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은 정말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다. 나에겐 이런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30살에 서울에 올라오고 홀가분해졌었다. 내가 장난삼아 '우리집은 몰락한 양반가 같아'란 말을 종종 했는데 이해되지 않는 친척들의 간섭이 너무나 싫었었다. 그 안에 엄마나 할머니나 다 그 규율을 따르다보니 우리도 납득은 안 되지만 따라왔었다. 성인이 되고 보니 솔직히 좀 웃겼다. 별 것 아닌것 같지고 서로 자랑거리들을 나열하며 상대방을 기죽이려 하고 있는 폼들이. 그러고 혼자 나와 떨어지고 내가 시간이 될때 내려가면 기분좋게 마주할 수 엤는 가족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슬찬이가 태어나고 약간의 죄책감이 생겼었다. 가족을 버리고 혼자만 재밌게 살겠다고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리고 슬찬이와 함께 우리 가족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컸었다. 이제는 내가 어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철 들기 싫었지만 철이 드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슬찬이가 김어준처럼 본인의 본능에 충실하며 타인들에 대해서도 공정한 잣대로 말하며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이 있는 사람으로 자라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내가 그렇게 살아야겠다.
결혼은 당신이 당신 의지로 상대 인생에 적극 개입해 체결한 약조다. 책임, 당신에게 있다. 제 몫, 제가 감당하는 게 어른이다. 그 기대가 정당하든 않든, 그에 부응치 못한 거, 미안해하는 건, 옳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패륜은 자식이 유세인 줄 아는 거, 그래서 생전엔 물론 죽은 부모에게조차 유학, 결혼 바라는 거, 그런 게, 진짜 패륜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갖춰야 할 건, 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애틋한 연민이다.
처세는 처세다. 회피술이지 돌파술, 못 된다. 양단간의 피치 못할 정면충돌엔 소용, 안 닿는다. 그래서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처세가 아니라, 입장이다.
물리적 힘만이 아니었다. 한쪽 집안이 기운다며 결혼 반대하는 친척 어른들을 향해 돈 때문에 사람 가슴에 못 박으면 천벌을 받는다며 가족회의를 박차고 일어나던 엄마, 그렇게 언제나 씩씩할 것 같던 엄마가, 보육원에서 다섯 살짜리 소란이를 데려와 결혼까지 시킬 거라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담당 의사는 깨어나도 식물인간이 될 거라 했지만 엄마는 그나마 반신마비에 언어장애자가 됐다.
아들은 이제 사십이 됐고 마주 앉아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만큼 철도 들었는데, 정작 엄마는 말을 제대로 못 한다. 한 번도 성적표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한 번도 뭘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화장실 문짝을 뜯고는 다음에 잘하면 된다는 위로 대신에 그깟 대학이 뭔데 여기서 울고 있냐고. 내가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며 내 가슴을 후려쳤던 엄마, 그런 엄마 덕에 그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로부터도 자유로운 오늘의 내가 있음을 깨닫는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못 한다.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친구가 하고 싶은데 말이다. 이제는 그게 진짜 제대로 된 부모 자식 사이란 걸, 아는데 말이다.
내가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는 말,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엄마는 이런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맞는 거라거나 이런 저런 생각이 옳다거나 하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없다. 엄마는 고등학교 수험생 아들의 도시락도 싸주지 않을 만큼 날 방목했다. 당신도 유아원 운영하느라 바빴으니까. 나 역시 수험생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고 부모 새벽잠을 뺏을 권리가 있나 여겼기에 한 번도 그런 일로 투정 부리거나 야속해해본 적 없고. 그리고 그렇게 철저히 날 방목해주었기에, 무엇이든 해도 된다, 그러나 그 결과도 온전히 나의 책임이란 삶의 기본 철학을 일찍부터 터득할 수 있었다. 하여 그 방목에 무한히 감사한다. 하지만 엄마도 맹모삼천지교 따윈 관심 없는 부모였다. 그래서 어른이 된 지금은 그 말에 웃음이 난다. 아니 모친, 솔직히 모친이 언제 날 키웠슈. 그냥 크게 냅뒀지.
문제는 생모라는 자격을 친자에게 사회경제적 무한결제 요구할 천부의 채권으로 간주하는 대목, 바로 거기서부터 발생한다. 피치 못할 의탁을 미안해하거나 최소한 남세스러워라도 해야 하는 게, 생모고 나발이고 떠나 한 인간으로서 마땅한 염치다.
물론 양육 기간 불문하고 생모는 마땅히 감사의 대상이다. 내 존재를 가능케 했으니까. 하지만 생모라는 이유만으로 친자 인생을 그녀 삶의 번제로 요구할 자격은, 결코, 없는 법이다.
가족이 자신을 위한 사설 자선단체인 줄 착각하는 넘들이 있다. 자신의 몰염치와 이기심을 오히려 가족의 권리인 줄 안다. 인간관계에 이만한 착각도 없다. 이 도착적 가족 윤리, 자본주의의 출현, 사생활의 탄생과 더불어 발명된 '신성한 가족'이란, 근대의 가족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관계가 주는 스트레스와 대면할 때, 한 가지 원칙만 기억하시라.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인류 역사에서 가족이 종교에 버금가는 신성함을 획득하고 사회보편적 가치가 된 것은 바로 그렇게 20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가족이 중요한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가족이란 단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신성함은 그렇게 최근에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사회규범은 언제나 그 방향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압력의 도가 결국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질식케 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게 문제다. 가족이라는 규범이라고 해서 거기서 예외일 수는, 결코, 없다.
모든 아이에게 아버지는 신화니까. 권위와 규율과 질서의 원형이니까. 어떤 아이에게든 아버지의 세속성과 속물성은 수용하기 벅찬 일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부성신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스스로 깨뜨리는 과정 없이, 아이가 어른이 되는 법은, 결코, 없다. 그러니 스물 일곱에 여전히 그 신화에 포섭돼 있다는 건 일종의 성장 지체. 당신의 도덕적 강퍅함 역시 그 부성신화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소녀적 강박의 결과.
우리는 부모를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여자와 남자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시각은 불경스럽거나 외람되다. 부모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다. 부모와 자식이 인간 대 인간으로 연민하고 신뢰하는 대등한 동지적 연대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성립될 수 없다. 이 전복 불가능한 절대 위계 위에 가족이 구축된다. 그리고 그 질서에 따라 각자 자신의 고정 배역만 연기한다. 이 질서를 교란하는 건 패륜이다. 패륜, 사람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 본능이 아니라 도리를 지키지 않는 거다.
명절이 다시 즐거워지는 길은 미풍양속 따위와는 상관없다. 부모는 신분이 아니라 실체다. 가족극의 배역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와 남자다. 그들은 숭고한 효의 대상이 아니라 애틋한 관심의 대상이다.
독립하자. 어른이 되자. 그래서 빚 없는 가족을 만들자. 명절이 즐거워지는 건 그 덤이다.
삶의 낭비야. 그 시간에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다 큰 어른들이 비루한 자신의 삶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꼴불견도 없다
선택은 언제나 선택하지 않은 것을 비용으로 한다.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 모친도 단 한 사람. 임종도 단 한 번.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거다.
반면 일자리를 잃거나 경쟁에서 처진다거나 하는 손해와 손실은 인생 중 만회할 기회란 게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게 아무리 쉽지 않더라도 기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다만 그 최종 결정에 앞서 따져볼 게 있다. 만약 모친 곁에 남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 당신이 치러야 할 비용이 무엇이 되든, 결코, 모친 탓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만, 그렇게 하란 거.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건, 중국에서의 미래나 가능성이 아니라, 당신이 내릴 결정의 결과를 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거다. 모친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그때에만 남겠단 결정을 해도 하란 거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 하나. 당신이 남는 건 뭔가 고귀하고 거룩한 희생을 하는 게 아니란 거다. 그건 당신 존재를 가능케 한 인간에 대한 예의일 뿐이다. 당신 모친이 당신에게 삶을 줬는데 적어도 그녀의 죽음은 지켜주는 게 예의 아닌가. 거기에 장남이고 아니고 따위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장남이니 효도니 따위의 윤리는 잊어라.
그러나 만약 당신이 모친 때문에 희생하는 거란 생각이 들거든 그땐 그냥 중국 가는게 옳다. 중국 가는 길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이미 말한 대로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다. 희생이란 생각을 떠올린다는 자체가 마땅히 지킬 예의란 관점이 아니라, 할 수 없이 지불하는 비용의 관점으로 그 일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그것이 비용으로 계상된다면, 일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즉시, 본전 생각 반드시 나게 되어 있다. 그런 자, 틀림없이, 모친 원망한다.
당신은 지금 한 인간으로서의 바닥을 드러내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그 결정이 곧 당신이다.
허영과 에고를 누군가가 뒷받침해주는 게 주변인들의 마땅한 직분이라 여기는 거다. 모친이 당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건 단순히 자식으로서의 부양 의무가 아니라 그렇게 무조건 자신에게 걸맞은 삶의 수준을 보장해내란 막무가내 어거지다. 당신의 월급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소비되고 있는 품위 유지비.
당신은 모친의 에고를 위해 존재하는 그녀 삶의 데커레이션이 아니라는 거. 모친의 행동으 당신의 삶 자체에 대한 결례다.
가족간의 문제의 대부분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아 발생한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거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그런 선이 없다는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어른이 뭔가, 제 몫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이다. 그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되는 것이고, 그런데 그 순간을 아예 겪지 않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부모는 그걸 사랑이라 착각한다. 그 과잉안락에 안주하는 삶을 자식은 효도라 부르고.
당신은 지금 당신이 대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모가 생략하고 건너뛸 수도 없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망설이느라 정작 자신의 삶이 지체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분리되지 않고서 어른 되는 경로란 없다.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지만 당신은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이다. 그러는 거 효도라 착각 마시라. 효도 아니다. 공포다. 부모 낙담시키고, 기대 저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하여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분리되는 데 대한 공포.
자기 인생, 남의 기대를 위해 쓰는 거 아니라고. 그것이 부모라도 마찬가지다.
책임 못 지면 권리도 없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어른을 어른 대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아적인 거다.
관계미숙아들은 워낙 자기중심적인지라 돌려 이야기하면 그 중에 자신에게 유리한 대목만 선별 청취해 그마저도 자신이 편하도록 일방 해석한다. 그래서 실컷 이야기했더니 엉뚱한 소리 할 공산 크다. 그러니 기왕 이야기한다면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다.
<책속의 글>
결혼은 당신이 당신 의지로 상대 인생에 적극 개입해 체결한 약조다. 책임, 당신에게 있다. 제 몫, 제가 감당하는 게 어른이다. 그 기대가 정당하든 않든, 그에 부응치 못한 거, 미안해하는 건, 옳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패륜은 자식이 유세인 줄 아는 거, 그래서 생전엔 물론 죽은 부모에게조차 유학, 결혼 바라는 거, 그런 게, 진짜 패륜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갖춰야 할 건, 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애틋한 연민이다.
처세는 처세다. 회피술이지 돌파술, 못 된다. 양단간의 피치 못할 정면충돌엔 소용, 안 닿는다. 그래서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처세가 아니라, 입장이다.
물리적 힘만이 아니었다. 한쪽 집안이 기운다며 결혼 반대하는 친척 어른들을 향해 돈 때문에 사람 가슴에 못 박으면 천벌을 받는다며 가족회의를 박차고 일어나던 엄마, 그렇게 언제나 씩씩할 것 같던 엄마가, 보육원에서 다섯 살짜리 소란이를 데려와 결혼까지 시킬 거라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담당 의사는 깨어나도 식물인간이 될 거라 했지만 엄마는 그나마 반신마비에 언어장애자가 됐다.
아들은 이제 사십이 됐고 마주 앉아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만큼 철도 들었는데, 정작 엄마는 말을 제대로 못 한다. 한 번도 성적표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한 번도 뭘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화장실 문짝을 뜯고는 다음에 잘하면 된다는 위로 대신에 그깟 대학이 뭔데 여기서 울고 있냐고. 내가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며 내 가슴을 후려쳤던 엄마, 그런 엄마 덕에 그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로부터도 자유로운 오늘의 내가 있음을 깨닫는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못 한다.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친구가 하고 싶은데 말이다. 이제는 그게 진짜 제대로 된 부모 자식 사이란 걸, 아는데 말이다.
내가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는 말,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엄마는 이런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맞는 거라거나 이런 저런 생각이 옳다거나 하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없다. 엄마는 고등학교 수험생 아들의 도시락도 싸주지 않을 만큼 날 방목했다. 당신도 유아원 운영하느라 바빴으니까. 나 역시 수험생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고 부모 새벽잠을 뺏을 권리가 있나 여겼기에 한 번도 그런 일로 투정 부리거나 야속해해본 적 없고. 그리고 그렇게 철저히 날 방목해주었기에, 무엇이든 해도 된다, 그러나 그 결과도 온전히 나의 책임이란 삶의 기본 철학을 일찍부터 터득할 수 있었다. 하여 그 방목에 무한히 감사한다. 하지만 엄마도 맹모삼천지교 따윈 관심 없는 부모였다. 그래서 어른이 된 지금은 그 말에 웃음이 난다. 아니 모친, 솔직히 모친이 언제 날 키웠슈. 그냥 크게 냅뒀지.
문제는 생모라는 자격을 친자에게 사회경제적 무한결제 요구할 천부의 채권으로 간주하는 대목, 바로 거기서부터 발생한다. 피치 못할 의탁을 미안해하거나 최소한 남세스러워라도 해야 하는 게, 생모고 나발이고 떠나 한 인간으로서 마땅한 염치다.
물론 양육 기간 불문하고 생모는 마땅히 감사의 대상이다. 내 존재를 가능케 했으니까. 하지만 생모라는 이유만으로 친자 인생을 그녀 삶의 번제로 요구할 자격은, 결코, 없는 법이다.
가족이 자신을 위한 사설 자선단체인 줄 착각하는 넘들이 있다. 자신의 몰염치와 이기심을 오히려 가족의 권리인 줄 안다. 인간관계에 이만한 착각도 없다. 이 도착적 가족 윤리, 자본주의의 출현, 사생활의 탄생과 더불어 발명된 '신성한 가족'이란, 근대의 가족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관계가 주는 스트레스와 대면할 때, 한 가지 원칙만 기억하시라.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인류 역사에서 가족이 종교에 버금가는 신성함을 획득하고 사회보편적 가치가 된 것은 바로 그렇게 20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가족이 중요한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가족이란 단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신성함은 그렇게 최근에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사회규범은 언제나 그 방향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압력의 도가 결국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질식케 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게 문제다. 가족이라는 규범이라고 해서 거기서 예외일 수는, 결코, 없다.
모든 아이에게 아버지는 신화니까. 권위와 규율과 질서의 원형이니까. 어떤 아이에게든 아버지의 세속성과 속물성은 수용하기 벅찬 일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부성신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스스로 깨뜨리는 과정 없이, 아이가 어른이 되는 법은, 결코, 없다. 그러니 스물 일곱에 여전히 그 신화에 포섭돼 있다는 건 일종의 성장 지체. 당신의 도덕적 강퍅함 역시 그 부성신화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소녀적 강박의 결과.
우리는 부모를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여자와 남자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시각은 불경스럽거나 외람되다. 부모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다. 부모와 자식이 인간 대 인간으로 연민하고 신뢰하는 대등한 동지적 연대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성립될 수 없다. 이 전복 불가능한 절대 위계 위에 가족이 구축된다. 그리고 그 질서에 따라 각자 자신의 고정 배역만 연기한다. 이 질서를 교란하는 건 패륜이다. 패륜, 사람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 본능이 아니라 도리를 지키지 않는 거다.
명절이 다시 즐거워지는 길은 미풍양속 따위와는 상관없다. 부모는 신분이 아니라 실체다. 가족극의 배역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와 남자다. 그들은 숭고한 효의 대상이 아니라 애틋한 관심의 대상이다.
독립하자. 어른이 되자. 그래서 빚 없는 가족을 만들자. 명절이 즐거워지는 건 그 덤이다.
삶의 낭비야. 그 시간에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다 큰 어른들이 비루한 자신의 삶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꼴불견도 없다
선택은 언제나 선택하지 않은 것을 비용으로 한다.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 모친도 단 한 사람. 임종도 단 한 번.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거다.
반면 일자리를 잃거나 경쟁에서 처진다거나 하는 손해와 손실은 인생 중 만회할 기회란 게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게 아무리 쉽지 않더라도 기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다만 그 최종 결정에 앞서 따져볼 게 있다. 만약 모친 곁에 남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 당신이 치러야 할 비용이 무엇이 되든, 결코, 모친 탓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만, 그렇게 하란 거.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건, 중국에서의 미래나 가능성이 아니라, 당신이 내릴 결정의 결과를 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거다. 모친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그때에만 남겠단 결정을 해도 하란 거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 하나. 당신이 남는 건 뭔가 고귀하고 거룩한 희생을 하는 게 아니란 거다. 그건 당신 존재를 가능케 한 인간에 대한 예의일 뿐이다. 당신 모친이 당신에게 삶을 줬는데 적어도 그녀의 죽음은 지켜주는 게 예의 아닌가. 거기에 장남이고 아니고 따위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장남이니 효도니 따위의 윤리는 잊어라.
그러나 만약 당신이 모친 때문에 희생하는 거란 생각이 들거든 그땐 그냥 중국 가는게 옳다. 중국 가는 길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이미 말한 대로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다. 희생이란 생각을 떠올린다는 자체가 마땅히 지킬 예의란 관점이 아니라, 할 수 없이 지불하는 비용의 관점으로 그 일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그것이 비용으로 계상된다면, 일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즉시, 본전 생각 반드시 나게 되어 있다. 그런 자, 틀림없이, 모친 원망한다.
당신은 지금 한 인간으로서의 바닥을 드러내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그 결정이 곧 당신이다.
허영과 에고를 누군가가 뒷받침해주는 게 주변인들의 마땅한 직분이라 여기는 거다. 모친이 당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건 단순히 자식으로서의 부양 의무가 아니라 그렇게 무조건 자신에게 걸맞은 삶의 수준을 보장해내란 막무가내 어거지다. 당신의 월급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소비되고 있는 품위 유지비.
당신은 모친의 에고를 위해 존재하는 그녀 삶의 데커레이션이 아니라는 거. 모친의 행동으 당신의 삶 자체에 대한 결례다.
가족간의 문제의 대부분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아 발생한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거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그런 선이 없다는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어른이 뭔가, 제 몫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이다. 그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되는 것이고, 그런데 그 순간을 아예 겪지 않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부모는 그걸 사랑이라 착각한다. 그 과잉안락에 안주하는 삶을 자식은 효도라 부르고.
당신은 지금 당신이 대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모가 생략하고 건너뛸 수도 없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망설이느라 정작 자신의 삶이 지체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분리되지 않고서 어른 되는 경로란 없다.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지만 당신은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이다. 그러는 거 효도라 착각 마시라. 효도 아니다. 공포다. 부모 낙담시키고, 기대 저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하여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분리되는 데 대한 공포.
자기 인생, 남의 기대를 위해 쓰는 거 아니라고. 그것이 부모라도 마찬가지다.
책임 못 지면 권리도 없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어른을 어른 대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아적인 거다.
관계미숙아들은 워낙 자기중심적인지라 돌려 이야기하면 그 중에 자신에게 유리한 대목만 선별 청취해 그마저도 자신이 편하도록 일방 해석한다. 그래서 실컷 이야기했더니 엉뚱한 소리 할 공산 크다. 그러니 기왕 이야기한다면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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