 다케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타노 다케시가 만든 영화와 책이 궁금해졌다.
이 외에도 이동진의 삶의 태도가 느껴지는 많은 글들이 많다. 상대방을 충분히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고 살아간다는 것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늘 생각이 많지만 원하는 것은 하면서 산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영화평론가답게 수많은 영화를 보고 그 중에 가보고 싶은 곳은 직접 가보고 책으로 냈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에 대해 엄청난 생각을 하고 영화와 책에서 많은 위안을 받은 듯 하다. 그리고 보통사람인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동진은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알고 사람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에 대한 관심, 연민을 마음 속에 늘 품고 살아가는 이동진이기에 나 또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위안을 받았던 것이다.
- 이동진의 삶의 태도가 느껴진 글 -
'누구나 한두 번은 친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업인은 자신이 하는 직업이 무엇이든 한두번이 아니라 매번, 반복되는 일을 정성들여 해내야 하지 않을까요. 작은 물건 하나를 사고파는 일도 그런데, 하물며 생명이나 사람 자체를 다루는 일들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누군가의 흔한 권태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게 죄가 아니라고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추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마토르'에서 왔다고 하지요. 전력을 다해 어떤 일에 덤벼들 때 그 사람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그 일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떠한 일을 잘하려면 무엇보다 그 일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창작자에게 연민만큼 필요한 능력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삶에서도 마찬가지겠죠. 종종 저는 제 책에 사인을 부탁하시는 분들께 '꿈보다 연민'이란 글귀를 함께 적어드리곤 합니다. 연민보다 더 소중한 감정을, 저는 알지 못하니까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앞으로 어떤 즐거움과 고통이 숨어있는지는 알수 없지만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대로 살아야 적어도 질질 끌려가듯 떠밀려 살지 않을 수 있겠지요.
결국 삶은 이야기입니다. 삶은 떠나도 이야기는 남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삶에 외경심을 가져야 할 진정한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 읽고 싶은 책 -
김승옥 <무진기행>, 이승우 <생의 이면>, 이동진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그리스인조르바>, 마이클케인<명배우의 연기수업>,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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