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자신의 감정이 무시당하고 어리석게 여겨질 때 특히 상처 받는다.
돌보지 않은 채 방치해 둔 상처는 계속 옮겨가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외부를 향하는 공격성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엄격함과 항상 일치한다.
아이를 때리는 엄격한 교육만이 아이에게 공격성을 심어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쉬기 위하여 아이가 항상 제멋대로 하는 것을 내버려둠으로써 아이가 자신이 부모에게 중요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그러한 분별없는 교육도 공격성을 심어준다. 아이는 부모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신을 놔두는 것을 자신들의 공격적 행동에 대한 부모의 동의로 이해한다.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는 것은, 충분히 보호를 받지 못함으로써 생긴 심각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두려움 외에 불신도 엄격주의의 원인이다. 부모와 견고하고 확실한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위협적인 인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명백한 규범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규범이 아이의 내면에서 공격성과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격한 감정을 만들어 낼지라도, 아이는 그 규범 때문에 어느 정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삶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에너지를 그 폭발을 막는 일에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는 또다른 원인은 그릇된 이상주의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런저런 이상을 실현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자면 항상 자기 자신을 이겨 내고 늘 친절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며, 항상 양보하고 결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공명심을 만족시키려는 우리의 이상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명에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유일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 각자가 하느님을 유일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 비참해질 것이다.
억압된 욕망의 가장 나쁜 결과는 양심에 숨겨진 잔인함이다. 아이한테서 공격성을 폭력으로 몰아낼 경우 억제된 공격성은 초자아로, 곧 엄격한 양심으로 빗나가게 된다.푸러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 잔인성이 무의식에 머물러 있을 경우, 외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잔인성은 항상 좋은 목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잔인한 방법을 합법화한다."
푸러는 이러한 공격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인내하며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대하고 인내하려는 사람은 "불충분한 것, 나쁜 것, 약점이 많은 것, 심지어 악한 것도 어느 정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것을 인내할 수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편협한 사람이다. 실수를 인내할 수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엄격한 사람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마치 강도 다마스테스처럼 사지를 늘리는 인물로 불리는 프로크루스테스가 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았던 거대한 괴물이며 노상강도였다. 그는 붙잡은 사람을 자기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침대 길이보다 그 사람의 사지가 짧으면 잡아 늘여 침대에 맞추고, 사지가 침대보다 길면 잘라냈다. 어떤 경우든지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자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손에 죽어야 했다.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는 사람들을 억지로 그에 맞추어야 하는 주어진 도식을 가리키는 관용구가 되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율법으로 구체화되었던 프로크루스테스를 당신의 복음으로 이겨 내셨다. 그분은 개개인을 바라보셨고, 개개인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한 규범들을 제안하신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기 위하여 각자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셨다.
탄탈로스는 자신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자신을 잔인하게 대한다. 그는 자신의 한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모든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하느님에게 도전한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되면 스스로 탄탈로스의 잔인한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 삶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은 가장 비싸고 가장 좋은 것을 소모했을지라도 여전히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또 현재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다. 그들은 즐기고 있는 중에도 더 큰 즐거움을 기대한다. 그들은 삶을 그냥 지나쳐 가며 탐욕스럽게 쾌락을 고대할 뿐 즐기지는 못하는 벌을 받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는 신들과 신의 축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 같은 유형의 사람은 개인의 영역에서도 자신의 삶을 장악하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계획할 수 있다고 여긴다. 삶이 자신의 예측대로 전개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삶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그는 의식에 치우쳐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의 무의식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이성과 의지로 계획하지만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느낌을 모르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사람은 벌을 통하여 자신의 느낌을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상처를 입은, 늘 반복하여 겪는 고통의 감정이며, 물어 뜯긴 감정이다. 간은 해독하는 역할을 한다. 곧 우리에게 유익한 것과 유해한 것을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프로메테우스의 물어뜯긴 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무절제와 과대망상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을 상징한다.
파에톤은 자기 아버지 태양신 헬리오스에게,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임을 친구에게 입증할 수 있는 표지를 보여 달라고 청한다. 그의 아버지는 자비를 청하라고 권유하지만 파에톤은 어리석게도 하루 동안 태양 마차를 몰게 해 달라고 청한다.
파에톤은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는 자신의 소망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소망을 바꿀 수 없다. 호의적인 아버지의 충고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고집에는 자신을 향한 엄격함이 다분하다. 이를 테면 자신이 실수한다는 것을, 소망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의 계획이 파멸로 이어질 것이기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지 않는다. 만일 자신의 말과 소망과 계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는 자신이 나약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집으로 내면의 모든 느낌은 억압된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의 소망과 계획에 휘말리고 있음을 감지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
잔임함의 또 다른 방식은 자신의 위대함에 도취되는 것이다.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
많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로 결정하고 회개하면,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모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이 자신들을 도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상주의자들은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 있고, 특히 자신의 육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하늘의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의 짙은 어둠 속으로 내려갈 용기를 지닐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 우리가 젊은이로서 하느님을 위해 내린 결단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겪게 되는 모든 굴곡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늘 다시 새로워져야 한다.
자기파괴의 또 다른 상징은 니오베이다. 테베의 여인들이 여신 레토와 그녀의 쌍둥이 아이인 아폴로와 아르테미스를 숭배하고자 했을 때, 니오베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열네 명의 자녀를 숭배하라고 선동하였다.
니오베는 제 정신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느낀 것이 아니라, 일하지 않고 소유하게 된 것, 곧 자기 아버지와 남편과 자녀들을 뽐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발판삼아 자기 삶을 구축한다. 그녀는 자녀와 아름다움과 재산을 통하여 자신을 규정한다. 그녀는 평온을 누리지 못한다.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며, 삶은 공허하고 지루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 찾는다. 자기 자신을 깊이 깨닫고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하여 영혼의 내면에 이르는 수고스런 길을 겁내는 사람은 참된 삶에서 멀어진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통로를 찾지 못하고, 생명과 사랑에 이르는 길도 찾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뒤에서 절뚝거리며 따라간다. 왜냐하면 나에게 없는 능력이 항상 다른 사람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교하는 강박증을 이겨 내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의 가치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여 주는 그들의 부유함에는 눈을 감아야 한다.
우리는 삶에서 모든 것이 '월등'해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작은 것, 보잘것없고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월등'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경쟁자를 속여야만 하는가?
비교강박증과 평가강박증은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곧 자기 자신을 돌로 만들어 버린다. 돌이 된 니오베의 얼굴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렀다. 그러나 이 눈물조차도 니오베에게는 생명의 표지가 아니라 내적인 공허의 표현이다.
눈물은 고통을 삶으로, 더 나아가 기쁨으로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자동반사적으로 흘러내리는 니오베의 눈물은 죽음의 표지이다. 호의나 거부를 드러내는 얼굴은 돌이 되었고, 눈은 경직되어 더 이상 사람들을 바라볼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사는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된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주시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다.
자신의 잘못, 약점, 욕망과 화해하고 그것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일, 잘못과 약점과 욕망을 향해 호통치고 그것을 억압하는 대신에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허용하는 일은 인생 전체를 통해 배워가는 과정이다.
"완벽주의자의 죄 콤플렉스는 죄의 그림자가 모습을 보이는 곳에 나타난다. 그곳은 인간적 약점과 실패 그리고 일상적인 작은 결핍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죄를 지을 가능성, 평평한 삶의 마룻바닥에서 미끄러지고 굉장히 멋지게 보이는 흰옷을 더럽힐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나 있다. 완벽주의자는 항상 죄에 빠지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는 오랫동안 가상의 죄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의 잘못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거부한다."
많은 사람이 늙은 부모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면서도 자기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공격성이 쌓이는지 알지 못한다. 그 공격성은 부모님을 향하는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감히 자신의 기분에 솔직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포기하는 것이 즐기는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것이라면,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영성 생활이 나에게 항상 무언가를 가져다주어야 하고, 나는 늘 최고의 기분이어야 한다는 태도도 마찬가지로 해롭다. 하지만 범쾌락주의는 다른 옷을 입고도 나타날 수 있다. 모든 것이 어렵다고 한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엄살이 심한 이러한 태도에는 희망이 없으며,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건전한 고행에는 자신을 잘 대하는 태도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완전함은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지 완벽하고 흠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본능에 따르는 생활과 육체의 욕구는 살피지 않고 오직 금욕만을 강요한다. 그 결과 억압된 충동이 역효과를 내어 끊임없이 유혹이나 신경증의 증세로 표현된다. "그러면 노련한 의지의 곡예로 유혹을 쫓아내고, 영혼의 욕구는 무시하고, 흥분된 감정을 억압한다" 하지만 그 결과 인간은 피도 영혼도 정신도 없는 존재가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먼저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우리에게 충만한 삶을 베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말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방해하는 것과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고통을 받아들일 각오도 해야 한다.수난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삶을 즐길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앗아 가실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계속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에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태도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수 있음을 아는 것도 그리스도교의 태도이다.
등이 아파 고생하던 어떤 수녀는 그 경련이 순전히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가했던 가혹함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수녀는 비그리스도교적인 모든 생각을 자신에게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수도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감정과 격정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모든 근육을 수축해야 했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폭력적으로 자신에게서 몰아내기 위해 기도한다면,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 수녀의 태도는 폭력으로 자신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종교심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좋은 의지로 자신의 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묵주기도를 많이 바쳐야 한다는 강박감 없이, 자전거를 타고 창조물 사이를 지나면서 감사를 드리는 것도 기도라는 것을 알았다. 종교심의 이면에는 인간은 그지없이 나쁘다는 깊은 불신이 숨어 있었다. 그는 많은 것을 이행함으로써, 말하자면 되도록 많은 기도와 종교적 관습을 실천함으로써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겸손은 자신의 고유한 진리에 이르는 용기를 뜻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자신의 어둠으로 내려가 그 어두운 면고 화해하는 용기를 뜻한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 곧 호감이 가는 면과 호감이 가지 않는 면을 지닌 보통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자신의 평범함과 화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적인 것이며, 예수님의 생각일 것이다.
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 것을 방해한다.
편두통은 자기 자신을 매우 억누르거나 자신의 생각과 소망을 억압하고 있다는 표현일 수 있다.
사람들이 공격을 외면할 경우, 그 공격은 자신의 신체를 겨냥한다.
느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 및 사물과의 관계성을 상실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느끼지 못하고, 사물과도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인간은 장작을 패든가 축구를 하든가 혹은 추리영화를 봄으로써 자신의 공격성을 외부로 터뜨려 푸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카타르시스 이론이다.
아이는 각각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모든 아이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애정과 조건 없이 생존할 권리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아이는 자기 부모가 좌절을 잘 대하는 것을, 말하자면 삶에서 늘 거듭 실망했다는 이유로 나약한 아이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한다.
안식일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의 선물이다. 인간이 휴식을 기뻐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그분의 지혜로부터 나온다. 계명이 여기 이 지상에서 서로 잘 살고, 인간의 본질에 상응하는 삶을 살도록 인간을 돕고자 한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이 자신의 본질에 맞게 사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드러나도록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호소하신다. 항상 겁에 질린 채 우리 삶의 열매가 얼마만큼 익었는지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내맡긴다면, 그분께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열매가 자라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충분하게 일했는지 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지옥과 불과 어둠에 대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일러 주시려는 것은 이것이다. '네가 그렇게 거꾸로 산다면, 너 자신을 가혹하게 대한다면, 네 인생은 지옥이 될 것이고, 네 마음은 어두워지고, 공허함을 느끼고, 결국 소멸될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누어 주시고 당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신다고 믿으면, 우리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선사하셨던 가능성을 펼쳐 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때에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사라진다. 실패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인생을 감행할 수 있다. 우리가 불안한 마음이 아니라 신뢰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우리 삶은 성공한다. 즉 하느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인생을 과감하게 살아간다면,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인생을 파묻지 않는다면, 인생은 성공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신다. "인생은 내가 그대에게 말한 그대로이다. 그대의 인생을 감행하라. 그대의 인생을 스스로 살아라. 다른 사람에게 그대의 삶을 맡기지 마라."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오른손은 의식 세계를 가르키고, 왼손은 무의식 세계를 가리킨다. 일방적으로 의식적으로 살면서 모든 것을 손에 움켜쥐고, 모든 것을 스스로 행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의식에 치우쳐 계속 살아간다면, 그들의 인생은 지옥이 된다. 그들은 의식 세계를 잘라내야 한다. 그래야 무의식의 세계가 살 수 있고, 사람이 균형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나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고, 단지 의식에 치우쳐 살아갈 뿐이다. 한쪽에 치우쳐 살면 그 대가를 치른다.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기를 바란다면,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삶을 살고 나의 개인적 소명을 이행하기를 바란다면, 내 가족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내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한다.
십자가는 오히려 삶에 속한다. 나를 방해하는 것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만일 이상만을 고집하며 산다면, 삶은 경직된다. 십자가는 삶이 힘들기만 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융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바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우는 적군은 우리의 잘못과 약점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도가 지나친 일이다.
성급함과 화해한다는 것은, 먼저 성급한 상태에서 나는 무기력하지만 그것이 내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는 자신과 스스로 협정한 내적 계약을 통해서 스스로를 종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영에 따라 산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소명에 따라 사는 것이지, 외부에 의해서 곧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에 따라 산다는 뜻은 아니다. 말하자면 내면에 의해서, 곧 자신의 존엄성과 유일성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카리스마에 대한 감각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영에 따라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삶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그리스도인은 더욱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선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가장 깊은 내면의 실재에 이르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나에게만 신뢰하시고 기대하신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대를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새롭게 하신 그 사람이 되어라.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선사하셨던 새로운 가능성을 살아가라.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실현에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릇된 가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오로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분명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인간은 고상하며 남을 돕기를 좋아하고 선하다'는 그리스인들이 계획했던 인간의 모습을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상은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일치한다. 우리가 그 이상에 따라 살면, 우리의 품위를 발견하고, 우리의 인간성에 대해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셨던 가능성, 곧 고상하고 의롭고 정결하게 살고,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통해 드러나도록 살 수 있는 그 가능성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하지 마라'와 '하라'는 규범을 두려워하며 고수하는 것은 항상 인간 안에 있는 불신의 표현이다. 그리고 불신 속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매우 가혹하게 대한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외부의 지시만을 받으며 외부에 의해 조정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등한시하며 산다.
우리의 사명은 어떤 규범에 응하고 자신을 많은 계명의 종으로 만드는 데에 있지 않고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데에 그러니까 우리의 인간 존재와 본질에 상응하게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게 사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는 교육자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고,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힘과 능력을 주시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세상의 세력에서 해방하고, 욕망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기도와 일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 리듬이 인간에게 유익하다.
현명한 노사부는 사람이 지나치니 고행을 하며 자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잘 대하라고, 곧 자신에게 유익한 기준을 발견하라고 가르친다.
'나는 젊은이들을 전적으로 지지하네. 헛된 명예에 관심을 가지고 나태해지지 않는 것도 젊은이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네. 실제로 헛된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칭송을 받을 것을 고려하여, 틀림없이 행동을 조심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실천해야 하고, 사랑을 얻어야 하고, 반대를 견디어 내야 할 것이네. 이런 식으로 견디어 낸 후에 하느님의 은총이 긍에게 내리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그 젊은이는 듣는다네. '왜 그대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고되게 일하느냐?' 그제서야 그는 더 이상 인간적 명예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명예를 중요시하라는 권유를 따르게 될 것이라네.'
지금 모든 동기가 과연 순수한가에 대해 번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도움을 베풀면 우리에게도 무언가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때 우리가 뭇사람에게 드러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적인 선이시다.
우리는 모든 행동에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있음을 알면서도,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려고 노력하는 겸손은 풍부한 열매를 맺는다. 반면에 엄격주의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굶어 죽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잘 대할 수 있기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을 잘 대해야 하고,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단죄하지 않은 채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관건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무리하게 요구하고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만 계획하셨던 유일한 삶을 살려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자아 곧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고유한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인 내 영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해 많은 상징으로 내 모습을 보여 주시기 때문에, 꿈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잘 대한다는 것은 나를 방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어둠과 화해하고 나의 내적 모순을 긍정할 각오가 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아들러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삶에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으로 아이를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 수단은 사랑이다. 모든 아이가 각각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모든 형제자매에게 똑같이 사랑이 분배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아이는 자신을 잘 대한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
초인격 심리학에서는 비동일화를 통하여 화해의 길에 이른다. 나의 분노, 불안, 죄, 실수 등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본다. "나는 분노한다. 그러나 내가 나의 분노 자체는 아니다. 나는 실수한다. 그러나 내가 나의 실수 자체는 아니다. 나는 죄를 짓는다. 그러나 내가 내 죄 자체는 아니다." 나에게는 이러한 감정이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 있고, 거기에서 나는 나의 참된 자아를 만난다. 나는 난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상대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화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불안, 예민함, 약함 등을 제압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나의 과제는 내 안에 있는 공간,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머무시고 그러한 감정과 문제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러면 나는 내가 싸워야 하는 모든 격정이 나를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의 모든 심리학파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의 삶과 화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여긴다. 그 원칙은,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평가하거나 단죄하지 않은 채 바라보는 것이며, 각각의 고유한 삶의 역사를 배경 삼아 자신의 가치와 삶의 위치를 발견하고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영적 동반은 심리 치료를 넘어서서, 하느님께서 개인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그 사람을 어떻게 이끄셨고, 무슨 목적으로 부르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다룬다. 영적 동반에서 개인은 자신의 길을 발견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마련하신 고유한 계획을 깨달아야 한다. 영성생활의 목적은 하느님께서 주신 내 소명에 맞게 사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본질, 참된 자아에 일치하여 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신을 잘 대하는 것을 뜻하며, 더 이상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본성에 일치하여, 삶의 어떤 영역을 더 이상 죽이지 않고 통합하면서 사는 것을 뜻한다.
고행의 본래 의미는, 참된 인간이 되는 훈련을 뜻하며 성공적인 삶에 필요한 숙련에 다다르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으로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한다. 건전한 고행은 인간존재에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그 즐거움은,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만드신 본래의 내가 되어 가는 즐거움이다.
내가 모든 욕구에 응하게 되면, 내 안에선느 나에 관한 실망과 분노가 자란다. 이로 인해 나 자신을 아프게 한다. 이러한 일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에 관하여 비참한 생각을 갖는다.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성향이 커진다.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자신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공격적으로 대하게 된다.
브래드쇼는 규율을 고유한 인간됨에 이르는 긍정적인 길로 본다. "우리가 아이들을 훈육시킨다면, 그들에게 생산적이고 사랑이 가득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스콧 펙은 규율이 삶의 고통을 덜어 주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는 것을 배우고, 충동을 지체시키는 것과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도 배운다. 그리고 우리는 책임 의식이 각인되어 있는 삶이 더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을 배운다."
문제의 관건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규율, 말하자면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수동적으로 살아지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나에게 주는 규율을 익히는 것이다.
화해한다는 것은 내가 온전히 나에게 머무르는 것, 내가 나 자신을 느끼는 것,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뜻한다.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 유일한 존재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오직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화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나 자신을 만난다며, 나는 스스로에게 비교하지 못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이 아예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삶의 신비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상처와 친숙해져야 하고, 상처에 '입을 맞추어야'하고, 상처를 잘 대해야 한다. 이럴 경우 상처는 새로운 삶의 원천으로 변화될 수 있다.
자신의 배반을 자비롭게 대하기 위해서는 자비로워지는 훈련을 오랫동안 해야 한다. 그때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고 나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 이 기도를 드린다. 그러면 나는 부정적인 기분이 서서히 변화되는 것을 감지한다. 이러한 기분을 피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부정적인 기분을 단지 다른 차원으로 밀어내는 것일 뿐, 무력화시키지 못하기에 다시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게 한다. 이런 경우 도움이 되는 것은, 떠오르는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생각을 하느님 앞에서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다. 혹은 이러한 생각과 기분일 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드린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온화한 방법이지만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가 찾아들어오는 것을 충분히 체험할 수 있다.
경건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응답하는 태도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외적 형태도 필요하다. 기도, 전례, 의식, 고요한 시간, 묵상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기도와 묵상 등을 실행하되, 최상이나 최고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한 정도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일미사 참례는 사람에게 부과된 짐이 결코 아니다. 한 주에 한 번 일상적인 리듬을 깨고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에게 유익하다.
의식은 자기 자신을 잘 대하는 형식이다. 나는 나 자신을 주의 깊게 그리고 신중하게 대하고, 지금 이 순간과 삶을 기뻐한다.
종교적 의무가 우리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우리가 종교적 의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공로에대한 생각이 우리의 경건함에 슬쩍 끼어드는 일이 늘 반복된다. 그것도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함께 불러일으키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더 기도할 수 있고 더 묵상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은 순수한 경건함을 위한 훌륭한 조언자가 아니다. 기도로 오직 양심의 가책만을 달래려는 사람은 결코 평온에 이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가혹하게 대한다.
나는 어떤 업적과 기도로 하느님을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내가 기도하는 까닭은 내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느끼고 그 갈망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내 삶을 그분께 맞추고 싶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나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을 뜻한다. 자기 자신만을 맴도는 사람의 삶은 정체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펼칠 수 있는 목표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어떤 일에 참여하는 것,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하기 위해서 한번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여기에는 이기주의적인 동기조차도 허용될 수 있다. 나도 무엇인가를 돌려받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완전히 사심이 없는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오히려 이웃을 잔인하게 대한다.
그릇된 동기가 이웃 사랑을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다는 순수한 두려움 때문에 이웃 사랑을 오히려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부족한 모습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삶은 생기를 잃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잘 대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도울 수 있을 때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스스로 빼앗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돕기 위해 나 자신과 나의 소망들을 진정으로 내려놓으면, 나는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손님이 나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또 손님으로 인한 온갖 방해를 생각하지 않은 채 손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손님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확보해 놓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줄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행복을 누리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잘 대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만을 맴돌지 않고, 바깥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자신의 일에 헌신하고, 자신의 손이나 생각을 통해 얻은 것에서 기쁨을 누린다.
스트레스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 대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스트레스는 세 가지 원인에서 생긴다. 첫째는 일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내적 태도 때문이다. 자기 자신 안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셋째 원인은 개인이 일에 관하여 지니고 있는 내적인 반항심일 수 있다. 자신은 본래 다른 일을 위해 태어났다든지, 더 나은 동료들을 만났어야 했다든지, 노동은 원래 의미가 없고 지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사람은 내적인 거부와 더불어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늘 자신이 지쳐 있다고 느낀다.
사물을 신중하게 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조심스럽게 대할 것이다. 따라서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한 인간의 내적 태도를 알아보는 기준이 된다. 그 태도에서 그의 영혼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베네딕토 자신과 내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사물을 대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대한다. 그가 세상을 친구로 생각하고 다정하게 대하면, 세상도 그를 다정하게 대한다. 세상이 그 자신의 한 부분이 된다. 내적 일치가 생기고, 서로에게 기쁨이 된다. 오늘날 피조물을 잘 대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과제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조화롭기를 바란다면, 사회 전체가 피조물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조심스럽게 대할 수 있기 위해 사물을 신중하게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은 유익하다. 내 방과 내 옷과 내 물건을 잘 대할수록 그만큼 나는 나 자신을 잘 대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사물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면, 그와 함께 마음의 섬세한 움직임에 대한 감각도 둔해질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잘 대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을 평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인정하고, 나아가 그 잘못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잘못에만 머물기보다는 우리의 잘못을 자비롭게 대하시며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느님을 더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할 수는 없다. 오히려 또 다시 실수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만이 죄 때문에 우리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없고, 같은 잘못을 또다시 범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늘 다시 죄에 떨어진다. 이러한 사실과 화해하는 것이 겸손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의 이상이 내 앞에서 무너지면, 나는 이것을 매우 큰 고통으로 체험한다. 그러나 겸손은 자유와 신뢰를 동시에 느끼도록 우리를 이끈다. 나는 내 잘못을 늘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단순히 잊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내 잘못을 용서하셨고 이미 잊어버리셨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잘못 때문에 늘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 잘못에 주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잘못을 반드시 바라보고, 인정하고, 처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잘못을 놓아버려야 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면,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반복하여 내 잘못을 비난하고 나 자신을 모욕함으로써 내 삶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희생 제물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의무의 제단에 우리 자신을 바치거나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자비를 뜻하는 '라하밈'은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을 표현한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자비로우시다. 나 자신에게 어머니 노릇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격노하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나의 내적 아이가 나의 모태와 하느님의 모태에서 성숙해질 수 있고, 또 하느님께서 원하신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자비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온유와 자비와 사랑의 내적 공간과 맞닿는 것을 의미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내 안에 거주하시는 곳에서 나는 치유될 수 있고, 나의 자기비난과 자책감은 그 힘을 잃는다. 그곳에서 나는 참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지금 내 모습대로 있어도 된다.
자비의 두 번째 개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그리스어로는 보통 '엘레오스'이다. 구약성경에서 헤세드는 하느님의 은총,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태도,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할 수 있다. 하느님의 측은지심은 항상 당신의 진노를 이긴다. 신약성경에서 엘레오스는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사람이 사람에게 취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상호 간에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는 자비"를 뜻한다. 엘레오스의 뜻에서 우리 자신을 자비롭게 대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온화하고 다정하게 잘 대하는 것을 뜻한다.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을 편들고 우리 자신에게 충실하고 다른 사람을 표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엘레오스는 종종 측은지심과 용서를 뜻하기도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자비를 나타내는 세 번째 단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스플랑크논'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내장'이다. 내장은 사람 안에서 상처받기 쉬운 감정이 있는 장소를 나타낸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사람과 함께 느끼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사람들과 함께 느끼신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시고, 사람들이 당신 곁으로, 아니 상처받기 쉬운 감정이 있는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하신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모욕과 상처를 느낀다면 내 안에 있는 상처 입은 아이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마음을 열면 나는 나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탐구하려는 객관적 시각으로 나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공감하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나의 실수와 약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공감하고 그것을 향한다. 약함과 실수는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랑스런 눈길 속에서 그것은 변화될 수 있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상처받기 쉬운 감정이 있는 내 안의 장소와 만나는 것, 그러니까 내가 나의 상처를 허용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상처받기 쉬운 나의 감정이 있는 곳에서 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아주 가까이 있다. 그곳에서 나의 상처는 하느님의 자비로 치유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다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나의 이성으로 깨닫는 것보다도 더 많이 깨닫는다.
자비를 나타내는 네 번째 단어는 '오이크티르모스'이다. 이 단어는 동정심을 표현한다. 곧 아픔에 사로잡힌 상태와 도움을 베풀 각오가 되어 있는 측은지심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동정심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원수에게 가혹하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동정해야 한다. 악과 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항상 반복하여 넘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동정심은 우리를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든다. 우리를 하느님의 마음에 가까이 데려가는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의 약함과 우리 주변 사람에게 갖는 동정심이다. 참된 측은지심에서, 우리는 사랑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본질을 감지한다.
나 자신을 자비롭게 대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불행하고 고독한 것, 내 안에 있는 가난하고 비참한 것, 내 안에 있는 불행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버림받은 느낌과 외로운 느낌 등에 자신의 마음을 닫지 않는 것을 뜻한다. 나는 내 안에 있는 동정을 받아야 하는 것, 내가 가장 외면하고 몰아내고 싶은 것에 대해 내 마음을 닫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에게는 버림받았다는 그러한 느낌이 때때로 솟아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몰아내려고만 한다. 그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고독과 버림받음, 우리의 비참함과 두려움은 변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불길한 느낌에서 끊임없이 도망친다. 만일 우리가 내 안에 있는 가난한 것과 나약한 것을 진심으로 대하면, 내 안에 있는 가난한 것은 바로 축복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나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마음을 열 수 있다. 하느님은 나와 함께 느끼시고 나에게 마음을 두고 계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항상 유효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사랑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라고 요구하신다. 말하자면 소유와 사람에게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의 삶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자비 안에서 나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마음을 깨닫고, 거기에서 나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호의를 체험할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가 우리의 삶에서도, 곧 우리가 이웃을 자비롭게 대하는 일에서, 아울러 우리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는 데에서도 드러나기를 바라신다.
돌보지 않은 채 방치해 둔 상처는 계속 옮겨가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외부를 향하는 공격성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엄격함과 항상 일치한다.
아이를 때리는 엄격한 교육만이 아이에게 공격성을 심어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쉬기 위하여 아이가 항상 제멋대로 하는 것을 내버려둠으로써 아이가 자신이 부모에게 중요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그러한 분별없는 교육도 공격성을 심어준다. 아이는 부모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신을 놔두는 것을 자신들의 공격적 행동에 대한 부모의 동의로 이해한다.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는 것은, 충분히 보호를 받지 못함으로써 생긴 심각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두려움 외에 불신도 엄격주의의 원인이다. 부모와 견고하고 확실한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위협적인 인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명백한 규범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규범이 아이의 내면에서 공격성과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격한 감정을 만들어 낼지라도, 아이는 그 규범 때문에 어느 정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삶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에너지를 그 폭발을 막는 일에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는 또다른 원인은 그릇된 이상주의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런저런 이상을 실현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자면 항상 자기 자신을 이겨 내고 늘 친절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며, 항상 양보하고 결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공명심을 만족시키려는 우리의 이상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명에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유일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 각자가 하느님을 유일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 비참해질 것이다.
억압된 욕망의 가장 나쁜 결과는 양심에 숨겨진 잔인함이다. 아이한테서 공격성을 폭력으로 몰아낼 경우 억제된 공격성은 초자아로, 곧 엄격한 양심으로 빗나가게 된다.푸러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 잔인성이 무의식에 머물러 있을 경우, 외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잔인성은 항상 좋은 목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잔인한 방법을 합법화한다."
푸러는 이러한 공격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인내하며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대하고 인내하려는 사람은 "불충분한 것, 나쁜 것, 약점이 많은 것, 심지어 악한 것도 어느 정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것을 인내할 수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편협한 사람이다. 실수를 인내할 수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엄격한 사람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마치 강도 다마스테스처럼 사지를 늘리는 인물로 불리는 프로크루스테스가 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았던 거대한 괴물이며 노상강도였다. 그는 붙잡은 사람을 자기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침대 길이보다 그 사람의 사지가 짧으면 잡아 늘여 침대에 맞추고, 사지가 침대보다 길면 잘라냈다. 어떤 경우든지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자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손에 죽어야 했다.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는 사람들을 억지로 그에 맞추어야 하는 주어진 도식을 가리키는 관용구가 되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율법으로 구체화되었던 프로크루스테스를 당신의 복음으로 이겨 내셨다. 그분은 개개인을 바라보셨고, 개개인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한 규범들을 제안하신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기 위하여 각자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셨다.
탄탈로스는 자신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자신을 잔인하게 대한다. 그는 자신의 한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모든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하느님에게 도전한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되면 스스로 탄탈로스의 잔인한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 삶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은 가장 비싸고 가장 좋은 것을 소모했을지라도 여전히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또 현재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다. 그들은 즐기고 있는 중에도 더 큰 즐거움을 기대한다. 그들은 삶을 그냥 지나쳐 가며 탐욕스럽게 쾌락을 고대할 뿐 즐기지는 못하는 벌을 받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는 신들과 신의 축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 같은 유형의 사람은 개인의 영역에서도 자신의 삶을 장악하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계획할 수 있다고 여긴다. 삶이 자신의 예측대로 전개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삶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그는 의식에 치우쳐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의 무의식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이성과 의지로 계획하지만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느낌을 모르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사람은 벌을 통하여 자신의 느낌을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상처를 입은, 늘 반복하여 겪는 고통의 감정이며, 물어 뜯긴 감정이다. 간은 해독하는 역할을 한다. 곧 우리에게 유익한 것과 유해한 것을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프로메테우스의 물어뜯긴 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무절제와 과대망상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을 상징한다.
파에톤은 자기 아버지 태양신 헬리오스에게,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임을 친구에게 입증할 수 있는 표지를 보여 달라고 청한다. 그의 아버지는 자비를 청하라고 권유하지만 파에톤은 어리석게도 하루 동안 태양 마차를 몰게 해 달라고 청한다.
파에톤은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는 자신의 소망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소망을 바꿀 수 없다. 호의적인 아버지의 충고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고집에는 자신을 향한 엄격함이 다분하다. 이를 테면 자신이 실수한다는 것을, 소망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의 계획이 파멸로 이어질 것이기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지 않는다. 만일 자신의 말과 소망과 계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는 자신이 나약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집으로 내면의 모든 느낌은 억압된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의 소망과 계획에 휘말리고 있음을 감지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
잔임함의 또 다른 방식은 자신의 위대함에 도취되는 것이다.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
많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로 결정하고 회개하면,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모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이 자신들을 도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상주의자들은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 있고, 특히 자신의 육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하늘의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의 짙은 어둠 속으로 내려갈 용기를 지닐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 우리가 젊은이로서 하느님을 위해 내린 결단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겪게 되는 모든 굴곡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늘 다시 새로워져야 한다.
자기파괴의 또 다른 상징은 니오베이다. 테베의 여인들이 여신 레토와 그녀의 쌍둥이 아이인 아폴로와 아르테미스를 숭배하고자 했을 때, 니오베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열네 명의 자녀를 숭배하라고 선동하였다.
니오베는 제 정신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느낀 것이 아니라, 일하지 않고 소유하게 된 것, 곧 자기 아버지와 남편과 자녀들을 뽐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발판삼아 자기 삶을 구축한다. 그녀는 자녀와 아름다움과 재산을 통하여 자신을 규정한다. 그녀는 평온을 누리지 못한다.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며, 삶은 공허하고 지루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 찾는다. 자기 자신을 깊이 깨닫고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하여 영혼의 내면에 이르는 수고스런 길을 겁내는 사람은 참된 삶에서 멀어진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통로를 찾지 못하고, 생명과 사랑에 이르는 길도 찾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뒤에서 절뚝거리며 따라간다. 왜냐하면 나에게 없는 능력이 항상 다른 사람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교하는 강박증을 이겨 내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의 가치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여 주는 그들의 부유함에는 눈을 감아야 한다.
우리는 삶에서 모든 것이 '월등'해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작은 것, 보잘것없고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월등'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경쟁자를 속여야만 하는가?
비교강박증과 평가강박증은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곧 자기 자신을 돌로 만들어 버린다. 돌이 된 니오베의 얼굴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렀다. 그러나 이 눈물조차도 니오베에게는 생명의 표지가 아니라 내적인 공허의 표현이다.
눈물은 고통을 삶으로, 더 나아가 기쁨으로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자동반사적으로 흘러내리는 니오베의 눈물은 죽음의 표지이다. 호의나 거부를 드러내는 얼굴은 돌이 되었고, 눈은 경직되어 더 이상 사람들을 바라볼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사는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된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주시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다.
자신의 잘못, 약점, 욕망과 화해하고 그것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일, 잘못과 약점과 욕망을 향해 호통치고 그것을 억압하는 대신에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허용하는 일은 인생 전체를 통해 배워가는 과정이다.
"완벽주의자의 죄 콤플렉스는 죄의 그림자가 모습을 보이는 곳에 나타난다. 그곳은 인간적 약점과 실패 그리고 일상적인 작은 결핍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죄를 지을 가능성, 평평한 삶의 마룻바닥에서 미끄러지고 굉장히 멋지게 보이는 흰옷을 더럽힐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나 있다. 완벽주의자는 항상 죄에 빠지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는 오랫동안 가상의 죄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의 잘못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거부한다."
많은 사람이 늙은 부모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면서도 자기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공격성이 쌓이는지 알지 못한다. 그 공격성은 부모님을 향하는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감히 자신의 기분에 솔직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포기하는 것이 즐기는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것이라면,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영성 생활이 나에게 항상 무언가를 가져다주어야 하고, 나는 늘 최고의 기분이어야 한다는 태도도 마찬가지로 해롭다. 하지만 범쾌락주의는 다른 옷을 입고도 나타날 수 있다. 모든 것이 어렵다고 한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엄살이 심한 이러한 태도에는 희망이 없으며,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건전한 고행에는 자신을 잘 대하는 태도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완전함은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지 완벽하고 흠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본능에 따르는 생활과 육체의 욕구는 살피지 않고 오직 금욕만을 강요한다. 그 결과 억압된 충동이 역효과를 내어 끊임없이 유혹이나 신경증의 증세로 표현된다. "그러면 노련한 의지의 곡예로 유혹을 쫓아내고, 영혼의 욕구는 무시하고, 흥분된 감정을 억압한다" 하지만 그 결과 인간은 피도 영혼도 정신도 없는 존재가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먼저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우리에게 충만한 삶을 베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말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방해하는 것과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고통을 받아들일 각오도 해야 한다.수난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삶을 즐길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앗아 가실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계속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에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태도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수 있음을 아는 것도 그리스도교의 태도이다.
등이 아파 고생하던 어떤 수녀는 그 경련이 순전히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가했던 가혹함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수녀는 비그리스도교적인 모든 생각을 자신에게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수도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감정과 격정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모든 근육을 수축해야 했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폭력적으로 자신에게서 몰아내기 위해 기도한다면,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 수녀의 태도는 폭력으로 자신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종교심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좋은 의지로 자신의 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묵주기도를 많이 바쳐야 한다는 강박감 없이, 자전거를 타고 창조물 사이를 지나면서 감사를 드리는 것도 기도라는 것을 알았다. 종교심의 이면에는 인간은 그지없이 나쁘다는 깊은 불신이 숨어 있었다. 그는 많은 것을 이행함으로써, 말하자면 되도록 많은 기도와 종교적 관습을 실천함으로써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겸손은 자신의 고유한 진리에 이르는 용기를 뜻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자신의 어둠으로 내려가 그 어두운 면고 화해하는 용기를 뜻한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 곧 호감이 가는 면과 호감이 가지 않는 면을 지닌 보통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자신의 평범함과 화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적인 것이며, 예수님의 생각일 것이다.
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 것을 방해한다.
편두통은 자기 자신을 매우 억누르거나 자신의 생각과 소망을 억압하고 있다는 표현일 수 있다.
사람들이 공격을 외면할 경우, 그 공격은 자신의 신체를 겨냥한다.
느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 및 사물과의 관계성을 상실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느끼지 못하고, 사물과도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인간은 장작을 패든가 축구를 하든가 혹은 추리영화를 봄으로써 자신의 공격성을 외부로 터뜨려 푸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카타르시스 이론이다.
아이는 각각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모든 아이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애정과 조건 없이 생존할 권리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아이는 자기 부모가 좌절을 잘 대하는 것을, 말하자면 삶에서 늘 거듭 실망했다는 이유로 나약한 아이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한다.
안식일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의 선물이다. 인간이 휴식을 기뻐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그분의 지혜로부터 나온다. 계명이 여기 이 지상에서 서로 잘 살고, 인간의 본질에 상응하는 삶을 살도록 인간을 돕고자 한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이 자신의 본질에 맞게 사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드러나도록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호소하신다. 항상 겁에 질린 채 우리 삶의 열매가 얼마만큼 익었는지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내맡긴다면, 그분께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열매가 자라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충분하게 일했는지 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지옥과 불과 어둠에 대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일러 주시려는 것은 이것이다. '네가 그렇게 거꾸로 산다면, 너 자신을 가혹하게 대한다면, 네 인생은 지옥이 될 것이고, 네 마음은 어두워지고, 공허함을 느끼고, 결국 소멸될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누어 주시고 당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신다고 믿으면, 우리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선사하셨던 가능성을 펼쳐 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때에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사라진다. 실패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인생을 감행할 수 있다. 우리가 불안한 마음이 아니라 신뢰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우리 삶은 성공한다. 즉 하느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인생을 과감하게 살아간다면,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인생을 파묻지 않는다면, 인생은 성공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신다. "인생은 내가 그대에게 말한 그대로이다. 그대의 인생을 감행하라. 그대의 인생을 스스로 살아라. 다른 사람에게 그대의 삶을 맡기지 마라."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오른손은 의식 세계를 가르키고, 왼손은 무의식 세계를 가리킨다. 일방적으로 의식적으로 살면서 모든 것을 손에 움켜쥐고, 모든 것을 스스로 행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의식에 치우쳐 계속 살아간다면, 그들의 인생은 지옥이 된다. 그들은 의식 세계를 잘라내야 한다. 그래야 무의식의 세계가 살 수 있고, 사람이 균형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나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고, 단지 의식에 치우쳐 살아갈 뿐이다. 한쪽에 치우쳐 살면 그 대가를 치른다.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기를 바란다면,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삶을 살고 나의 개인적 소명을 이행하기를 바란다면, 내 가족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내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한다.
십자가는 오히려 삶에 속한다. 나를 방해하는 것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만일 이상만을 고집하며 산다면, 삶은 경직된다. 십자가는 삶이 힘들기만 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융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바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우는 적군은 우리의 잘못과 약점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도가 지나친 일이다.
성급함과 화해한다는 것은, 먼저 성급한 상태에서 나는 무기력하지만 그것이 내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는 자신과 스스로 협정한 내적 계약을 통해서 스스로를 종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영에 따라 산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소명에 따라 사는 것이지, 외부에 의해서 곧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에 따라 산다는 뜻은 아니다. 말하자면 내면에 의해서, 곧 자신의 존엄성과 유일성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카리스마에 대한 감각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영에 따라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삶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그리스도인은 더욱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선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가장 깊은 내면의 실재에 이르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나에게만 신뢰하시고 기대하신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대를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새롭게 하신 그 사람이 되어라.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선사하셨던 새로운 가능성을 살아가라.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실현에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릇된 가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오로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분명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인간은 고상하며 남을 돕기를 좋아하고 선하다'는 그리스인들이 계획했던 인간의 모습을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상은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일치한다. 우리가 그 이상에 따라 살면, 우리의 품위를 발견하고, 우리의 인간성에 대해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셨던 가능성, 곧 고상하고 의롭고 정결하게 살고,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통해 드러나도록 살 수 있는 그 가능성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하지 마라'와 '하라'는 규범을 두려워하며 고수하는 것은 항상 인간 안에 있는 불신의 표현이다. 그리고 불신 속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매우 가혹하게 대한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외부의 지시만을 받으며 외부에 의해 조정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등한시하며 산다.
우리의 사명은 어떤 규범에 응하고 자신을 많은 계명의 종으로 만드는 데에 있지 않고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데에 그러니까 우리의 인간 존재와 본질에 상응하게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게 사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는 교육자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고,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힘과 능력을 주시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세상의 세력에서 해방하고, 욕망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기도와 일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 리듬이 인간에게 유익하다.
현명한 노사부는 사람이 지나치니 고행을 하며 자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잘 대하라고, 곧 자신에게 유익한 기준을 발견하라고 가르친다.
'나는 젊은이들을 전적으로 지지하네. 헛된 명예에 관심을 가지고 나태해지지 않는 것도 젊은이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네. 실제로 헛된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칭송을 받을 것을 고려하여, 틀림없이 행동을 조심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실천해야 하고, 사랑을 얻어야 하고, 반대를 견디어 내야 할 것이네. 이런 식으로 견디어 낸 후에 하느님의 은총이 긍에게 내리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그 젊은이는 듣는다네. '왜 그대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고되게 일하느냐?' 그제서야 그는 더 이상 인간적 명예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명예를 중요시하라는 권유를 따르게 될 것이라네.'
지금 모든 동기가 과연 순수한가에 대해 번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도움을 베풀면 우리에게도 무언가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때 우리가 뭇사람에게 드러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적인 선이시다.
우리는 모든 행동에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있음을 알면서도,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려고 노력하는 겸손은 풍부한 열매를 맺는다. 반면에 엄격주의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굶어 죽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잘 대할 수 있기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을 잘 대해야 하고,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단죄하지 않은 채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관건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무리하게 요구하고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만 계획하셨던 유일한 삶을 살려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자아 곧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고유한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인 내 영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해 많은 상징으로 내 모습을 보여 주시기 때문에, 꿈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잘 대한다는 것은 나를 방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어둠과 화해하고 나의 내적 모순을 긍정할 각오가 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아들러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삶에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으로 아이를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 수단은 사랑이다. 모든 아이가 각각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모든 형제자매에게 똑같이 사랑이 분배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아이는 자신을 잘 대한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
초인격 심리학에서는 비동일화를 통하여 화해의 길에 이른다. 나의 분노, 불안, 죄, 실수 등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본다. "나는 분노한다. 그러나 내가 나의 분노 자체는 아니다. 나는 실수한다. 그러나 내가 나의 실수 자체는 아니다. 나는 죄를 짓는다. 그러나 내가 내 죄 자체는 아니다." 나에게는 이러한 감정이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 있고, 거기에서 나는 나의 참된 자아를 만난다. 나는 난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상대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화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불안, 예민함, 약함 등을 제압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나의 과제는 내 안에 있는 공간,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머무시고 그러한 감정과 문제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러면 나는 내가 싸워야 하는 모든 격정이 나를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의 모든 심리학파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의 삶과 화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여긴다. 그 원칙은,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평가하거나 단죄하지 않은 채 바라보는 것이며, 각각의 고유한 삶의 역사를 배경 삼아 자신의 가치와 삶의 위치를 발견하고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영적 동반은 심리 치료를 넘어서서, 하느님께서 개인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그 사람을 어떻게 이끄셨고, 무슨 목적으로 부르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다룬다. 영적 동반에서 개인은 자신의 길을 발견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마련하신 고유한 계획을 깨달아야 한다. 영성생활의 목적은 하느님께서 주신 내 소명에 맞게 사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본질, 참된 자아에 일치하여 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신을 잘 대하는 것을 뜻하며, 더 이상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본성에 일치하여, 삶의 어떤 영역을 더 이상 죽이지 않고 통합하면서 사는 것을 뜻한다.
고행의 본래 의미는, 참된 인간이 되는 훈련을 뜻하며 성공적인 삶에 필요한 숙련에 다다르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으로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한다. 건전한 고행은 인간존재에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그 즐거움은,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만드신 본래의 내가 되어 가는 즐거움이다.
내가 모든 욕구에 응하게 되면, 내 안에선느 나에 관한 실망과 분노가 자란다. 이로 인해 나 자신을 아프게 한다. 이러한 일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에 관하여 비참한 생각을 갖는다.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성향이 커진다.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자신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공격적으로 대하게 된다.
브래드쇼는 규율을 고유한 인간됨에 이르는 긍정적인 길로 본다. "우리가 아이들을 훈육시킨다면, 그들에게 생산적이고 사랑이 가득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스콧 펙은 규율이 삶의 고통을 덜어 주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는 것을 배우고, 충동을 지체시키는 것과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도 배운다. 그리고 우리는 책임 의식이 각인되어 있는 삶이 더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을 배운다."
문제의 관건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규율, 말하자면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수동적으로 살아지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나에게 주는 규율을 익히는 것이다.
화해한다는 것은 내가 온전히 나에게 머무르는 것, 내가 나 자신을 느끼는 것,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뜻한다.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 유일한 존재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오직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화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나 자신을 만난다며, 나는 스스로에게 비교하지 못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이 아예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삶의 신비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상처와 친숙해져야 하고, 상처에 '입을 맞추어야'하고, 상처를 잘 대해야 한다. 이럴 경우 상처는 새로운 삶의 원천으로 변화될 수 있다.
자신의 배반을 자비롭게 대하기 위해서는 자비로워지는 훈련을 오랫동안 해야 한다. 그때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고 나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 이 기도를 드린다. 그러면 나는 부정적인 기분이 서서히 변화되는 것을 감지한다. 이러한 기분을 피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부정적인 기분을 단지 다른 차원으로 밀어내는 것일 뿐, 무력화시키지 못하기에 다시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게 한다. 이런 경우 도움이 되는 것은, 떠오르는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생각을 하느님 앞에서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다. 혹은 이러한 생각과 기분일 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드린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온화한 방법이지만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가 찾아들어오는 것을 충분히 체험할 수 있다.
경건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응답하는 태도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외적 형태도 필요하다. 기도, 전례, 의식, 고요한 시간, 묵상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기도와 묵상 등을 실행하되, 최상이나 최고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한 정도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일미사 참례는 사람에게 부과된 짐이 결코 아니다. 한 주에 한 번 일상적인 리듬을 깨고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에게 유익하다.
의식은 자기 자신을 잘 대하는 형식이다. 나는 나 자신을 주의 깊게 그리고 신중하게 대하고, 지금 이 순간과 삶을 기뻐한다.
종교적 의무가 우리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우리가 종교적 의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공로에대한 생각이 우리의 경건함에 슬쩍 끼어드는 일이 늘 반복된다. 그것도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함께 불러일으키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더 기도할 수 있고 더 묵상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은 순수한 경건함을 위한 훌륭한 조언자가 아니다. 기도로 오직 양심의 가책만을 달래려는 사람은 결코 평온에 이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가혹하게 대한다.
나는 어떤 업적과 기도로 하느님을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내가 기도하는 까닭은 내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느끼고 그 갈망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내 삶을 그분께 맞추고 싶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나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을 뜻한다. 자기 자신만을 맴도는 사람의 삶은 정체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펼칠 수 있는 목표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어떤 일에 참여하는 것,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하기 위해서 한번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여기에는 이기주의적인 동기조차도 허용될 수 있다. 나도 무엇인가를 돌려받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완전히 사심이 없는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오히려 이웃을 잔인하게 대한다.
그릇된 동기가 이웃 사랑을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다는 순수한 두려움 때문에 이웃 사랑을 오히려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부족한 모습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삶은 생기를 잃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잘 대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도울 수 있을 때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스스로 빼앗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돕기 위해 나 자신과 나의 소망들을 진정으로 내려놓으면, 나는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손님이 나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또 손님으로 인한 온갖 방해를 생각하지 않은 채 손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손님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확보해 놓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줄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행복을 누리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잘 대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만을 맴돌지 않고, 바깥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자신의 일에 헌신하고, 자신의 손이나 생각을 통해 얻은 것에서 기쁨을 누린다.
스트레스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 대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스트레스는 세 가지 원인에서 생긴다. 첫째는 일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내적 태도 때문이다. 자기 자신 안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셋째 원인은 개인이 일에 관하여 지니고 있는 내적인 반항심일 수 있다. 자신은 본래 다른 일을 위해 태어났다든지, 더 나은 동료들을 만났어야 했다든지, 노동은 원래 의미가 없고 지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사람은 내적인 거부와 더불어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늘 자신이 지쳐 있다고 느낀다.
사물을 신중하게 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조심스럽게 대할 것이다. 따라서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한 인간의 내적 태도를 알아보는 기준이 된다. 그 태도에서 그의 영혼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베네딕토 자신과 내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사물을 대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대한다. 그가 세상을 친구로 생각하고 다정하게 대하면, 세상도 그를 다정하게 대한다. 세상이 그 자신의 한 부분이 된다. 내적 일치가 생기고, 서로에게 기쁨이 된다. 오늘날 피조물을 잘 대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과제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조화롭기를 바란다면, 사회 전체가 피조물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조심스럽게 대할 수 있기 위해 사물을 신중하게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은 유익하다. 내 방과 내 옷과 내 물건을 잘 대할수록 그만큼 나는 나 자신을 잘 대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사물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면, 그와 함께 마음의 섬세한 움직임에 대한 감각도 둔해질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잘 대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을 평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인정하고, 나아가 그 잘못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잘못에만 머물기보다는 우리의 잘못을 자비롭게 대하시며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느님을 더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할 수는 없다. 오히려 또 다시 실수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만이 죄 때문에 우리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없고, 같은 잘못을 또다시 범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늘 다시 죄에 떨어진다. 이러한 사실과 화해하는 것이 겸손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의 이상이 내 앞에서 무너지면, 나는 이것을 매우 큰 고통으로 체험한다. 그러나 겸손은 자유와 신뢰를 동시에 느끼도록 우리를 이끈다. 나는 내 잘못을 늘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단순히 잊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내 잘못을 용서하셨고 이미 잊어버리셨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잘못 때문에 늘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 잘못에 주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잘못을 반드시 바라보고, 인정하고, 처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잘못을 놓아버려야 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면,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반복하여 내 잘못을 비난하고 나 자신을 모욕함으로써 내 삶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희생 제물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의무의 제단에 우리 자신을 바치거나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자비를 뜻하는 '라하밈'은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을 표현한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자비로우시다. 나 자신에게 어머니 노릇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격노하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나의 내적 아이가 나의 모태와 하느님의 모태에서 성숙해질 수 있고, 또 하느님께서 원하신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자비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온유와 자비와 사랑의 내적 공간과 맞닿는 것을 의미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내 안에 거주하시는 곳에서 나는 치유될 수 있고, 나의 자기비난과 자책감은 그 힘을 잃는다. 그곳에서 나는 참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지금 내 모습대로 있어도 된다.
자비의 두 번째 개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그리스어로는 보통 '엘레오스'이다. 구약성경에서 헤세드는 하느님의 은총,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태도,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할 수 있다. 하느님의 측은지심은 항상 당신의 진노를 이긴다. 신약성경에서 엘레오스는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사람이 사람에게 취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상호 간에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는 자비"를 뜻한다. 엘레오스의 뜻에서 우리 자신을 자비롭게 대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온화하고 다정하게 잘 대하는 것을 뜻한다.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을 편들고 우리 자신에게 충실하고 다른 사람을 표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엘레오스는 종종 측은지심과 용서를 뜻하기도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자비를 나타내는 세 번째 단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스플랑크논'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내장'이다. 내장은 사람 안에서 상처받기 쉬운 감정이 있는 장소를 나타낸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사람과 함께 느끼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사람들과 함께 느끼신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시고, 사람들이 당신 곁으로, 아니 상처받기 쉬운 감정이 있는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하신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모욕과 상처를 느낀다면 내 안에 있는 상처 입은 아이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마음을 열면 나는 나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탐구하려는 객관적 시각으로 나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공감하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나의 실수와 약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공감하고 그것을 향한다. 약함과 실수는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랑스런 눈길 속에서 그것은 변화될 수 있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상처받기 쉬운 감정이 있는 내 안의 장소와 만나는 것, 그러니까 내가 나의 상처를 허용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상처받기 쉬운 나의 감정이 있는 곳에서 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아주 가까이 있다. 그곳에서 나의 상처는 하느님의 자비로 치유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다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나의 이성으로 깨닫는 것보다도 더 많이 깨닫는다.
자비를 나타내는 네 번째 단어는 '오이크티르모스'이다. 이 단어는 동정심을 표현한다. 곧 아픔에 사로잡힌 상태와 도움을 베풀 각오가 되어 있는 측은지심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동정심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원수에게 가혹하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동정해야 한다. 악과 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항상 반복하여 넘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동정심은 우리를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든다. 우리를 하느님의 마음에 가까이 데려가는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의 약함과 우리 주변 사람에게 갖는 동정심이다. 참된 측은지심에서, 우리는 사랑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본질을 감지한다.
나 자신을 자비롭게 대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불행하고 고독한 것, 내 안에 있는 가난하고 비참한 것, 내 안에 있는 불행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버림받은 느낌과 외로운 느낌 등에 자신의 마음을 닫지 않는 것을 뜻한다. 나는 내 안에 있는 동정을 받아야 하는 것, 내가 가장 외면하고 몰아내고 싶은 것에 대해 내 마음을 닫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에게는 버림받았다는 그러한 느낌이 때때로 솟아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몰아내려고만 한다. 그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고독과 버림받음, 우리의 비참함과 두려움은 변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불길한 느낌에서 끊임없이 도망친다. 만일 우리가 내 안에 있는 가난한 것과 나약한 것을 진심으로 대하면, 내 안에 있는 가난한 것은 바로 축복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나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마음을 열 수 있다. 하느님은 나와 함께 느끼시고 나에게 마음을 두고 계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항상 유효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사랑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라고 요구하신다. 말하자면 소유와 사람에게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의 삶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자비 안에서 나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마음을 깨닫고, 거기에서 나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호의를 체험할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가 우리의 삶에서도, 곧 우리가 이웃을 자비롭게 대하는 일에서, 아울러 우리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는 데에서도 드러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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