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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블로그시작한지1년

[책]알렝드보통의 '불안'

알랭드보통의 불안을 읽으며 나란 사람이 참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를 느꼈다. 상담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정확히 와닿지가 않았다. 책을 읽다보니 나는 전형적인 능력주의자이고 능력주의자의 특징은 기회를 공평하게 주되 자기의 노력과 실력에 따른 보상의 차이는 충분히 감내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겐 선천적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 문제다. 노력해보지도 않고 삶을 포기하고 도움만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냉혹한 편이다. 서울역의 노숙인들이나 자기의 의지로 재생에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서울역을 오갈때마다 생각했었다. 어느 시골 한 장소에 타운을 형성해서 농장이든 공장이든 만들어서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사회적 가치로 환원해야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집은 소유는 없애고 법인세, 소득세는 올리고 그 세금으로 노후에 대한 복지혜택을 주는 것이 내가 꿈꾸는 사회였다. 그런데 그런 노동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결혼전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당당하고 멋졌다. 혼자서 뭐든 해서 먹고 살 자신이 있었다. 많은 직업 중에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했고 여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내가 좋아하는 문화생활도 누렸다. 정말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내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상담을 받는동안 깨달은 것이 내가 불안해서 무언가를 계속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을수 없을 정도로 뭐가 그렇게도 불안했을까...12월부터 한달내내 그 고민을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개인적으로 낭만적연애와 그후의일상이 나에게는 결혼에 대한 인식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알렝드보통의 글이 많이 어렵긴 하지만 천천히 그 뜻을 생각하며 읽어보면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처럼 꼬아서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꽤 도움이 된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느끼는 것은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정신승리다. 나의 불안의 원인은 정확히 깨달았다. 나는 높은 지위를 바라는 사람이고 잘 살고 싶다. 이 책 속의 러스킨이 말하는 부를 느끼면서 잘 살고 싶다.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 말이다. 때론 소박하지 않을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이룬 것들로 충분히 만족하면서 즐겁게 사는게 내 꿈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는순간 내가 회피하고 있던 문제에 직면했다. 나는 죽음이 무섭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는 중간에 그냥 성당에 다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역이 아님을 받아드렸다. 그리고 신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솔직히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신에게 나와 슬찬이의 생명을 맡겼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내가 만족할 수 없는 시련이 온다는 것은 다 신이 문제다. 내가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말이다. 나는 내 삶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슬찬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것이다. 그리고 슬찬이도 나처럼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목표가 되었다.

이 책 무슨 교과서도 아니고 역시 어렵다. 두달에 걸쳐서 수험생 같은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읽어보고 느낀건 역시 알렝드보통은 대단하고 나하고는 잘 맞는다. 앞으로도 기대가 된다.

알랭드보통의 불안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지위"이다. 지위란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뜻한다. 높은 지위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다.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이 포함되며 남들에게 먼저 배려받고 귀중하게 여겨진다는 느낌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다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원인>

1. 사랑결핍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

사랑은 가족에서 나타나든, 성적 관계에서 나타나든, 세상에서 나타나든 일종의 존중이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볼 수도 있겠다. 불편은 모욕을 동반하지만 않으면 오랜 기간이라도 불평 없이 견딜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의 중요성>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2. 속물근성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 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속물의 존경 대상도 바뀌기 때문이다. 훌륭한 행동으로 남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근저에 깔린 감정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를 끌어안아주었던 관대하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다시 붙잡고 싶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잠시 아슬아슬하게 손에 쥐고 있는 지위가 본질적 자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3. 기대

<물질적 진보>

제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경제 팽창에서 서방, 특히 미국의 소비자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특권을 누렸지만, 동시에 가장 괴로운 사람들이 되었다.

<평등, 기대, 선망>

서구의 보통 시민에게 지위로 인한 불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즉 자리, 성취, 수입을 놓고 걱정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18세기와 19세기의 위대한 정치 혁명과 소비자 혁명은 인류의 물질적 운명을 크게 개선시키는 동시에 심리적 고뇌도 안겨주었다. 그 중심에 자리 잡은 특별하고 새로운 이상, 즉 모든 인간은 날때부터 평등하며 누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걸고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만 수모를 느낀다. 무엇을 승리로 해석하느냐, 무엇을 실패로 간주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다.

자존심 = 이룬것 / 내세운 것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기대의 좌절에 따르는 위험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더 심각해졌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영원한 삶의 짧은 서곡에 불과하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이 영원한 삶을 배경으로 보면 순간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질투심으로 흐르는 마음을 다독일 것이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4. 능력주의

<실패에 관한 유용한 옛이야기 세 가지>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이야기 세가지>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문명 전체, 그리고 사회의 복지는 불필요한 자본을 축적하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책을 고를 때 중요한 것은 저자의 아버지가 문인인가 또는 부자인가보다는 책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이었다. 능력주의자들은 상당한 불평등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귀족과 생각이 같았으며, 처음 일정 기간에는 기회의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급진적인 평등주의자들과 생각이 같았다. 자신의 지능과 능력만을 기초로 위엄 있고 보수 많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이제 부가 품성의 온당한 지표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능력주의 시대를 맞아 정의는 부만이 아니라 빈곤의 분배에도 관여하게 된 것이다. 낮은 지위는 이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래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훌륭하고 똑똑하고 유능한데도 왜 여전히 가난한가 하는 문제는 새로운 능력주의 시대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답을 해야 하는 더 모질고 괴로운 문제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할 힘이 있다면 하층 계급들을 지원하는 정치적 행동은 그저 실패에 보상을 해주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 대신 일을 해주면 그들에게서 스스로 그 일을 할 동기와 필요를 빼앗게 된다. 법을 인간 발전의 동인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과대평가다. 아무리 엄중한 법이라도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 수 없고, 낭비벽이 심한 사람을 검소하게 만들 수 없고, 주정뱅이가 술을 끊게 만들 수 없다.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것이 낫다. 자선으로 먹여 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무익한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열심히 일하는 근면한 사람에게 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자선 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나아질 수가 없다.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귀한 사람은 결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5. 불확실성

<불확실한 요인들>

변덕스러운 재능, 운, 고용주, 고용주의 이익, 세계 경제

우리의 지위의 문제를 우연적 요소들에 맡긴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합리적 통제라는 관념에 완전히 물들어, '불운'이 실패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폐기해버린 세상에 산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게 살아야 한다.(라브뤼예르)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라로슈푸코)

중요한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는 감추고 성공은 과장하라. 이것은 속임수이지만, 사실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당신 운명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늘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다.(구이차르디니)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라브뤼예르)

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이윤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경제적 요구다. 또 하나는 피고용자가 경제적 안정, 존경, 종신직을 갈망하도록 이끄는 인간적 요구다. 이 두 가지 요구가 오랜 기간 이렇다 할 마찰 없이 공존할 수도 있지만, 이 둘 사이에서 진지하게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 때문에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임금에 의존하는 모든 노동자의 삶에서는 불안이 떠날 수가 없다.

<해법>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1. 철학

<명예와 약점>

주위 사람들이 악하거나 수치스럽다고 겁쟁이이거나 실패자라고 바보이거나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의 눈에도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자기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좌우되기 때문에 사람들 마음에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이 자리 잡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총을 맞거나 칼에 찔려 죽는 쪽을 택한다.

자신이 규범을 지키지 않는 것도 불명예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욕에 충분한 폭력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도 불명예였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판단하려고 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호적인 시선을 받고 싶은 강렬한 요구는 과거와 다름없이 우리 생각을 지배한다. 스페인어로 데스온라도-'불명예를 당한 자'라는 뜻이지만 그 현대적인 함의는 섬뜩할 정도로 강한 경멸이 담긴 말인 '패배자'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칼데론이나 로페 데 베가의 비극에 나오는 인물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괴롭힐 수 있다.

<철학과 약점의 극복>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쇼펜하우어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독립적으로 살라'고 간청할 뿐이다.-샹포르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다. 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에픽테토스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욕은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에게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지위가 장터의 감정이나 변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양심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이성 덕분이라고 보았다. 품위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좌우되지 않는다.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고 권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을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철학적 이상 : 용기, 관대함, 온화함, 재치, 친근함, 의욕

(-) 겁, 인색함, 줏대없음, 촌스러움, 무뚝뚝함, 지위에 대한 무감각

(+) 무모함, 낭비, 격분, 익살, 아부, 지위로 인한 히스테리

<지적인 염세주의>

여론에 결함이 있는 것은 공중이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엄격하게 검토하지 않고 직관, 감정, 관습에 의존해버리기 때문이다. 여론의 빈곤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 깨달음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불안 다른 사람에게 훌륭하게 보이고 싶은 피곤한 욕망, 사랑의 표시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갈망을 다독이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냉소주의자들은 단지 불편할 정도로 기준이 높은 이상주의자들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2. 철학

<머리말>

아널드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예술은 구름 잡는 이야기이기는커녕,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다. "<데일리 텔리그라프>의 젊은 사자들"에게 예술이 아무리 비실용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아널드는 이런 태도의 핵심을 이루는 선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한다-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우리는 타락한 피조물로서 늘 가짜신들을 섬기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남의 행동을 오해하고, 비생산적인 불안과 욕망에 사로잡히고, 허영과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은근히 또 재미있게, 익살을 부리기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조건을 설명해주는 매체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예술의 역사는 지위의 체계에 대한 도전, 풍자나 분노가 서려있기도 하고, 서정적이거나 슬프거나 재미있기도 한 도전으로 가득하다.

<예술과 속물근성>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도덕적 렌즈로 보면 높고 강한 사람은 작아지며, 잊혀져 뒤로 물러나 있던 인물이 오히려 크게 보일 수 있다. 소설의 세계에서 덕의 움직임은 물질적 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상의 선은 역사적으로 거창하지 않은 행동들 덕분에 확장되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나나 더 나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았던 것은 반은 드러나지 않은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지금은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덕이다. 예술이 사람의 공감을 확대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이>
사마드는 자신의 존엄을 찾는 꿈, 자신의 지위의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결과에서 벗어나는 꿈을 꾼다. 그는 자기 내부의 풍요로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갈망을 느낀다.

나는 웨이터, 이혼녀, 간통자, 도둑, 교육받지 못한 사람, 이상한 아이, 살인범, 죄수, 낙제생, 스스로 아무 말도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단지 그런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장-밥티스트 샤르댕 <회복기 환자의 식사> 평범한 사람의 생활 속의 평범한 순간이다.

프랑스의 미술 아카데미 1648년 루이14세가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예술의 위계는 화가의 스튜디오 바깥 세계의 사회적 위계와 직접적으로 일치했다.(역사화-종교화-초상화-풍속화)

샤르댕의 예술은 여자가 집 안에서 하는 일 또는 오후 햇빛에 반짝거리는 낡은 도기를 하찮게 여기는 인생관을 전복해버린다.

로마의 신전이나 르네상스 교회의 현란한 매력에는 눈이 쉽게 가지만, 평범한 지붕에 눈이 가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존스는 무시당해온 광경을 우리 눈앞에 들어 올려 그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행복을 이해할 때 이 남쪽의 지붕을 빼놓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것이다.

19세기 덴마크 화가 크리스텐 쾨브케는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전복적 관념을 갖춘 세 번째 위대한 화가다. 1832년부터 1838년까지 쾨브케는 그의 고향 코펜하겐의 교외, 거리, 정원을 돌아다니면서, 여름 오후에 들판에서 되새김질을 하는 소 두 마리를 그렸다. 또 호숫가의 두 부부의 모습을 그렸다. 그들은 저녁에 작은 범선에서 내린다. 밤이 서둘지 않고 땅을 덮으니, 거대한 하늘에는 날빛의 메아리가 영원토록 감돌 것 같은 느낌이다. 창문을 열어두거나 풀밭에 담요를 깔고도 잘 수 있을 것 같은 부드러운 밤을 예고하는 빛이다. 쾨브케는 쪽모이세공처럼 단정하게 자리 잡은 들판, 정원, 밭이 내다보이는 프레데릭스 보르그 성 지붕에서 이 광경을 포착했다. 밤이 서둘지 않고 땅을 덮으니, 거대한 하늘에는 날빛의 메아리가 영원토록 감돌 것 같은 느낌이다. 창문을 열어두거나 풀밭에 담요를 깔고도 잘 수 있을 것 같은 부드러운 밤을 예고하는 빛이다. 평범한 삶에서 누리는 기쁨에 만족하는 질서 잡힌 공동체의 이미지다. 샤르댕이나 존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쾨브케의 예술에도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지배적인 물질적 관념에 도전하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일상생활을 묘사한 위대한 화가들은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엇처럼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비극>

나의 실패를 다른사람들이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며 가혹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일에서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의 물질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세상이 실패를 바라보는 냉정한 태도, 실패한 사람을 '패배자'로 지목하는 집요한 경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패배자'라는 말을 졌다는 의미와 더불어 졌기 때문에 공감을 얻을 권리도 상실했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는 냉혹한 말이다. 처음 생겨날 때부터 위대한 실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조롱이나 심판은 삼간 특별한 예술 형식이 있다. 이 형식의 장점은 파국을 맞이한 사람들의 행동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이런 공감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 받는 일은 드물다. 비극을 본 관객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앞에서 슬픔을 느끼고, 그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진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비극의 주인공은 윤리적 수준에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자질과 더불어 어떤 약점, 예를 들어 지나친 자만심이나 격한 기질이나 충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물은 동기가 악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 즉 판단의 잘못이라고 부른 것, 또는 일시적인 맹목, 또는 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과실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서 끔찍한 페리페테이아, 즉 운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귀중하게 여기던 것을 모두 잃고 거의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내놓는다.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 주인공과 동일시를 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은 비극을 감상한 뒤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결과다. 비극 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따라서 극장을 나설때면 쓰러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우월한 태도로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비극 작가들은 저항할 수 없는 진실로 우리를 이끈다.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모든 어리석은 일은 우리 자신의 본성의 여러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도 최악의 측면과 최선의 측면을 아울러 인간 조건 전체가 담겨 있으며, 따라서 적당한, 아니 엉뚱한 상황이 닥치면 우리 역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러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면 기꺼이 높은 말에서 내릴 것이고, 공감이 커지면서 마음이 겸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우리 자신의 성격과 조건에 내재된 충격적인 측면들을 반영하는 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들이란 작아 보이는 잘못이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의 결과를 알 수가 없음에도 우리는 운명을 의식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가정하곤 한다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우리의 이성과 선견지명은 소포클레스가 '운명', 그 미지의 모호한 힘들과 맞부딪혔을 때 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 등이다. 오이디푸스는 잘못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만하게도 자신이 신탁의 예언을 피했다고 믿었으며, 안이하게도 백성의 높은 평가에 만족했다. 오이디푸스는 오만과 급한 성질 때문에 라이오스 왕과 싸웠으며, 감정적인 비겁함 때문에 이 살인을 예언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그는 독선 때문에 이 죄를 오랫동안 무시해오다가 자신의 죄를 암시하는 크레온을 비난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상했듯이 관객은 경악하면서도 동정심에 사로잡힐 것이며, 극장을 떠날 때도 합창단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의 보편적 의미가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

내 동포 테베 사람들이여, 오이디푸스를 보라. 그는 뛰어난 머리로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었고, /권좌에 올라 모든 권세 위에 올라선 사람이 되었다. / 그의 위대함을 바라보며 누가 선망을 품지 않았으리요? / 그러나 이제 검은 바다 같은 공포가 그를 삼켜버렸다. / 이제 우리가 지켜보며 마지막 날을 기다리니, / 죽어서 마침내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는 / 그 누구도 행복하다 생각하지 마라.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비극 작품은 아주 작은 단계들, 종종 아무 뜻도 없어 보이는 단계들을 통하여 교묘하게 주인공의 성공을 몰락과 연결시켜 나간다. 우리의 의도와 결과 사이의 비틀린 관계를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신문에서 단순히 실패의 이야기의 뼈대만 읽었을 경우라면 가지게 되었을 무관심한 태도, 또는 적의에 찬 태도를 버리게 된다.

1848년 여름 노르망디의 많은 신문에 같은 내용의 짧은 기사가 났다. 루앙에서 멀지 않은 '리'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서 쿠튀리에 집안에서 태어난 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자 델핀 들라마르가 결혼생활의 따분함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불필요한 옷가지 구매와 사치스러운 살림으로 큰 빚을 지고 바람까지 피우다가, 감정적이고 경제적인 압박을 이기지 못하여 비소를 먹고 자살을 했다. 외젠 들라마르는 루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리에서 보건소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환자들의 사랑을 받고 공동체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이 신문 기사를 읽은 사람들 가운데는 스물일곱 살의 야심에 찬 소설가 귀스타프 플로베르도 있었다. 마담 들라마르의 이야기는 그의 마음에 남아 일종의 강박관면이 되었으며,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여행 때도 그를 따라다녔다. 마침내 1851년 9월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을 쓰기 시작하여 년 후 파리에서 출간했다.

플로베르에게 예술은 조악한 도덕주의 정반대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예술은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깊이 탐사하는 영역이고, 이 영역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자나 죄인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조롱했다. 엠마가 공동체에서 자신이 차지했던 지위를 잃은 상태에서 입에 비소를 쑤셔 넣고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릴 때 그녀를 심판하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덮으면서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비극은 실패나 패배에 대한 단순화된 관점을 버리게 하고, 우리 본성의 풍토병과 같은 우둔과 일탈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희극>

필리퐁은 왕을 배로 묘사한 죄로 총 2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로부터 30년 전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렸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시 해학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1799년에 권좌에 오르면서 파리의 모든 풍자 신문의 폐간을 명령했으며, 경찰 총수 조셉 푸셰에게 만화가들이 자신의 외모를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1802년 아미앵 조약을 체결할 때 나폴레용은 심지어 자신을 그리는 모든 풍자만화가는 살인범이나 위조범과 똑같이 다룰 것이며 프랑스로 인도하여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조항을 넣으려 하였다.

농담은 비판의 한 방법이다. 이것은 오만, 잔혹, 허세에 대하여 미덕과 양식으로부터 이탈한 것에 대하여 불평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농담은 겉으로는 해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위험하거나 직접 말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조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왕, 능력이 권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왕은 조롱한다. 인간적 본성을 잊고 특권을 남용하는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은 조롱한다. 우리는 조롱을 하고, 웃음을 통하여 불의와 과잉을 비판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마음이 상냥한 만화가들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근심을 보고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놀린다. 그들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를 비판한다. 그들의 교묘한 솜씨 덕분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자신에 대해 씁쓸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를 비난했다면, 우리는 분노하거나 상처를 입고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만화가들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목표는 유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3. 정치

<이상적인 인간형>

자신이 사는 사회의 이상 때문에 불안이나 실망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충 살펴본 지위의 역사에서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간파할 것이다. 그런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현대의 지위 불안에 대한 정치적 관점>

성공한 사람이란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상업적 세계의 무수한 분야의 어느 한 곳에서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돈, 권련, 명성을 축적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 사회의 기반은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 성취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거둔 것이라고 이해한다.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경제적인 능력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진정한 능력이란 연봉이라는 매개 변수로 말끔하게 포착할 수 없는, 모호하고 복잡한 특질이라고 주장해왔다.

부자가 되는 사람이나 빈자가 되는 사람이나 딱히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소득과 명예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세지다. 수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운과 환경도 있고, 병과 공포도 있고, 우연과 뒤늦은 발달도 있고, 적절한 시운과 불행도 있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힘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근대의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도 시도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자연을 존중하고, 우주의 아름다움에 경외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품고, 음악과 소박한 오락을 즐기는 것. 근대의 상업적 "문명"은 우리를 이런 상태로부터 떼어냈으며, 우리는 풍요의 세계에서 선망과 갈망에 사로잡혀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 미국 인디언 사회에 대한 보고서들은 이들이 물질적으로는 소박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보람있는 생활을 한다고 묘사했다. 공동체는 작고 긴밀하고 평등하고 종교적이고 재미있고 용감했다.

어떤 것에 계속 눈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우아하고 세련된 자동차라도 그 만족감은 인간관계가 주는 만족감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직업에 포함된 많은 것이 편집되고 오직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지위과 관련된 근대의 이상에 대한 공격의 핵심은 이것이 우선순위를 엄청나게 왜곡하여, 물질적 축적 과정을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로 치켜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상을 진실되고 폭넓게 규정한다면 물질적 축적은 우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부란 나비에서부터 책이나 미소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풍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러스킨은 부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부에 강박감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부는 특별한 종류였다. 그는 삶(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러스킨은 말한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러스킨주의자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기존 질서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가장 철저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당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 바로 러스킨 자신이 속한 계급에게 보내는 러스킨의 정치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심판으로 시작했고 또 끝이 났다. '당신들은 도둑떼다.'

<정치적 변화>

사회적 위계 때문에 아무리 기분이 상하거나 난처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위계가 너무 뿌리가 깊고 너무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 위계를 지탱하는 공동체나 신념들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런 위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여 체념을 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울프의 책은 구체적인 정치적 요구에서 절정에 이른다. 여자에게는 존엄만이 아니라,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1년에 500파운드의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 역시 자연스럽지도 않고 신이 주신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된다. 그것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생산과 정치 조직의 변화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이후 유럽과 북미로 퍼져나갔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주입되어 있는 물질주의, 기업가 정신, 능력중의에 대한 열망은 체제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마르크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그리고 다수는 이 체제에 의해 생계를 유지한다.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지위와 관련된 이상 때문에 생기는 불편이 기적적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4. 기독교

<죽음>

톨스토의가 인생의 의미의 위기를 맞아 찾아낸 기독교적인 해법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의 회의적인 여행은 익숙한 궤도를 따르게 된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삶의 더 진정한, 더 의미 있는 길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무엇보다도 사회가 우리를 존중하던 여러 가지 이유를 빼앗아간다. 예를 들어 저녁 파티를 열고, 능률적으로 일을 하고, 후원을 할 능력이 우리에게서 사라진다. 이런 과정에서 죽음은 지위를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던 관심의 덧없음, 나아가 무가치함을 드러낸다. "나 때문인가 아니면 나의 사회적 지위 때문인가?"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아마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죽음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기독교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생각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 진정한 사회관계, 자선에 대한 강조는 공통되는 것 같다. 또 권력, 군사적인 힘, 금전적인 야욕, 명예에 대한 관심을 비판하는 것도 공통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다 놓으면 어떤 행동들은 하찮아 보일 수밖에 없다. 뺨에 보조개가 파이는 아이에게 신발끈 묶는 법을 가르치는 어머니가 둘다 결국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기르는 것이 양념을 파는 것보다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이기고 살아가는 데 더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친구를 돕는 것도 군대를 이끄는 것보다는 유리할 것이다.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한다. 낡은 돌들을 보다 보면 성취에 대한, 또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 부그러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폐허는 우리의 노력을, 완전과 완성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라고 한다.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파괴의 힘은 기껏해야 저지하는 정도이지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다. 광대한 풍경 역시 폐허와 마찬가지로 불안을 다독여주는 효과가 있다. 폐허가 무한한 시간의 대표자이듯이 이런 풍경 역시 무한한 공간의 대표자로, 거기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허약하고 수명도 짧은 몸은 나방이나 거미와 마찬가지로 보잘것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의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실제로 또는 예술작품을 통하여-것일 수도 있다.

<공동체>

현대 세속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한 입장에 따르면 '다른 모든 사람처럼' 끝나고 마는 것보다 더 창피한 운명은 없다. '다른 모든 사람'이란 평범하고 순응적인 사람들, 따분한 교외 거주자들을 포괄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의 목표는 군중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자신의 재능이 허락하는 어떤 방법으로든 '튀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제공하는 주택, 운송, 교육, 보건의 수준이 낮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피해 단단한 벽 뒤에서 살게 된다. 평범하다는 것이 존엄과 안락에 대한 중간적인 요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일 때는 높은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그럴 때 단단한 벽 뒤에 고립된 채 혼자 의기양양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구는 약화될 것이며, 이것은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 이것이 공동체의 윤리에 적용할 수 있는 기독교적 통찰이다.

<두 도시>

모든 사람이 서로 전혀 연관이 없는 두 가지 종류의 지위를 가진다. 하나는 직업, 소득, 평판으로 결정되는 세속적 지위다. 또 하나는 사람의 영혼과 심판의 날에 신의 눈에 드러나는 장단점으로 결정되는 영적 지위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세속적 영역에서는 권세가 있고 존경도 받아도, 영적인 영역에서는 황폐하고 부패할 수도 있다. 로마인이 높게 평가하는 것-돈을 모으고, 별장을 짓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웃을 사랑하고, 겸손과 자선을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열쇠다. 사람들이 천국과 지상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이런 식으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성공에 대한 억압적인 일차원적 비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독교는 위계의 개념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했다. 가난이 선과 공존할 수 있고, 초라한 직업이 고귀한 영혼과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도시의 다른 건물들은 사람이 거주하거나 먹게 해주고, 쉬게 해주고, 또 그런일을 도와줄 기계와 도구를 제공하는 등 세속적인 요구에 봉사하는 반면, 성당은 사람이 마음에서 자기중심적인 계획을 털어내고 신과 신의 사랑에 다가가게 하는 독특한 기능을 수행했다. 그들의 지상의 거처가 아무리 초라하다 해도, 그들의 마음은 성당에 속해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내적인 가치를 반영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천장은 예수가 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영광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세속적 건물들이 우리에게 지상의 권력의 중요성을 무자비하게 외쳐대는 세상이지만, 큰 도시의 스카이라인에 우뚝 서 있는 성당들은 영을 앞세우는 공간으로 유지되며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하고 있다.

5. 보헤미아(보헤미안들의 사회 또는 집단)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헌신 때문에 외적인 품위의 표시는 부족할 지 몰라도, 보헤미안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들의 윤리적 양심과 감수성과 표현 능력 때문이었다.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소로우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소로우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다. 이 말이 강요된 물질적 상황보다는 의식적으로 선택한 상황을 표현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헤미안들은 또 실패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재규정했다. 부르주아적인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업이나 예술에서 경제적 또는 비평적 실패는 당사자의 인격에 대한 의미심장한 고발장 노릇을 한다. 이들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는 기본적으로 구성원의 노력에 공평하게 보답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시 자체가 무시당하는 자의 우월성의 증거가 된다. 어떤 사람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시인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 때문이다. 많은 보헤미안들이 영적인 관심을 삶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실제적인 문제를 태만히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생존할 만한 일을 찾는데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이렇게 되자 영을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고 몸 생각을 해야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부르주아지가 보잘것없는 미혹된 존재들이라면 이 계급의 지위의 개념과 관련하여 불안을 느끼는 것도 우스울 것이고, 또 그런 불안도 아주 드물 것이다. 보헤미아는 많은 면에서 기독교의 감정적 대체물로 기능하며 실제로 19세기에 기독교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장악하는 힘을 잃기 시작할 때 등장했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의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