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즈음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를 읽었었다.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다시 읽으면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두 귀가 닫혀 있었고 내가 읽고 싶은 것만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작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때이다.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책을 썼고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지가 아니라 전문가에게 그저 조언을 듣고 있는듯한 기분으로 책을 읽다보니 '좋은 말이군'하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30살 넘어서부터 내가 책읽는 방식은 작가 위주이다. 한 작가를 위주로 작품들을 쭈욱 읽다보면 그분의 삶이 느껴졌다. 김혜남 작가에 대해서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아마도 꽤 유명했을건데 그만큼 타인에게 무관심했었구나를 또 생각했다. 장영희 교수님 책을 읽으면서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멘탈이 정말 강한 분이다. 나였다면 저 삶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나는 다큐를 싫어한다. 너무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 나름 행복하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에 행복해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 위대한 일인 듯 하다.
더 이상 아는 척 혼자 끙끙대지 말고 초보 티를 내자. 실수 하나 했다고 금방 좌절하고 주눅 들어있지 말고 딱 한마디만 하라. "모릅니다.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지나보니 알겠다. 실수가 맘껏 허용되는 것은 초보 때뿐이다. 그때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사람일수록 아주 크게 발전한다. 그것이 초보 딱지의 매력이다.
실패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들은 '사는재미'를 모른다. 매일같이 높은 목표를 세워 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오늘을 다 바치기 때문이다. 목표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도중에 삶을 즐긴다는 건 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우의 수를 따져 볼수록 준비 목록은 더 늘어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느라 결국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계속 준비만 하다가 인생을 다 보내는 것이다.
더 이상 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말고, 60퍼센트만 채워졌다고 생각되면 길을 나서 보라.
가구 몇 점 없다고, 그릇 몇 개 없다고 죽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진다. 그리고 밥주걱을 사고 과일칼을 샀을 때 마음이 뿌듯했으며, 빈자리를 하나둘씩 필요한 가구로 채워 나갈 때마다 내 힘으로 뭔가 한 것 같아서 기뻤다. 살림살이를 채워 나가는 재미가 이런 거구나 느낀 것도 그때였다.
모든 걸 준비할 수도 없었을 테고, 아무리 준비해도 살 게 분명 또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조금씩 살림살이를 채워 가라고.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평생 생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헤맸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는 집단적인 무력감이다.
심리학에서 무기력이란 에너지가 바닥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스스로의 힘으로 처지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력감은 생각보다 더 사람을 힘들게 한다. 성폭행을 당하거나 천재지변을 당한 이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런 수치스럽고 무서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즉 무력감이었다고 한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외부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란다. 상황이 확 변해서 무언가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상황을 바꿔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헛수고하는 건 아닐까? 맞다. 변하는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적어도 지금 무기력하게 서 있는 그곳은 탈출할 수 있고, 가능성이 보이는 또 다른 곳에 닿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세상으로부터 가진 것은 모두 빼앗기고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해도 우리에게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우리 자신의 선택권이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천장만 보고 살 건지, 일단 밖에 나가 할 일을 찾아볼 건지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인생은 흘러가지만 어떤 마음가짐이냐에 따라 10년 뒤 인생은 달라진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하는 그가 말은 그렇게 해도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가 제 발로 상담을 받으러 왔다는 것 자체가 아직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누군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하는데 명령을 받으면 그 주도권을 남에게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자율성은 인간의 중요한 본능적 욕구 중 하나다. 타인의 간섭과 침입을 막고 내 영역을 지켜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이처럼 뭐든지 제멋대로 하려는 아이를 사회라는 테두리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과한 통제를 받으면 자율성에 심각한 손상이 생긴다. 말을 잘 들어야만 칭찬과 사랑을 주는 타인에 대해 극심한 분노와 애정을 동시에 느끼며 그 사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괜히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했다가 실패자로 낙인찍히면 어쩌나 두려워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회적으로 보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안에서는 자꾸만 화가 치솟는다. 회사, 학교, 부모님, 남들의 눈 때문에 늘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나 자신이 싫은데,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조금이라도 통제하려고 들면 '통제' 그 자체에 예민해진다. 존중받기는커녕 남들에게 또다시 휘둘리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특히나 어릴 적 부모의 강한 통제 속에 자라난 아이는 어른이 되어 통제받는 것을 유달리 못 견딘다.
상황은 변한 게 없었다. 다만 바뀐 것은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들의 역사 대신 자신의 역사를 써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써 나간다는 것, 그것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누가 나를 함부로 대하고, 나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해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나는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통제 소재를 내 안으로 가져올 것.'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내가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내가 저 일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거다', '내가 빨리 해 주고 넘어가 버리는 거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내가 그 일의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까짓것 웃어 주면 어때요.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이 인생을 놓고 봤을 때 결코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그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것을 해결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부모도 가족도 배우자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 탓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여라.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꼴 보기 싫은 사람과 오래도록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수많은 일들을 주체적으로 해결하고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인생이 아닐까.
부부 관계의 가장 큰 비극은 서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남편이 설마 내가 힘들어하는 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생활에 쫓기면서 너무 지쳐 집에 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쉬고 싶어 했고 상대방이 그 마음을 백분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사람은 안 변한다지만 나이를 먹고 세월이 쌓이면서 변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그러니 5년 전 남편과 지금의 남편이 같을 수가 없고, 10년 전 아내와 지금의 아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나와 남편처럼 그동안 서로에게 쌓인 상처 때문에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까지도 어느 순간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저 사람은 분명 내가 얘기 안 해도 알 거야.'라는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아무리 사랑해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나에 대해 자꾸 알려 주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을 차곡차곡 가슴에 쌓아 두는 대신 그 말을 밖으로 꺼내야 한다. 절대 상대방을 다 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 자신도 다 모른다. 그런데 상대방을 어찌 다 알겠는가.
몸과 마음이 지치고 쇠한 상태에서 새롭게 무얼 시작한다는 것이 겁나고, 성공은커녕 현상 유지할 자신도 없다. 게다가 주변 얘기를 들으면 성공보다 실패했다는 소리가 더 많이 들려온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야 하고, 살아 내야 하기 때문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만 한다.
인생에서의 성공이란 경쟁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자신에게 얼마나 충실했으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필요한 존재였느냐 하는데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당신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다.
믿지 못하면 외로워진다. 그런데 사람을 믿으면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된다. 남에게 속을지언정 불안에 떨며 지내지는 않아도 된다.
의심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상처가 두려워 사람을 믿지 않으면 행복도 없어져 버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 믿느냐 하는 범위의 문제이며 믿을 수 없는 사람을 가려낼 수 있는 시력을 키우는 것이다. 100퍼센트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치닫기 쉬운 내적 욕망이나 갈등으로부터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장치를 해 둘 필요가 있다. 바로 관계에서의 한계 설정이 그것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못하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가 못하는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한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관계를 잘 끌고 갈 수 있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병수발을 해 주는 자식에게 고마워해야 하고 폐를 덜 끼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식이니까 부모에게 헌신하는 게 당연하다며 아프다는 핑계로 자식에게 막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한계 설정은 끝까지 사람을 믿고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해야 할 최소한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고 나보고 고맙단다. 나는 그냥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힘들었겠다, 속상했겠다는 말만 했을 뿐이고 아무런 해답을 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들에겐 자기 말을 들어 주고 맞장구쳐 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이 차가운 지구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된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어 주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손잡아 주면 비록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더라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미야 할아버지 말대로 사람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좀도둑일지라도 그저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해 줄 사람이다. 하지만 듣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간에 참견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 것도 힘들고, 듣는다는 자체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굉장한 행운아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기왕이면 당신이 그런 존재가 되어 보면 어떨까?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를 일이다.
마음만 먹으면 끝없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다. 그러니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을 즐겨라. '~해야 한다'는 말을 줄이고, '~하고 싶다'는 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그 시작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죄책감과 책임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꿈을 꾸게 되면 뇌의 기능은 꿈을 이루기 위한 회로로 집중된다. 따라서 이 부분의 뇌가 활성화되고 발달하게 된다. 그러면 실패를 하더라도 배우고 일어설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뇌의 회로가 온통 꿈을 달성하기 위한 문제 해결에 집중되어 있어 실패를 해도 뇌가 좌절과 수치심을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저 순간순간 보이는 이미지와 그때 느끼는 감성을 더 중요시하고, 감각적이며 피상적인 관계만을 선호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젊은이들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실은 공허하고 외롭다. 상처받기 싫어서 어느 누구도 깊이 만나고 싶지 않은데 그럴수록 더 상처에 예민해지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되는것이다.
상처 없는 삶이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상처에 직면해 그것을 이겨 내려고 애쓰면서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 굳은살이 박이면 소소한 아픔들은 그냥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굳은살이 있어야 더 큰 상처가 왔을 때도 그걸 이겨 나갈 힘이 생긴다. 하지만 상처를 계속 피하게 되면 굳은살이 생기기는커녕 아주 조금만 찔려도 죽을것처럼 아파하게 된다. 상처 자체에 취약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상생활 자체가 버거워진다.
살다 보면 갑자기 징검다리를 만나기도 하고 가시덤불과 마주치기도 한다. 하지만 상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그것조차 상처라고 여겨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든다. 징검다리는 건너면 될 일이고, 가시덤불은 조심조심 헤치며 나아가면 될 일인데 말이다.
지적을 받았으면 고치면 되고 입장 차이로 인한 사소한 마찰과 갈등은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사소한 일까지 모두 상처라고 말하면 우리 삶은 문제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누가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을 가해자로, 나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고, 정신적 치료가 필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내가 조그만 노력하면 고치고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내 힘으론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왜 사소한 마찰과 갈등을 굳이 상처라고 명명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충분히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에 말이다.
그리고 상처는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무언가 원하는데 그게 내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상처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스쳐지나가고 그냥 넘어갈 일까지 굳이 상처라고 말하며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상처와 상처가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 그것은 어쩌면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안 고쳐질 텐데 그냥 외워 버리세요." 외우다 보면 시어머니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텐데, 저런 상황에서는 이런 행동을 보이실 텐데 하는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더 나아가 어떤 말을 하실지 예측이 가능해진다. 그 경지에 달하면 신기하게도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솔직한 게 최고라며 싫다고 말해 봤자 관계만 어그러질 뿐이다. 만약 부모가 아이들이 귀찮을 때마다 그걸 다 표현한다고 생각해 보라.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겠는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는 있지만 그 감정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 표현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 유용한 것이 바로 '~하는 척'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휘둘리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맞춰 주는 것이다. 상황을 원만하게 빨리 풀어가기 위한, 그래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니 '~하는 척'이 옳지 않다는 편견을 버려라. 때로는 솔직한 게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면 돌려주면 그만이다. 누군가 나를 비난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게 부당하다면 그 비난을 받지 않으면 된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맨 처음 받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므로 '느낌'을 상처로 남길지 그냥 상대방에게 돌려주고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다.
그가 당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더 이상 고민하지 마라. 자책하지도 마라. 그가 당신을 함부로 한다고 해서 당신이 못난 존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몸도 뇌도 때론 쉬어야 한다. 잠시 머추어 선 시간에 우리는 그동안 경험한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더 자신 있게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힘차게 나갈 수 있다. 그러니 몸은 피곤한데도 계속 쉬지 못하고 있다면 의도적으로 '잠시 멈춤'을 스스로에게 허락해 보라. 잠시 멈추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함은 줄어들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요즘 몸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며 몸을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예전에는 몸이 피로해도 정신만 괜찮으면 잠을 조금만 자면서 버텼다. 하지만 요즘엔 몸이 피로하고 힘들면 일단 쉰다.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바람도 느끼고 가볍게 산책을 가기도 한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그러면 해야 할 일들 가운데 못 하게 되는 일들이 생기는데 그래도 괜찮다. 꼭 내가 안 해도 되는 것들이다. 그걸 안 하면 내가 마치 무용지물이 되는것 같은 느낌이 이제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오히려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스스로를 한심하고, 모자라고, 허둥대는 결점투성이로 바라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착하고, 남을 배려하고,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바라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똑같은 나인데도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틀리면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고, 부당한 지적에는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늘 피해만 본다는 사고에 물들지 않고 타인과 대등한 관계에 설 수 있는 태도 또한 나를 믿고 존중하는 자존감에서 출발한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누가 나를 믿어 줄 것이며, 내가 나를 보호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보호해주겠는가? 게다가 사랑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해 봐야 그 기대를 다 충족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결국에는 나 자신을 잃고 공허한 사람을 살게 된다.
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바통을 가지고 잘 살고 있는 걸까? 어쨌든 이별 뒤에 남겨진 자가 할 수 있는 건 잘 살아가는 일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이별을 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떠날 사람은 떠날 테고, 남을 사람은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쉽지만 따뜻한 이별을 준비하는 것일 게다. 오늘 하루 잘 살고, 오늘 하루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말이다.
어른이 되어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누구나 부족한 사람이고, 그래서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내 안의 상처 입은 아이를 안아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 아이는 멈추었던 성장을 계속하게 되는 거지.
부족한 엄마를 두었건만 다행히 너는 참 괜찮은 청년으로 자라주었다. 타인을 믿고, 세상을 믿는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말이야. 언젠가 엄마의 죄책감을 눈치챈 네가 말했지. "괜찮아, 엄마. 엄마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느라 그랬던 거잖아."
아들아, 앞으로 너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며 상처 주고 또 상처 받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렴.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것이 바로 성장이고, 이미 그 힘은 네 안에 있다는 걸.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부모에 대해 깊은 애증을 느낀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 사랑을 주지 않은 데에 대한 원한을 품는 거란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를 미워하면서도 떠나지 못한 채 인공위성처럼 부모 주의를 맴돈다. 엄마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졌고, 아빠 때문에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고, 부모 때문에 실패자가 되었다고 한탄하면서....부모가 자기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 믿는다.
부모란 아주 커다란 존재도, 완벽한 존재도 아니야. 그들도 실수를 하고, 비겁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래서 자녀가 자신의 결핍을 채워 주기를 바라거나, 자기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자녀에게 요구하기도 한단다. 뿐만 아니라 부모 역시 젊은 시절엔 너희들처럼 뭔가 서툴고 부족했다. 다만 오랜 시간 노력해서 지금의 성과를 이뤄 낸 것뿐이다.
그러니까 완벽한 부모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그리고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져라. 부족하고 못난 부모를 탓할 필요도, 부모의 업적에 스스로를 옭아맬 필요도 없다. 부모는 자식이 걸어가야 할 길의 이정표는 될 수 있어도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또 과거로 돌아가 부모와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과거에 어떤 상처를 입었든지,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이라고 인정하고 더 이상 과거에 휘둘리지 않기로 결심하는 일이다. 그리고 부모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자식들이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부모의 목적이자 행복이다. 그러니 자식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묵묵히 걸어가면 그뿐이다.
운명의 짝은 불현듯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만들어지는 거란다. 콩깍지가 걷혀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의 장점과 단점, 약점과 강점 모두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그래서 사랑을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온 사람을 껴안는거니까. 그러니 사랑이 다가올 땐 거부하지 말고 온몸으로 껴안아라. 사랑을 할 땐 그 사랑에 미쳐 보아라.
결코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더불어 앞날이 불안하고 자꾸만 위축될수록 작은 도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알을 깨고 나가는 건 무척 신나는 일이다. 몸집이 커져 어느새 답답해져 버린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데 신나지 않을 수 있겠니? 그리고 그렇게 만난 세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 준다. 어찌 보면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철학자 파스칼의 잠언대로 우리가 인생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평생 우리가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가정하고,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뿐이다.
친해지는 것과 원만하게 지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친밀함은 관계에 따라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 나간다. 소수의 친밀한 관계부터 서로 알고만 지내는 사이까지, 동심원의 크기를 잘 알고 알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직장 선후배 사이의 동심원은 서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갈등도 원만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꼭 서로를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부족한 점을 격려하고 함께 노력할 수 있으면 그뿐, 꼭 친해져야 할 필요도 없다.
회사 내 원만한 인간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호감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주고받는 문제다. 사실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주고받음이란다. 내가 하는 만큼 상대가 돌려줄 때에야 기본적으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지. 그러므로 싫은 사람과 일하게 되더라도 그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상대와 공정히 주고받아야 할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여라. 내가 맡은 업무를 성실히 하고 일적으로 서로 도울 건 도우면서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무심해지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지금까지 살아 보니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열 명 중 두 명 정도이더라. 그리고 나와 맞지 않는 두 명은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결코 가까워지는 법이 없더구나.
껄끄러운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에 너무 에너지를 쏟아붓지 마라. 차라리 그 에너지를 여덟 명과의 즐거운 시간에 투자해라. 결국 인생은 즐거운 시간의 합만큼만 의미 있는 것이니까.
물론 1등을 해 본 적도 없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의 나에 만족한다. 내 인생을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꿔 나가고 있으며, 오늘을 좀 더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 삶을 완성한다는 것이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예술 작품은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낼 뿐 서로 비교할 수 없듯이, 자기실현을 위해 애쓴 인생은 그 자체로 의미 있을 뿐 다른 인생과 비교할 수 없다.
타인의 인정은 1등을 한 누구에게나 쏟아지는 인정이므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해도 상관없다. 그러니 다음에 1등을 못 해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진다고 해서 왜 나한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냐고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인정을 받고 싶으면 어떻게든 1등을 하면 될 일인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너희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모진 세상이 너희들을 쥐고 흔들지 못하도록, 그래서 외롭든 말든 1등이 되는게 좋지 않느냐고 부추기는 세상에 끌려가지 않도록, 너희의 내면을 더욱 단련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명심하렴. 너희의 인생을 멋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건 그 누구도 아닌 100퍼센트 너희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결혼32년차 선배로서 너희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첫째, 쓸데없는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는 거야. 여자의 경우, 부부 관계를 해칠까 봐 혹은 힘든 사람 신경 쓰게 해서 뭐하나 싶어 참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참고 살아서 이득이 되는 경우도 있지. 그러나 지나칠 경우 오히려 배우자에 대한 감정적인 거리감을 만들어 내게 돼. 또 남자의 경우, 가족을 이끌고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말도 않고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끙끙 앓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이는 가족을 정말로 짐짝으로 만드는 행동이야. 그러니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요구할 건 당당히 요구하고, 문제가 있으면 함께 노력해서 풀어 가렴. 둘째는 '나'만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호 관계이기 때문에 한쪽만 100퍼센트 희생하는 경우는 없어. 상대도 나르매로 양보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반드시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면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는 부드러움도 필요하다. 셋째는 나중에 후회할 행동이나 말은 하지 말라는거야.
마지막으로, 결혼 생활은 힘든 게 당연하다. 연애는 먼 곳에서 산을 구경하는 거라면, 결혼은 그 산을 직접 오르는 거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던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속속들이 경험하는 게 결혼 생활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현실의 문제까지 겹쳐지면 더욱 골치 아플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참고 싸우며 현명하게 그 산을 올랐을 때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은 남다르다. 앞으로 더 나이가 들어 거동도 불편해지고 인간관계도 좁아지고 영향력도 줄어들 때가 오겠지. 그때 나를 아주 잘 아는 좋은 친구가 늘 곁에 있다면 참 행복할 게다. 그게 네 아버지였으면 더 좋겠고.
역지사지란 말이 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내가 좋더라도 상대가 싫어할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감 능력이 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 낼 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감 능력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미묘한 기술인지 쉽게 잊어버린다. 내가 원하는 걸 그 사람도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그 사람도 좋아할 거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해진다. 내가 어릴 때만해도 역지사지의 태도는 흔한 것이었다. 지금은 지하철을 타면 모두들 스마트폰에 고개를 묻은 채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길거리에 누군가 쓰러져 있어도 내 일이 아니면 선뜻 나서지 않게 된다.
점점 더 사람을 감정이 있는 인간이 아닌 도구로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되지, 왜 굳이 공감하고 배려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공감받길 바란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오랜 기간 타인의 돌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즉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극히 관계 의존적인 동물이며,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찾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타인은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 또한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아집에 빠지지 않고 성찰하고 비판하며 좀 더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진다. 더 나아가 공감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고 듣고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으며, 함께 일하고 나누고 창조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 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의 부서지기 쉬운 유한한 본성과 그 사람의 약점과 한 번뿐인 유일한 목숨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실존적 외로움과 개인적인 곤경과 살아남고 성공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처럼 경험한다.....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인생을 예찬하는 것이다. 공감의 순간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경험 가운데 가장 밀도 높은 생생한 경험이다....공감할 줄 몰라 경험을 제한받는 사람의 인생은 그만큼 충만하지 못하다. 인생을 구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단단히 묶여 산다는 것이다. 뚝 떨어진 혼자만의 삶은 그만큼 부족한 삶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감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빨리 가려면 직선으로 가라/ 깊이 가려면 굽이돌아 가라/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라/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아프리카에서 전해 내려오는 격언)
우리의 일상은 쳇바퀴처럼 굴러간다. 특별한 일도, 재밌는 사건도 별로 없다. 그래서 가끔은 정말 지칠 때가 있다. 특히나 고통이 가시기는커녕 심해지는 날엔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우울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고통스럽다 생각하며 누워만 있는 것보다는 소소한 삶의 재미를 만들어 가는 것이 훨씬 좋았다. 일어나서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하고, 또 그걸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지 떠올리는 것만 해도 좋았으니까. 컨디션이 좋은 날엔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요리하고, 컨디션이 안 좋아 누워 있는 날에도 키우는 꽃과 나무에 새로 핀 잎사귀는 없는지 살펴본다.
세상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만큼 보여 준다는 걸,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고자 마음먹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재미투성이라는 걸.
오금이 저릴 만큼 재미있는 일이 우리 인생에서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이 이어질 뿐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자신감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해 봤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거라는 걱정, 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시도해 보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일에서도 쉽사리 호기심을 갖지 못한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퍼센트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이며, 22퍼센트는 아주 사소한 걱정들이고, 4펀센트는 우리가 전혀 손쓸 수 없는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4퍼센트만이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96퍼센트의 걱정과 불평불만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오늘을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만다.
인도의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는 <장자, 도를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은 경험이지 이론이 아니다. 삶에는 해석이 필요없다. 삶은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매 순간 삶이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대는 머리로 궁리하고 있다. 그대는 삶에게 말한다. '기다려라. 내가 문을 열어 주겠다. 그러나 먼저 결정 내릴 시간을 달라.' 삶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평생토록 삶이 그냥 왔다가 간다. 그대는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 채 다만 고달프게 질질 끌려갈 뿐이다."
이제 그만 생각만으로 지쳐 버리는 삶에서 벗어나라. 오쇼의 말처럼 삶은 그냥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30살 넘어서부터 내가 책읽는 방식은 작가 위주이다. 한 작가를 위주로 작품들을 쭈욱 읽다보면 그분의 삶이 느껴졌다. 김혜남 작가에 대해서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아마도 꽤 유명했을건데 그만큼 타인에게 무관심했었구나를 또 생각했다. 장영희 교수님 책을 읽으면서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멘탈이 정말 강한 분이다. 나였다면 저 삶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나는 다큐를 싫어한다. 너무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 나름 행복하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에 행복해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 위대한 일인 듯 하다.
<김혜남의 글>
더 이상 아는 척 혼자 끙끙대지 말고 초보 티를 내자. 실수 하나 했다고 금방 좌절하고 주눅 들어있지 말고 딱 한마디만 하라. "모릅니다.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지나보니 알겠다. 실수가 맘껏 허용되는 것은 초보 때뿐이다. 그때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사람일수록 아주 크게 발전한다. 그것이 초보 딱지의 매력이다.
실패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들은 '사는재미'를 모른다. 매일같이 높은 목표를 세워 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오늘을 다 바치기 때문이다. 목표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도중에 삶을 즐긴다는 건 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우의 수를 따져 볼수록 준비 목록은 더 늘어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느라 결국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계속 준비만 하다가 인생을 다 보내는 것이다.
더 이상 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말고, 60퍼센트만 채워졌다고 생각되면 길을 나서 보라.
가구 몇 점 없다고, 그릇 몇 개 없다고 죽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진다. 그리고 밥주걱을 사고 과일칼을 샀을 때 마음이 뿌듯했으며, 빈자리를 하나둘씩 필요한 가구로 채워 나갈 때마다 내 힘으로 뭔가 한 것 같아서 기뻤다. 살림살이를 채워 나가는 재미가 이런 거구나 느낀 것도 그때였다.
모든 걸 준비할 수도 없었을 테고, 아무리 준비해도 살 게 분명 또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조금씩 살림살이를 채워 가라고.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평생 생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헤맸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는 집단적인 무력감이다.
심리학에서 무기력이란 에너지가 바닥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스스로의 힘으로 처지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력감은 생각보다 더 사람을 힘들게 한다. 성폭행을 당하거나 천재지변을 당한 이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런 수치스럽고 무서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즉 무력감이었다고 한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외부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란다. 상황이 확 변해서 무언가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상황을 바꿔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헛수고하는 건 아닐까? 맞다. 변하는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적어도 지금 무기력하게 서 있는 그곳은 탈출할 수 있고, 가능성이 보이는 또 다른 곳에 닿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세상으로부터 가진 것은 모두 빼앗기고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해도 우리에게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우리 자신의 선택권이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천장만 보고 살 건지, 일단 밖에 나가 할 일을 찾아볼 건지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인생은 흘러가지만 어떤 마음가짐이냐에 따라 10년 뒤 인생은 달라진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하는 그가 말은 그렇게 해도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가 제 발로 상담을 받으러 왔다는 것 자체가 아직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누군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하는데 명령을 받으면 그 주도권을 남에게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자율성은 인간의 중요한 본능적 욕구 중 하나다. 타인의 간섭과 침입을 막고 내 영역을 지켜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이처럼 뭐든지 제멋대로 하려는 아이를 사회라는 테두리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과한 통제를 받으면 자율성에 심각한 손상이 생긴다. 말을 잘 들어야만 칭찬과 사랑을 주는 타인에 대해 극심한 분노와 애정을 동시에 느끼며 그 사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괜히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했다가 실패자로 낙인찍히면 어쩌나 두려워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회적으로 보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안에서는 자꾸만 화가 치솟는다. 회사, 학교, 부모님, 남들의 눈 때문에 늘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나 자신이 싫은데,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조금이라도 통제하려고 들면 '통제' 그 자체에 예민해진다. 존중받기는커녕 남들에게 또다시 휘둘리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특히나 어릴 적 부모의 강한 통제 속에 자라난 아이는 어른이 되어 통제받는 것을 유달리 못 견딘다.
상황은 변한 게 없었다. 다만 바뀐 것은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들의 역사 대신 자신의 역사를 써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써 나간다는 것, 그것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누가 나를 함부로 대하고, 나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해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나는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통제 소재를 내 안으로 가져올 것.'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내가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내가 저 일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거다', '내가 빨리 해 주고 넘어가 버리는 거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내가 그 일의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까짓것 웃어 주면 어때요.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이 인생을 놓고 봤을 때 결코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그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것을 해결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부모도 가족도 배우자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 탓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여라.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꼴 보기 싫은 사람과 오래도록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수많은 일들을 주체적으로 해결하고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인생이 아닐까.
부부 관계의 가장 큰 비극은 서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남편이 설마 내가 힘들어하는 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생활에 쫓기면서 너무 지쳐 집에 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쉬고 싶어 했고 상대방이 그 마음을 백분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사람은 안 변한다지만 나이를 먹고 세월이 쌓이면서 변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그러니 5년 전 남편과 지금의 남편이 같을 수가 없고, 10년 전 아내와 지금의 아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나와 남편처럼 그동안 서로에게 쌓인 상처 때문에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까지도 어느 순간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저 사람은 분명 내가 얘기 안 해도 알 거야.'라는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아무리 사랑해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나에 대해 자꾸 알려 주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을 차곡차곡 가슴에 쌓아 두는 대신 그 말을 밖으로 꺼내야 한다. 절대 상대방을 다 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 자신도 다 모른다. 그런데 상대방을 어찌 다 알겠는가.
몸과 마음이 지치고 쇠한 상태에서 새롭게 무얼 시작한다는 것이 겁나고, 성공은커녕 현상 유지할 자신도 없다. 게다가 주변 얘기를 들으면 성공보다 실패했다는 소리가 더 많이 들려온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야 하고, 살아 내야 하기 때문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만 한다.
인생에서의 성공이란 경쟁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자신에게 얼마나 충실했으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필요한 존재였느냐 하는데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당신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다.
믿지 못하면 외로워진다. 그런데 사람을 믿으면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된다. 남에게 속을지언정 불안에 떨며 지내지는 않아도 된다.
의심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상처가 두려워 사람을 믿지 않으면 행복도 없어져 버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 믿느냐 하는 범위의 문제이며 믿을 수 없는 사람을 가려낼 수 있는 시력을 키우는 것이다. 100퍼센트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치닫기 쉬운 내적 욕망이나 갈등으로부터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장치를 해 둘 필요가 있다. 바로 관계에서의 한계 설정이 그것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못하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가 못하는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한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관계를 잘 끌고 갈 수 있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병수발을 해 주는 자식에게 고마워해야 하고 폐를 덜 끼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식이니까 부모에게 헌신하는 게 당연하다며 아프다는 핑계로 자식에게 막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한계 설정은 끝까지 사람을 믿고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해야 할 최소한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고 나보고 고맙단다. 나는 그냥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힘들었겠다, 속상했겠다는 말만 했을 뿐이고 아무런 해답을 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들에겐 자기 말을 들어 주고 맞장구쳐 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이 차가운 지구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된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어 주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손잡아 주면 비록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더라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미야 할아버지 말대로 사람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좀도둑일지라도 그저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해 줄 사람이다. 하지만 듣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간에 참견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 것도 힘들고, 듣는다는 자체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굉장한 행운아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기왕이면 당신이 그런 존재가 되어 보면 어떨까?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를 일이다.
마음만 먹으면 끝없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다. 그러니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을 즐겨라. '~해야 한다'는 말을 줄이고, '~하고 싶다'는 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그 시작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죄책감과 책임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꿈을 꾸게 되면 뇌의 기능은 꿈을 이루기 위한 회로로 집중된다. 따라서 이 부분의 뇌가 활성화되고 발달하게 된다. 그러면 실패를 하더라도 배우고 일어설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뇌의 회로가 온통 꿈을 달성하기 위한 문제 해결에 집중되어 있어 실패를 해도 뇌가 좌절과 수치심을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저 순간순간 보이는 이미지와 그때 느끼는 감성을 더 중요시하고, 감각적이며 피상적인 관계만을 선호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젊은이들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실은 공허하고 외롭다. 상처받기 싫어서 어느 누구도 깊이 만나고 싶지 않은데 그럴수록 더 상처에 예민해지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되는것이다.
상처 없는 삶이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상처에 직면해 그것을 이겨 내려고 애쓰면서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 굳은살이 박이면 소소한 아픔들은 그냥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굳은살이 있어야 더 큰 상처가 왔을 때도 그걸 이겨 나갈 힘이 생긴다. 하지만 상처를 계속 피하게 되면 굳은살이 생기기는커녕 아주 조금만 찔려도 죽을것처럼 아파하게 된다. 상처 자체에 취약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상생활 자체가 버거워진다.
살다 보면 갑자기 징검다리를 만나기도 하고 가시덤불과 마주치기도 한다. 하지만 상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그것조차 상처라고 여겨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든다. 징검다리는 건너면 될 일이고, 가시덤불은 조심조심 헤치며 나아가면 될 일인데 말이다.
지적을 받았으면 고치면 되고 입장 차이로 인한 사소한 마찰과 갈등은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사소한 일까지 모두 상처라고 말하면 우리 삶은 문제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누가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을 가해자로, 나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고, 정신적 치료가 필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내가 조그만 노력하면 고치고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내 힘으론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왜 사소한 마찰과 갈등을 굳이 상처라고 명명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충분히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에 말이다.
그리고 상처는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무언가 원하는데 그게 내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상처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스쳐지나가고 그냥 넘어갈 일까지 굳이 상처라고 말하며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상처와 상처가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 그것은 어쩌면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안 고쳐질 텐데 그냥 외워 버리세요." 외우다 보면 시어머니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텐데, 저런 상황에서는 이런 행동을 보이실 텐데 하는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더 나아가 어떤 말을 하실지 예측이 가능해진다. 그 경지에 달하면 신기하게도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솔직한 게 최고라며 싫다고 말해 봤자 관계만 어그러질 뿐이다. 만약 부모가 아이들이 귀찮을 때마다 그걸 다 표현한다고 생각해 보라.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겠는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는 있지만 그 감정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 표현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 유용한 것이 바로 '~하는 척'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휘둘리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맞춰 주는 것이다. 상황을 원만하게 빨리 풀어가기 위한, 그래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니 '~하는 척'이 옳지 않다는 편견을 버려라. 때로는 솔직한 게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면 돌려주면 그만이다. 누군가 나를 비난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게 부당하다면 그 비난을 받지 않으면 된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맨 처음 받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므로 '느낌'을 상처로 남길지 그냥 상대방에게 돌려주고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다.
그가 당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더 이상 고민하지 마라. 자책하지도 마라. 그가 당신을 함부로 한다고 해서 당신이 못난 존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몸도 뇌도 때론 쉬어야 한다. 잠시 머추어 선 시간에 우리는 그동안 경험한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더 자신 있게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힘차게 나갈 수 있다. 그러니 몸은 피곤한데도 계속 쉬지 못하고 있다면 의도적으로 '잠시 멈춤'을 스스로에게 허락해 보라. 잠시 멈추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함은 줄어들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요즘 몸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며 몸을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예전에는 몸이 피로해도 정신만 괜찮으면 잠을 조금만 자면서 버텼다. 하지만 요즘엔 몸이 피로하고 힘들면 일단 쉰다.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바람도 느끼고 가볍게 산책을 가기도 한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그러면 해야 할 일들 가운데 못 하게 되는 일들이 생기는데 그래도 괜찮다. 꼭 내가 안 해도 되는 것들이다. 그걸 안 하면 내가 마치 무용지물이 되는것 같은 느낌이 이제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오히려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스스로를 한심하고, 모자라고, 허둥대는 결점투성이로 바라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착하고, 남을 배려하고,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바라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똑같은 나인데도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틀리면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고, 부당한 지적에는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늘 피해만 본다는 사고에 물들지 않고 타인과 대등한 관계에 설 수 있는 태도 또한 나를 믿고 존중하는 자존감에서 출발한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누가 나를 믿어 줄 것이며, 내가 나를 보호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보호해주겠는가? 게다가 사랑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해 봐야 그 기대를 다 충족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결국에는 나 자신을 잃고 공허한 사람을 살게 된다.
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바통을 가지고 잘 살고 있는 걸까? 어쨌든 이별 뒤에 남겨진 자가 할 수 있는 건 잘 살아가는 일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이별을 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떠날 사람은 떠날 테고, 남을 사람은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쉽지만 따뜻한 이별을 준비하는 것일 게다. 오늘 하루 잘 살고, 오늘 하루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말이다.
어른이 되어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누구나 부족한 사람이고, 그래서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내 안의 상처 입은 아이를 안아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 아이는 멈추었던 성장을 계속하게 되는 거지.
부족한 엄마를 두었건만 다행히 너는 참 괜찮은 청년으로 자라주었다. 타인을 믿고, 세상을 믿는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말이야. 언젠가 엄마의 죄책감을 눈치챈 네가 말했지. "괜찮아, 엄마. 엄마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느라 그랬던 거잖아."
아들아, 앞으로 너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며 상처 주고 또 상처 받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렴.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것이 바로 성장이고, 이미 그 힘은 네 안에 있다는 걸.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부모에 대해 깊은 애증을 느낀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 사랑을 주지 않은 데에 대한 원한을 품는 거란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를 미워하면서도 떠나지 못한 채 인공위성처럼 부모 주의를 맴돈다. 엄마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졌고, 아빠 때문에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고, 부모 때문에 실패자가 되었다고 한탄하면서....부모가 자기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 믿는다.
부모란 아주 커다란 존재도, 완벽한 존재도 아니야. 그들도 실수를 하고, 비겁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래서 자녀가 자신의 결핍을 채워 주기를 바라거나, 자기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자녀에게 요구하기도 한단다. 뿐만 아니라 부모 역시 젊은 시절엔 너희들처럼 뭔가 서툴고 부족했다. 다만 오랜 시간 노력해서 지금의 성과를 이뤄 낸 것뿐이다.
그러니까 완벽한 부모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그리고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져라. 부족하고 못난 부모를 탓할 필요도, 부모의 업적에 스스로를 옭아맬 필요도 없다. 부모는 자식이 걸어가야 할 길의 이정표는 될 수 있어도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또 과거로 돌아가 부모와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과거에 어떤 상처를 입었든지,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이라고 인정하고 더 이상 과거에 휘둘리지 않기로 결심하는 일이다. 그리고 부모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자식들이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부모의 목적이자 행복이다. 그러니 자식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묵묵히 걸어가면 그뿐이다.
운명의 짝은 불현듯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만들어지는 거란다. 콩깍지가 걷혀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의 장점과 단점, 약점과 강점 모두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그래서 사랑을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온 사람을 껴안는거니까. 그러니 사랑이 다가올 땐 거부하지 말고 온몸으로 껴안아라. 사랑을 할 땐 그 사랑에 미쳐 보아라.
결코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더불어 앞날이 불안하고 자꾸만 위축될수록 작은 도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알을 깨고 나가는 건 무척 신나는 일이다. 몸집이 커져 어느새 답답해져 버린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데 신나지 않을 수 있겠니? 그리고 그렇게 만난 세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 준다. 어찌 보면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철학자 파스칼의 잠언대로 우리가 인생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평생 우리가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가정하고,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뿐이다.
친해지는 것과 원만하게 지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친밀함은 관계에 따라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 나간다. 소수의 친밀한 관계부터 서로 알고만 지내는 사이까지, 동심원의 크기를 잘 알고 알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직장 선후배 사이의 동심원은 서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갈등도 원만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꼭 서로를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부족한 점을 격려하고 함께 노력할 수 있으면 그뿐, 꼭 친해져야 할 필요도 없다.
회사 내 원만한 인간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호감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주고받는 문제다. 사실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주고받음이란다. 내가 하는 만큼 상대가 돌려줄 때에야 기본적으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지. 그러므로 싫은 사람과 일하게 되더라도 그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상대와 공정히 주고받아야 할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여라. 내가 맡은 업무를 성실히 하고 일적으로 서로 도울 건 도우면서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무심해지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지금까지 살아 보니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열 명 중 두 명 정도이더라. 그리고 나와 맞지 않는 두 명은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결코 가까워지는 법이 없더구나.
껄끄러운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에 너무 에너지를 쏟아붓지 마라. 차라리 그 에너지를 여덟 명과의 즐거운 시간에 투자해라. 결국 인생은 즐거운 시간의 합만큼만 의미 있는 것이니까.
물론 1등을 해 본 적도 없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의 나에 만족한다. 내 인생을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꿔 나가고 있으며, 오늘을 좀 더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 삶을 완성한다는 것이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예술 작품은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낼 뿐 서로 비교할 수 없듯이, 자기실현을 위해 애쓴 인생은 그 자체로 의미 있을 뿐 다른 인생과 비교할 수 없다.
타인의 인정은 1등을 한 누구에게나 쏟아지는 인정이므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해도 상관없다. 그러니 다음에 1등을 못 해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진다고 해서 왜 나한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냐고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인정을 받고 싶으면 어떻게든 1등을 하면 될 일인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너희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모진 세상이 너희들을 쥐고 흔들지 못하도록, 그래서 외롭든 말든 1등이 되는게 좋지 않느냐고 부추기는 세상에 끌려가지 않도록, 너희의 내면을 더욱 단련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명심하렴. 너희의 인생을 멋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건 그 누구도 아닌 100퍼센트 너희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결혼32년차 선배로서 너희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첫째, 쓸데없는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는 거야. 여자의 경우, 부부 관계를 해칠까 봐 혹은 힘든 사람 신경 쓰게 해서 뭐하나 싶어 참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참고 살아서 이득이 되는 경우도 있지. 그러나 지나칠 경우 오히려 배우자에 대한 감정적인 거리감을 만들어 내게 돼. 또 남자의 경우, 가족을 이끌고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말도 않고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끙끙 앓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이는 가족을 정말로 짐짝으로 만드는 행동이야. 그러니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요구할 건 당당히 요구하고, 문제가 있으면 함께 노력해서 풀어 가렴. 둘째는 '나'만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호 관계이기 때문에 한쪽만 100퍼센트 희생하는 경우는 없어. 상대도 나르매로 양보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반드시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면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는 부드러움도 필요하다. 셋째는 나중에 후회할 행동이나 말은 하지 말라는거야.
마지막으로, 결혼 생활은 힘든 게 당연하다. 연애는 먼 곳에서 산을 구경하는 거라면, 결혼은 그 산을 직접 오르는 거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던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속속들이 경험하는 게 결혼 생활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현실의 문제까지 겹쳐지면 더욱 골치 아플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참고 싸우며 현명하게 그 산을 올랐을 때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은 남다르다. 앞으로 더 나이가 들어 거동도 불편해지고 인간관계도 좁아지고 영향력도 줄어들 때가 오겠지. 그때 나를 아주 잘 아는 좋은 친구가 늘 곁에 있다면 참 행복할 게다. 그게 네 아버지였으면 더 좋겠고.
역지사지란 말이 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내가 좋더라도 상대가 싫어할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감 능력이 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 낼 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감 능력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미묘한 기술인지 쉽게 잊어버린다. 내가 원하는 걸 그 사람도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그 사람도 좋아할 거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해진다. 내가 어릴 때만해도 역지사지의 태도는 흔한 것이었다. 지금은 지하철을 타면 모두들 스마트폰에 고개를 묻은 채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길거리에 누군가 쓰러져 있어도 내 일이 아니면 선뜻 나서지 않게 된다.
점점 더 사람을 감정이 있는 인간이 아닌 도구로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되지, 왜 굳이 공감하고 배려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공감받길 바란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오랜 기간 타인의 돌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즉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극히 관계 의존적인 동물이며,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찾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타인은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 또한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아집에 빠지지 않고 성찰하고 비판하며 좀 더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진다. 더 나아가 공감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고 듣고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으며, 함께 일하고 나누고 창조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 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의 부서지기 쉬운 유한한 본성과 그 사람의 약점과 한 번뿐인 유일한 목숨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실존적 외로움과 개인적인 곤경과 살아남고 성공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처럼 경험한다.....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인생을 예찬하는 것이다. 공감의 순간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경험 가운데 가장 밀도 높은 생생한 경험이다....공감할 줄 몰라 경험을 제한받는 사람의 인생은 그만큼 충만하지 못하다. 인생을 구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단단히 묶여 산다는 것이다. 뚝 떨어진 혼자만의 삶은 그만큼 부족한 삶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감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빨리 가려면 직선으로 가라/ 깊이 가려면 굽이돌아 가라/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라/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아프리카에서 전해 내려오는 격언)
우리의 일상은 쳇바퀴처럼 굴러간다. 특별한 일도, 재밌는 사건도 별로 없다. 그래서 가끔은 정말 지칠 때가 있다. 특히나 고통이 가시기는커녕 심해지는 날엔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우울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고통스럽다 생각하며 누워만 있는 것보다는 소소한 삶의 재미를 만들어 가는 것이 훨씬 좋았다. 일어나서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하고, 또 그걸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지 떠올리는 것만 해도 좋았으니까. 컨디션이 좋은 날엔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요리하고, 컨디션이 안 좋아 누워 있는 날에도 키우는 꽃과 나무에 새로 핀 잎사귀는 없는지 살펴본다.
세상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만큼 보여 준다는 걸,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고자 마음먹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재미투성이라는 걸.
오금이 저릴 만큼 재미있는 일이 우리 인생에서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이 이어질 뿐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자신감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해 봤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거라는 걱정, 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시도해 보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일에서도 쉽사리 호기심을 갖지 못한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퍼센트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이며, 22퍼센트는 아주 사소한 걱정들이고, 4펀센트는 우리가 전혀 손쓸 수 없는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4퍼센트만이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96퍼센트의 걱정과 불평불만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오늘을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만다.
인도의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는 <장자, 도를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은 경험이지 이론이 아니다. 삶에는 해석이 필요없다. 삶은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매 순간 삶이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대는 머리로 궁리하고 있다. 그대는 삶에게 말한다. '기다려라. 내가 문을 열어 주겠다. 그러나 먼저 결정 내릴 시간을 달라.' 삶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평생토록 삶이 그냥 왔다가 간다. 그대는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 채 다만 고달프게 질질 끌려갈 뿐이다."
이제 그만 생각만으로 지쳐 버리는 삶에서 벗어나라. 오쇼의 말처럼 삶은 그냥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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