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고은과 5강 지중해의 문학을 읽으며 박웅현의 시선이 나랑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보다 훨씬 깊고 넓다. 나는 그저 지금까지 아는 것을 토대로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박웅현의 독법은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여유있게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그동안 내가 보고 느꼈지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박웅현을 통해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제 이 책의 가치를 알겠다. 왜 그리도 인기가 있었고 지금껏 계속 읽혀지는지....
4강 고은의 낭만에 취하다
4월30일 /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 무슨 미움이겠는가
이 시를 보면서 문득 후배가 써준 한 줄의 글이 떠올랐어요. "자연은 한 번도 예술을 동경한 적이 없다." 예술을 동경하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 예술적인 게 자연이니까요. 이런 시들을 통해 보이는 삶의 태도는 또한 제가 참 배우고 싶고, 배우기도 한 부분인데 세상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는, 우리도 하나의 과객일 뿐이라는 시선이 존경스럽습니다.
소쩍새가 온몸으로 우는 동안 / 별들도 온몸으로 빛나고 있다 / 이런 세상에 내가 버젓이 누워 잠을 청한다
제가 제일기획에서 지금의 TBWA로 회사를 옮길 때 후배들이 기념패에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라는 문장을 새겨줬습니다. 한 회사에 십칠 년간 근무하면서 소파가 너무 편해 몸이 내려앉는 것 같아서 나오기로 했는데, 그동안 쌓아온 것을 다 버리고 나가는 걸 안 후배들이 써준 문장이에요.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가 / 닿은 곳에서 /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 // 이렇게 시작해보거라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말하죠. 익숙한 것을 두려워하라고. 땅버들 씨앗 같은 삶의 태도로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우리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내 마음대로 직조할 수 없어요. 시대라는 씨줄과 내 의지라는 날줄이 맞아야 해요.내가 아무리 날줄을 잘 세운다고 해도 씨줄이 너무 세게 밀고 들어오면 휘게 되어 있어요. 살다보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아요.급한 물이 밀려올 때가 있죠. 그럼 타야지 어쩌겠어요. 그러고 나서 결국 어딘가에 닿았어요. 사실 나는 거기에 닿고 싶지 않았는데, 아래쪽으로 3미터쯤 더 가고 싶었는데 그 지점에 가지 못하고 닿았단 말이죠. 그럼 어쩌겠어요. 땅버들 씨앗처럼 거기서 최선을 다해 싹을 튀워야죠.
무욕만 한 탐욕 없습니다 / 그것 말고 / 강호 제군의 / 고만고만한 욕망 / 그것들이 /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진리입니다 // 자 건배
무욕이야말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대단한 것이죠. 가장 대단한 욕심이 무욕인 것 같아요.
<크루소와 방드르디, 가치관을 바꾸다>
[로빈스 크루소]는 서구가 아프리카나 미개하다고 보이는 지역에 가서 하는 행태를 상징적으로 어느 섬에서 일어나는 일로 구성한 겁니다. 문명화된 한 사람이 불모의 땅인 섬에 들어가서 질서를 만들기 시작해요. 하느님의 계시를 전하기 시작하고요. 흐트러져 있던 것을 정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로빈스 크루소]의 커다란 줄거리입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배는 난파하고 섬에 도착한 크루소는 문화를 시도해요. 하지만 결국 다 포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죠. 그런데 이때 크루소는 절망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서면서 평안함을 느끼는데 이에 대한 투르니에의 묘사에서 지극히 동양사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메트로놈의 시계가 멈추면서 보잘것없는 걱정들에 가려져 있었던 섬을 뒤로하니 신선하고 따뜻하고 우정에 찬 섬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오늘에 만족하며 사는 자연과 같은 상태, 그러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해주는데, 그게 동양적이고 장자적이고 자연 중심의 가치관입니다. 자기중심, 인간중심으로 세상을 살던 로빈스 크로소는 자연으로 편입되면 된다고 생각하고 보니 모든 걱정들이 보잘것없는 것이었어요.
크루소가 인간 중심의 가축을 기르고 밭을 구획하는 것들을 그만두고 휴가를 줬더니 풀과 가축, 모든 생명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죠. 어떤 생명도 자신 이외의 존재 이유는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존재 이유를 무시하고 우리를 위한 목표점을 세워요. 어느 순간 신과 같은 마음이 되는거죠.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만 존재하면 돼요. 다른 어떤 피조물도 관계없이.
'야생의 상태로 되돌아간 염소들은 이제 인간들에게 강제로 사육되는동안 강요받았던 무질서 속에 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가장 힘세고 똑똑한 염소들이 지배하는, 계통과 서열이 확실한 무리로 나누어졌다.'
고은은 처음 유홍준의 말을 빌려 소개했듯 민족주의, 사실주의, 낭만주의가 한 몸으로 육화되어 말을 던지는 시인입니다. 알면 알수록 삶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고 또 밀도 있는 진짜 낭만을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5강.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내 생명이 계속해서 날아가고 있어요. 내가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흘러가게 되어 있고, 어느 날엔 손안의 가는 모래처럼 다 사라질 거예요. 그리고 죽어 있을 거예요. 잡을 방법은 없어요. 그러니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슬퍼하지 말고 그 순간순간을 즐기라는 겁니다. 어차피 결과는 같아요. 빠져나가고 있는데 어떻게 하느냐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과 오늘을 즐기는 사람을 비교했을 때 후자가 답이라는 겁니다.
우리 팀에는 두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째는 '모든 사생활은 모든 공무에 우선한다'이고 둘째는 '모든 술자리는 모든 회의에 우선한다'입니다.
사람들의 사고를 형성하는데 날씨는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우중충한 날이 많은 스코틀랜드는 주로 집 안에 있다보니 아마 생각이 많아져서 사상들이 많은 것같아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아마도 영국 북쪽의 스산한 날씨 영향을 받았을 테고, 남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좋은 그림이 많은 건 좋은 햇빛을 모르는 척 못하고 이젤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지중해는 햇살을 빼고는 얘기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지중해는 견딜 수 없는 햇살과 함께하는 곳입니다. 어쩔 수 없게 만드는 화창한 날씨의 연속인 곳이에요. 흔히 지중해성 기후라고 하는데 내리쬐는 햇살 덕에 기온은 높지만 습도가 낮아 굉장히 쾌적합니다. 더운 날씨지만 전혀 짜증스럽지 않죠.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니 그곳 사람들은 아등바등할 일이 없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생을 바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바로 지중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삶이 없어진다는 것이 누구보다 슬픈 사람들입니다. 그 찬란한 축복의 나날이 사라지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순간을 즐기며 삽니다. 오늘 하루의 햇살을 소중하게 여기면서요.
네덜란드 출신인 고흐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입니다. 부질없는 사후의 성공을 제외한다면, 살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이죠. 그는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하고, 자기 그림을 팔아 1백 프랑을 벌어보겠다는 꿈도 평생 이루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데요. 김화영은 그런 그가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를로 가서 그린 <아를의 고흐의 방>이나 <해바라기> 같은 그림들은 모두 행복의 충격을 그려낸 것들이 아닐까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고흐와 똑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책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언제나 승리하는 말없는 자연의 돌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약 내가 성공했네, 위대하네 하더라도 불과 오십 년 후면 없어질 거예요. 흙 속에서 돌아갈 겁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씨앗으로 가지고 있죠. 하지만 돌은 죽지 않아요. 살아 있는 생명에 말 없는 돌이 승리하는 겁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자연을 이길 방법은 없다는 것, 그럼에도 지금의 삶이 부정할 수 없는 축복이에요. 부조리한 순간이죠. 축복을 즐겨야 하는데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죽음이 떠오르고 그러면서도 삶의 희열을 느끼는. 그러니까 방법은 하나, 순간순간을 온전히 씹어먹는 것뿐이에요. 지중해에서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없고 나는 결국 죽을 것이니 계속 슬퍼하는 비극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총망중의 도시 속으로도 문득 봄은 오고, 빈틈없는 시간표 사이로도 문득 구멍이 뚫리면 때로 창문이 보인다. 꿈의 창문이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꿈의 창문을 열지 못하고 찬란한 순간들을 놓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곧 사라져갈 것이라는 걸 까맣게 잊은 채.
지중해에 산다고 칩시다. 햇살 가득한 하루가 축복이었어요. 그런데 해가 지면 불현듯 슬픔이 찾아옵니다. 죽음에 대한 예고처럼요. 해가 지는 것처럼 언젠가 죽음이 온다는 기이한 슬픔이 밀려들어요.
시인 황지우 는 인도를 "무능이 죄가 되지 않고, 인생을 한 번쯤 되돌릴 수 있는 그 곳"
인도는 가보면 아시겠지만 현세가 중요치 않은 곳입니다. '인도를 다녀와서야 비로소 나는 '꿈'이라는 말의 참다운 규모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요즘 나는 꿈이 인도의 은유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호사와 굶주림의 공존을 그들은 떳떳이 전시하는 듯 하다. 그 엄청나고 태연한 가난.'
우리처럼 숨기거나 아쉬워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그냥 '존재'하는 가난이었어요. 사회적인 정의, 부의 분배, 이런 따분한 이론이 필요 없는, 호사와 굶주림이 떳떳하게 공존하는 곳 인도. 이생의 삶이 전부가 아닌 곳이 바로 인도라는 것이죠.
'여행지에서 그렇게 만났다가 그렇게 떠나 보낸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 일생이 한갓 여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행길에서 우리는 이별 연습을 한다. 삶은 이별의 연습이다. 세상에서 마지막 보게 될 얼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한 떨기 빛. 여행은 우리의 삶이 그리움인 것을 가르쳐준다.'
그곳에 갈때마다 느끼는 것이 엑상프로방스의 사람들은 파리를 동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지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비극은 모두가 서울을 동경하는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을 향해 사는 것과는 다르게, 엑상프로방스 사람들은 오히려 파리에 사는 사람들을 동정합니다. 자연의 축복을 느끼지 못하고 바쁘게만 살아가는 안쓰러운 사람들, 그게 파리지앵을 보는 그들의 시선이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땅에 살고 있는, 현재가 행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창의력이라는 건 무심히 보지 않고 경탄하면서 보는 것이죠. 집중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겁니다. 앙드레 지드는 시인의 재능이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자두를 보고, 수박을 보고, 사과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 우리는 순간에 찍히는 사진과 같은 생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생의 각 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과 바꿔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때로는 오직 그 순간에만 온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레마르크의 [개선문] 같은 작품들이 생각의 수면 밑에 잠재되어 제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행동은 제 판단의 축을 흔들었고, [개선문]의 주인공 라비크가 추구하던 삶의 행태, 즉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좋지만, 내가 기분 좋으면 팁 줄 정도의 경제력을 갖고, 큰 욕심 없이 작은 정의를 놓치지 않는 삶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리스인 조리바]에서 조르바의 성향을 찬찬히 살피면서, '아 나는 지중해성 사고방식을 갖고 있구나' 느끼게 됐습니다.
조르바의 삶의 모습이 지식이니과 정반대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책을 통해 그는 조르바를 "아직 자연과의 탯줄을 끊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지식인들처럼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함을 중심으로 판단을 합니다.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요.'
'개처럼 살자'입니다. 지금 꼬리치면 꼬리를 치고, 밥을 먹으면 밥을 먹고, 잠을 자면 잠만 자야지, 잠을 자면서 아까 꼬리치던 생각을 하거나 밥 먹을 궁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의 습관이 된 것들. 예사로 보아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조르바의 삶, 지식을 통해 배운 게 아니라 몸으로 체화된 삶이야말로 창의적인 삶이죠.
사람은 다 다르고, 각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우리의 욕망으로 채워넣고 제멋대로 실망하곤 다툴 필요가 없어요. 무화과나무 아래서 버찌가 열리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육신이 만족하자 영혼은 기쁨으로 전율했다.'
육신과 영혼이 다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배가 고프거나 화장실이 급하면 아무 풍경도 볼 수 없을 겁니다. 뭐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빨리 뛰어가서 육신의 고통을 해결해야죠. 그래서 육신이 만족을 해야 영혼은 기쁨으로 넘치게 되는 거라고 조르바는 말했던 것이고요. 그는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가슴으로 이해하라고 말합니다.
바다를 보거나 멋진 풍경을 봤을 때 우리가 '아!'하고 감탄사를 내뱉는 것은 자연이 말을 건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표현을 못 할 뿐이에요. 아니 표현을 못하거나 우리의 언어가 그것을 표현할 만큼 능력이 우등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또 한 번 행복이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을 깨달았다.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문장들에서 계속 반복이 되고 있는 게 뭐냐하면, 육체, 피 등 물질에 대한, 실존에 대한 존중입니다. 이게 지중해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입니다. 답은 물질과 실존, 현재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거죠. 책 속에 있지 않고 거리에 있다는 거예요.
세계 지배를 서양 쪽에서 하게 된 것은 물질과 실존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어요. 정신세계만 본 것이 아니라 과학을 존중했죠. 이 실물을 파악한 겁니다. 사실 동양이 생각의 깊이는 훨씬 깊죠. 정신의 신대륙은 우리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물질의 신대륙을 발견을 했고, 우리는 물질의 신대륙을 우습게 본 게 아닐까요? 그들은 행동으로 표현을 했어요. 가죽샌드백을 매달아 쳤고, 막대기로 공을 찼어요. 그래서 누군가 "걷지 않으면서 떠오르는 말을 믿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 말은 사기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걸을면서 실질적으로 생활하면서 떠오른 것들을 믿으라는 거죠. 어떻게 보면 영혼과 물질적인 분류가 위험한 것이라는 이야기겠죠.
[이방인]의 주인공은 뫼르소라는 남자입니다. 이 사람은 이해하기 쉽게 조르바 같은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또한 눈앞에 있는 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죠. 그래서 뫼르쇠를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짓이라는 건 단순히 진실의 반대편에 있다는 의미 뿐 아니라 과장돼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까지도 포함하죠.
햇살 찬란한 지중해에 위치한 알제에 살고 있는 뫼르소는, 현재가 전부이고 감정이나 신을 믿지 않습니다. 감정, 신, 슬픔, 도덕, 종교, 가식, 미래, 신념 같은 추상적인 것들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이방인이라 부르고 이방인이 된 뫼르소는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도 그는 담배, 해수욕, 여자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그리워합니다.
'즉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소설 [안과 겉]에서 또한 빛에 대해 언급하는데요. "이 많은 햇살을 기억에 담고 내 어찌 무의에 대고 걸 수 있으리"라고 얘기합니다. 이뜻이 무엇이냐 하면 인생은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무의미한 시간이지만, 삶의 기억 속에 그 많은 햇살이 들어가 있다면 어떻게 인생을 무의미에 걸 수 있냐는 겁니다.
'처음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나에게 가장 괴로웠던 일은, 내가 자유로운 사람의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가령 바닷가로 가서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솟곤 하는 따위인데, 발 밑의 풀에 부딪치는 첫 물결 소리, 물속에 몸을 담그는 촉감, 거기서 느끼는 해방감'
뫼르소는 그를 교화시키려 했던 목사의 말대로 "아무 희망도 안 가진채 죽으면 완전히 없어져버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 것이죠.
사르트르의 평 '스스로의 풍모에 의해서 값진 것임을 드러내 보일뿐 구태여 무엇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는 작품'
사르트르가 제시한 [이방인]에 대한 논점의 핵심은 이방인은 현재를 산다는 점이죠.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그리고 그 현재를 파편적으로 살아요. 보통 우리가 쓰는 글들은 앞의 구절을 받아서 이어가는데 [이방인]의 문장들은 그런게 없어요. 과거로부터 현재를 빌려오지 않고 미래를 담보하지 않아요. 실존적인 삶의 태도와 맞물리죠.
'각 개의 문장은 그 전의 문장들로부터 이미 얻은 힘을 이용하기를 거부하며 저마다의 문장은 항상 새로운 시작이다.'
사르트르는 [이방인]을 읽고 형식과 내용이 같이 가고 있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마치 우리가 사는 순간 순간이 개별적 광채이고 스스로 온전한 존재이듯 문장들도 하나하나가 개별적 존재이고 스스로 온전한 존재이다.'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뫼르소의 말 속에 죽은 사람처럼 살지 말고 현재를 살라는, 찬란히 부서지는 지중해의 햇살을 맞이하듯 그렇게 순간을 소중하게 살라는 외침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리고 과연, 지중해이고 카뮈다 싶습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2017-블로그시작한지1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꼭 알고 있어야 할 구글 애드센스 광고정책 (2) | 2017.04.01 |
---|---|
기초화장품의 필요성 (0) | 2017.04.01 |
부천YMCA아기스포츠단 숙제 '나만의 인형 만들기' (0) | 2017.03.31 |
[라디오]김어준의뉴스공장-노회찬(20170328) (0) | 2017.03.31 |
직장맘은 바쁘다!! (0) | 2017.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