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들은 모두 너무 좋은 사람들인지라 고민이 되지 않는다.
중학교2학년 이후 친구를 내가 선택해서 유지했다. 그전에는 내가 마음에 들지만 친구들이 탐탁해하지 않으면 그 친구들 마음에 들려 참 애쓴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난 꽤 이기적이었다. 관계보다 내 실리를 따졌고 내가 손해다 싶으면 관계를 끊었다. 그 모든 계산에 내 열등감이 작용했던 것 같다.
친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듯 하다. 기본적인 가치관이 맞아야 오래 유지 되는 듯 하다.
친구관계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그 물건을 포기하느냐. 어느 쪽을 포기하든 가장 중요한 건, 친구가 더중요하냐 펜던트가 더 중요하냐의 비교가 아니라, 당신이 어느 쪽을 포기하는 걸 더 잘 견디겠느냐 하는거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면, 누구도 탓할 권리, 없다. 그러니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남의 조언이 아니라, 자신이 과연 어떤 결정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러니까 당신 자신이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가만히, 스스로에게, 물어보는거다.
나이를 먹어 어느 순간부터 내 비겁함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그걸 넘어설 수 있게 되면서, 이제는 그때 일이 고맙다. 그로 인해 내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그 경계의 일부를 파악하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첫걸음을 떼게 되었으니까. 선택은 언제나 자신을 드러낸다. 선택이 곧 자신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갖아 먼저 경험하게 되는 법이다.
정말 비겁한 건 자신이 비겁하다는 걸 인정 못 하는 거다
아주 좋은 건 자기가 갖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정도는 이기적이다. 그러니 잘한 일은 아닐지라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식의 도덕주의도 오버다.
실제 당신 삶 중 상당 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우연에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인생의 주요 국면들이 그렇게 닥쳐온 우연과 재수에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거, 생각해면 당연한 거다. 당신을 위해 준비된 삶의 행로란 게 어딘가에 미리 저장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실제 당신은 딱 그 선택의 정도만큼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람인 거다. 자신은 그렇게 자기선택의 누적분이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한 비용과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겠다면, 자신이 그 정도로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란 걸 스스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감수할 의사와 용기가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나쁜 인간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겁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갖가지 거짓과 사기는 결국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좀먹는다. 비겁하고 이기적이면서 스스로 그걸 인정하지 않을 때 진정한 피해는,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입게 된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자가 갖게 되는 자존감의 괴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당당해질 뿐 아니라, 그 기운은 반드시 주변에 전달된다.
이번 기회에 스스로 친구를 위해 내가 손해 볼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따져보시라. 자신의 바닥이 어딘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경제 주체는 반드시 이기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은 누가 대신 보호해주지 않는다. 어떤 경제 주체를 이기적이라 공격하는 게 마땅하려면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 누군가 대신 그들 이익을 보장해줘야 한다. 혹은 공격하는 자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든가. 그러나 누구도 제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포기한 이익을 대신 건사해주지도 않는다. 이해가 엇갈릴 때 이기적이 되는건 그래서 욕심이 아니라 권리다. 그런데 우린 이기심 그 자체가 공격대상이다.
종교의 구속력은 그 목표의 도달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누구도 거기 도달할 수가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종교의 음모다. 우린 이기적인 건 곧 죄악이라 믿도록 훈육되었다. 하지만 이기심은 모든 생명의 존재 원리다. 배타적으로 삼투압하지 않는 나무는 말라 죽는다. 여기까진 기본이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이기적이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기심은 우리 모두의 원죄가 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간다. 이건 정치의 음모다.
이기적 권리가 충돌할 때 그 갈등을 해결하라고 있는 게, 정치다. 이기적 욕구는 당연히 기본이라 인정하고 그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조절해 질서를 조직하느냐 고민하기보다, 욕구 그 자체를 공격해 전체의 자유도를 관제하는 방식, 혼란 비용을 지불하느니 죄책감으로 갈등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방식, 이 근본주의적 통제 방식이 바로 우리 정치의 발명품이다. 중재의 수고를 덜고, 혹여 실패하는 무능을 은패하기 위한, 우리의 그분은 그렇게 오신 게다.
자신이 이기적이란 사실 자체를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기심은 존재의 기본 권리다. 문제는 이기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과연 어디서 그 한계를 긋느냐 하는 거다. 그 한계선을 이어 붙이면 그게 곧 자신이다.
당신 잘못도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 친구가 사람인 이상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는 게 불가능했을 텐데도, 절친했다면 당신은 지난 15년간 친구의 감정을 단 한 번도 눈치 채지 못했다. 학창 시절 공부 잘했다는 당신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성적과 관련해 느끼는 그런 종류의 낙담을 인식하거나 배려하는 데 익숙하지 못했을 게다. 그런 식의 만성적 열패감을 스스로 느껴보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몰랐다는 말만으로 충분한 양해를 구하기엔 15년의 세월이 너무 길다. 그리하여 당신에겐 무심했단 죄목이 가능하겠다.
상대적 열등감 없는 사람, 드물다. 그게 공부든, 외모든, 경제력이든, 문제는 그 열등감과 어떻게 대면하느냐인데 그는 숨기고 아닌 척하는 걸 택해왔다. 그 선태긍ㄴ 분명 자신이 한 거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그런 줄 몰랐다고,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며 그에게 진짜 친구가 되자고 호소하는 것 정도겠다. 그게 15년간 당신에게 피해의식을 가져왔던 그에게 당신이 베풀 수 있는 호의의 한계가 될 수 있겠다.
자신의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의존을 택해왔던건데, 그런건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패턴이 아니다. 그냥 말하시라. 사실대로. 일부러 야박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남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쓴다. 그런다고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이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위해 살면서도 스스로는 그걸 알지도 못한다는 것의 의미는,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을 기쁘게 하는 데 자기 인생을 다 쓰고 만다는 건, 멍청한 걸 넘어 슬픈 일이다. 그러니 거절하는 걸 두려워 마시라. 그 공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처럼 삶의 낭비도 없다.
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있지 않느냐. 물론이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리스크가 따른다. 모든 선택에 따른 위험부담을 제로로 만들어달라고 한다면 그건 삶에 대한 응석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선택의 이유다. 나머지는 그 이유를 붙들고 감당하는 거다. 스스로 설득될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럼 누가 뭐라고 하든 그 결과까지 자신이 감당하는 것, 그게 어른의 선택이다.
중학교2학년 이후 친구를 내가 선택해서 유지했다. 그전에는 내가 마음에 들지만 친구들이 탐탁해하지 않으면 그 친구들 마음에 들려 참 애쓴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난 꽤 이기적이었다. 관계보다 내 실리를 따졌고 내가 손해다 싶으면 관계를 끊었다. 그 모든 계산에 내 열등감이 작용했던 것 같다.
친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듯 하다. 기본적인 가치관이 맞아야 오래 유지 되는 듯 하다.
<책 속의 글>
친구관계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그 물건을 포기하느냐. 어느 쪽을 포기하든 가장 중요한 건, 친구가 더중요하냐 펜던트가 더 중요하냐의 비교가 아니라, 당신이 어느 쪽을 포기하는 걸 더 잘 견디겠느냐 하는거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면, 누구도 탓할 권리, 없다. 그러니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남의 조언이 아니라, 자신이 과연 어떤 결정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러니까 당신 자신이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가만히, 스스로에게, 물어보는거다.
나이를 먹어 어느 순간부터 내 비겁함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그걸 넘어설 수 있게 되면서, 이제는 그때 일이 고맙다. 그로 인해 내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그 경계의 일부를 파악하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첫걸음을 떼게 되었으니까. 선택은 언제나 자신을 드러낸다. 선택이 곧 자신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갖아 먼저 경험하게 되는 법이다.
정말 비겁한 건 자신이 비겁하다는 걸 인정 못 하는 거다
아주 좋은 건 자기가 갖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정도는 이기적이다. 그러니 잘한 일은 아닐지라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식의 도덕주의도 오버다.
실제 당신 삶 중 상당 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우연에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인생의 주요 국면들이 그렇게 닥쳐온 우연과 재수에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거, 생각해면 당연한 거다. 당신을 위해 준비된 삶의 행로란 게 어딘가에 미리 저장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실제 당신은 딱 그 선택의 정도만큼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람인 거다. 자신은 그렇게 자기선택의 누적분이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한 비용과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겠다면, 자신이 그 정도로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란 걸 스스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감수할 의사와 용기가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나쁜 인간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겁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갖가지 거짓과 사기는 결국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좀먹는다. 비겁하고 이기적이면서 스스로 그걸 인정하지 않을 때 진정한 피해는,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입게 된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자가 갖게 되는 자존감의 괴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당당해질 뿐 아니라, 그 기운은 반드시 주변에 전달된다.
이번 기회에 스스로 친구를 위해 내가 손해 볼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따져보시라. 자신의 바닥이 어딘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경제 주체는 반드시 이기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은 누가 대신 보호해주지 않는다. 어떤 경제 주체를 이기적이라 공격하는 게 마땅하려면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 누군가 대신 그들 이익을 보장해줘야 한다. 혹은 공격하는 자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든가. 그러나 누구도 제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포기한 이익을 대신 건사해주지도 않는다. 이해가 엇갈릴 때 이기적이 되는건 그래서 욕심이 아니라 권리다. 그런데 우린 이기심 그 자체가 공격대상이다.
종교의 구속력은 그 목표의 도달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누구도 거기 도달할 수가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종교의 음모다. 우린 이기적인 건 곧 죄악이라 믿도록 훈육되었다. 하지만 이기심은 모든 생명의 존재 원리다. 배타적으로 삼투압하지 않는 나무는 말라 죽는다. 여기까진 기본이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이기적이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기심은 우리 모두의 원죄가 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간다. 이건 정치의 음모다.
이기적 권리가 충돌할 때 그 갈등을 해결하라고 있는 게, 정치다. 이기적 욕구는 당연히 기본이라 인정하고 그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조절해 질서를 조직하느냐 고민하기보다, 욕구 그 자체를 공격해 전체의 자유도를 관제하는 방식, 혼란 비용을 지불하느니 죄책감으로 갈등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방식, 이 근본주의적 통제 방식이 바로 우리 정치의 발명품이다. 중재의 수고를 덜고, 혹여 실패하는 무능을 은패하기 위한, 우리의 그분은 그렇게 오신 게다.
자신이 이기적이란 사실 자체를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기심은 존재의 기본 권리다. 문제는 이기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과연 어디서 그 한계를 긋느냐 하는 거다. 그 한계선을 이어 붙이면 그게 곧 자신이다.
당신 잘못도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 친구가 사람인 이상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는 게 불가능했을 텐데도, 절친했다면 당신은 지난 15년간 친구의 감정을 단 한 번도 눈치 채지 못했다. 학창 시절 공부 잘했다는 당신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성적과 관련해 느끼는 그런 종류의 낙담을 인식하거나 배려하는 데 익숙하지 못했을 게다. 그런 식의 만성적 열패감을 스스로 느껴보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몰랐다는 말만으로 충분한 양해를 구하기엔 15년의 세월이 너무 길다. 그리하여 당신에겐 무심했단 죄목이 가능하겠다.
상대적 열등감 없는 사람, 드물다. 그게 공부든, 외모든, 경제력이든, 문제는 그 열등감과 어떻게 대면하느냐인데 그는 숨기고 아닌 척하는 걸 택해왔다. 그 선태긍ㄴ 분명 자신이 한 거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그런 줄 몰랐다고,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며 그에게 진짜 친구가 되자고 호소하는 것 정도겠다. 그게 15년간 당신에게 피해의식을 가져왔던 그에게 당신이 베풀 수 있는 호의의 한계가 될 수 있겠다.
자신의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의존을 택해왔던건데, 그런건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패턴이 아니다. 그냥 말하시라. 사실대로. 일부러 야박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남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쓴다. 그런다고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이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위해 살면서도 스스로는 그걸 알지도 못한다는 것의 의미는,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을 기쁘게 하는 데 자기 인생을 다 쓰고 만다는 건, 멍청한 걸 넘어 슬픈 일이다. 그러니 거절하는 걸 두려워 마시라. 그 공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처럼 삶의 낭비도 없다.
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있지 않느냐. 물론이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리스크가 따른다. 모든 선택에 따른 위험부담을 제로로 만들어달라고 한다면 그건 삶에 대한 응석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선택의 이유다. 나머지는 그 이유를 붙들고 감당하는 거다. 스스로 설득될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럼 누가 뭐라고 하든 그 결과까지 자신이 감당하는 것, 그게 어른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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