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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블로그시작한지2년

김어준의 <건투를빈다 1. 나>

30살의 내가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한참 김어준에 빠져 있었고 올해는 새로 책을 사기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책들을 다시 읽어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차에 간단한 사연 중심이다보니 쉽게 재미삼아 읽으려고 폈다. 읽다보니 내가 왜 그리 좋아했는지 알겠다. 그때 내가 너무 좋아했고 닮으려 노력했던 것인지 지금의 나의 생각과 같은 글들이 참 많다. 내 기준에 뇌가 섹시한 사람 중 최고가 아닐까 싶다.

<책 속의 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런 자신을 움직이는 게 뭔지, 그 대가로 어디까지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 본원적 질문은 건너뛰고 그저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만 끊임없이 묻는다. 오히려 자신이 자신에게 이방인인 게다.

행복할 수 있는 힘은 애초부터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거, 그러니 행복하자면 먼저 자신에 대해 공부부터 필요하다는 거, 이거 꼭 언급해두고 싶다. 세상사 결국 다 행복하자는 수작 아니더냐.

스웨덴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인간에겐 소유욕과 존재욕이 있는데 소유욕은 경제적 욕망을, 존재욕은 인간과 인간이,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뜻한다고. 그런데 그 존재욕을 희생해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건 병적 사회라고. 공교육이 처음 가르치는 게 그런 거다. 사회 시스템 역시 그 가치관에 기초해 구축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 기본 태도에 관한 입장이어야 한다.

성공은 곧 돈이라는 거,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거, 그 경쟁에서의 낙오는 인생 실패를 의미한다는 거, 그렇게 경제논리로 일관된 협박과 회유로 훈육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초식동물처럼 산다. 초식동물의 군집은 가장 뒤처지는 놈이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나머지의 안전이 잠정 담보되는 시스템이다.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부터 아는 거다.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세상의 규범에 어디까지 장단 맞춰줄 의사가 있고 어디서부터 콧방귀도 안 뀔 건지. 그렇게 자신의 등고선과 임계점을 파악해야 한다.

전혀 멋지지 않은 나도 방어기제의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 그런 지점을 지나게 되면 이제 한 마리 동물로서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의 경향성, 그런 경향성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거기서부턴 더 이상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더 이상 자기합리화나 삶에 대한 하찮은 변명 따위에 에너지 소모하는 일, 없어진단 이야기다.

더 이상 눈치 보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꿈이니 야망이니 거창한 단어에 주눅 들거나 현혹되거나 지배당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 가보고 싶은 곳들, 만나보고 싶은 자들 따위의 리스트를 만들라. 그리고 그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라. 사람이 왜 사느냐. 그 리스트를 지워가며 삶의 코너 코너에서 닥쳐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만끽하려 산다.

부모 욕망에 응답코자 하는 건 모든 아이의 숙명이다. 그리고 거기에 부응하지 못한 자책감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자도 없고. 사실 인간은 평생을 그렇게 누군가의 욕망에 호응하느라 부산하다. 삶 자체가 인정 투쟁이라고. 하지만 모든 건 결국 밸런스의 문제다.

결코 친절해지진 말라는 거. 오히려 이제부터 차근차근,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는 거. 남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당신, 하찮은 사람 되는 거 아니다. 반대다. 그렇게 제 욕망의 주인이 되시라.

장애인을 구분 지어 특별히 배려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에 그야말로 누구나 포함된다고 여기는 사고,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입체적으로 사고한다는 건 그런거다.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는 능력, 그렇게 세상을 보편타당한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우린 지성이라고 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되,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큰둥하란 건데 시니컬하곤 다르다. 삶의 통증 대부분은 자기만 힘든 줄 알아서 자기가 만드는 거다. 억울해서. 더구나 자기가 너무 중요한 줄 안다. 그래서 북받친다. 하지만 이, 시큰둥, 되잖아. 그럼 자기 인생 가지고 소설 안 쓴다. 자기가 누군지도 있는 그대로 보인다. 담백해진다고.

'인생은 비정규직이다.' 삶에 보직이란 없는 거라고. 직업 따위에 지레 포섭되지 말라고. 하고 싶은 거 닥치는 대로 덤벼서 최대한 이것저것 다 해봐라. 개미 군체의 병정개미는 되지 말라고.

시큰둥하게 바라보며, 자기 하고 싶은 것 좇으며 살면 되는 거냐. 그것만으로는 2프로 부족하다. 거기에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복식이든 행동이든 삶의 패턴이든. 그 모든 게 멋대가리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랴.

점수와 훌륭한 사람과의 상관관계, 없다. 단, 점수 높으면 연봉 높을 확률, 상대적으로 높다. 돈 버는 능력과 공부 능력, 별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지, 어른들 모른다. 물론 공부 잘하면 좋다. 유용하다.

섹스가 죄가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질 수 없는 일 저지르는 거, 그게 죄다.

영어는 도구다. 취미 맞으면 하고 안 맞으면 그냥 다른 과목처럼만 해. 그래도 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의 고유한 기쁨은, 이 순간이 지나면, 같은 형태와 정도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거 아닌가. 누릴 수 있을 때, 그 맥시멈을, 누려야 하는 거 아닐까. 불안한 미래는 아직 닥치지 않았으니 내가 맞서면 되는 거 아닌가. 미래란, 애초에, 불안한 거다. 누구도 모르니까.

정체성 소구에 과소비란 없다. 적합하냐 부적합하냐가 있을 뿐.

일등이 될 수 없는 나머지 절대 다수가 그나마 명품의 권위를 빌려서라도 기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그 애절한 실존적 자구 행위를, 그 처절한 방어기제를 어느 누가 함부로 천박하고 하찮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하는 건 자신의 선택이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했던 무수한 선택들이 하나하나 모여 결국 자신이 누군지 결정하는 거다.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객관화의 임계점이란 게 있다. 그랬으면 하는 자기가 아니라 생겨먹은 대로의 자신을, 덤덤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순간 있다. 자신이 멋지지 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서 멋질 수는 결코 없는 법이란 걸 깨닫는. 이거 절로 안 온다. 도달해야 한다. 그러자면 대단한 분량의 용기가 지성과 함께 요구된다.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자기 선택과 그 결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비용 감당하겠다면 그 지점부터 세상 누구 말도 들을 필요 없다. 타인 규범이 당신 삶에 우선할 수 없다. 당신, 생겨먹은 대로 사시라.

자기객관화란 입체의 연속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스스로 인지하는 거다. 그리고 그렇기에 거기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여행이다. 세계 속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오감으로 감각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일정 거리 이상이 확보되어야 제 모습 전체가 조감되는 법이니까.

당신은 어쩌면 키만 크면 지금까지 안 되던 것들이 만사형통일 거라 생각하는 거 아닌가. 진정으로 당신을 왜소하게 만드는 건 키 자체가 결코 아니다. 그 키로 인해 위축되는 당신이지. 바로 위축된 당신을 보고 만만하게 여기는 거다.

문제의 본질은 뼈의 길이가 아니라, 그로 인한 자존감의 결여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스스로를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릴 만큼 견고하고 대범한 자기인식은 그 자체로 섹시하다.

다른 사람들, 당신이 생각하듯 당신 삶에 그렇게 관심 없다. 당신 주변 상황을 당신이 스스로 세운 가치를 기준으로 장악해가시라. 당신이 그렇게 당신 삶을 당신의 기준으로 장악해나갈 때 뿜어져 나올 아우라는 겨우 뼈 길이가 줄 수 있는 인상 따위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거다.

내 삶의 불확실성을 하나님게 고스란히 맡기겠다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요체다. 예배 역시 인간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먼저 부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인간이 불려 나간 자리가 된다. 삶 자체가 신에 대한 예물인 것이다.

불확실성은 삶의 기본 속성이다. 그것을 삶의 당연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무서운 걸 무서워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삶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두려움을 갖는 건 불완전한 인간으로선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나는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삶의 공포와 마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해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 여긴다. 난 그렇게 믿는다.

스스로 삶의 문제들에 맞서 나가겠다는 결의, 자신에게 닥치는 세상만사를 주변의 기준이나 눈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관대로 대처하고자 하는 의지, 그런 게 바로 삶에 대한 장악력이다. 그게 있는 자 섹시하다.

꿈이란 단어 자체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의 어려운 현실은 꿈을 이루는 과정의 당연한 난관이니 적당히 무시하는 게 마땅한 태도라며, 스스로를 '나이브'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능과 태만과 불안을 '꿈'이란 단어로 포장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말이다. 목표는 현실적일 때만 성취된다.

당신이 지불할 수 있는 비용은 어디까진가.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그럼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거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삶에 대한 응석에 불과하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가 아니라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꿈은 목표이지 핑계일 수 없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냥 그 일을 하는 거다. 실패를 준비하며 핑계를 마련해두는 데 에너지를 쓸 게 아니라, 토 달지 말고, 그냥, 그 일을 하는 거, 그게 그 일을 가장 제대로 하는 법이다.

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되길 바라는 건 멍청한 게 아니라 불쌍한 거다. 자기 인생에 스스로 사기 치는 거라고. 그리하여 난 꿈을 말하는 대신 이렇게 외쳐야 한다고 믿는다. "하면, 된다! 아님 말고."

복식이든 행동이든 자신만의 미적 감수성에 의해 제대로 버려진 고유한 제 스타일이 없다면, 그건 또 얼마나 멋대가리 없는 삶인가. 비싼 옷을 입거나 고급 레스토랑에 간다고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오히려 그렇게 브랜드나 돈에만 의지하는 순간 한없이 촌스럽고 천박해지기만 한다는 걸 깨닫고 나면 더더욱 아쉽지 않을 수 없다.]

더치페이가 결코 나쁜 건 아니지만 동시에 이걸 기억해둘 필요 있겠다. 딱 반이 항상 가장 공평한 건 아니라는 거. 사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다.

경제력 없는 노년에 대한 공포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님에도 나로선 그런 선전, 보다 정확하게는 그런 선전에 전제된 사고방식에 동의가 잘 안 된다. 노후를 대비해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참고 절약해 노후를 대비하자는 말은, 나한테 늙음을 위해 젊음을 유보하자는 말로 들린다.

나이를 먹으면 나이를 먹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이 또 따로 존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사고방식은 노년이란 젊었을 때 모아둔 연금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퇴물이 되는 게 당연한 순리라고, 아예 사회적으로 못 박아버리는 것 같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