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에서 '구분하는 생각'이 작용하면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해지지만, 그것을 내려놓는 잠심의 상태에 이르면 질병이든 건강이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고통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구분하는 생각'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잠심은 고통을 알되 고통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심 상태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객관적이며 투명하고 보편적인 유일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잠심 감각을 키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감각을 통하여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 아닌 '대상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사랑'을 하게 되며,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면서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것도 더 바라지 않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피조물에게 우리 마음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알되 그 앎이 영향을 주지 않는'상태에 머물기가 어려워집니다. 순수하게 '알되 그 앎이 영향을 주지 않는'마음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는 내적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잠심의 궁극적인 상태에서는 하느님이 자기 자신 한가운데에 살아 계심을 인식하고 느끼고 깨닫게 되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체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것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묶이지 않는 마음, 결코 자신의 것을 바라보지 않는 마음, 하느님의 가장 사랑스런 뜻에 온전히 침참하는 마음이며, 자신의 것에서 벗어나는 마음이며, 자신을 내려놓는 마음입니다.
뭔가를 원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부유한 사람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좋은 세상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수도 없고,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참 행복도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게 하는 잠심이 필요합니다. 잠심의 세상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풍요로움과 행복을 누리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은 능동적인 것이고 내가 무엇을 하려는 태도입니다. 생각을 흘러가게 놓아두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고 맡기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능동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무엇을 '함'으로써 어떤 목표를 성취하거나 쟁취하는 데 더 익숙합니다. 사랑도, 용서도, 기도도 내가 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내가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하려는 능동적인 수준에서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고, 기도하려는 능동적인 수준에서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며, 기도하게 되는 수동적인 수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 성숙에서 체득하고 습관화하고 수동적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면,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역할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거룩해지거나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됩니다.
기도는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삶은 누가 어떤 행위를 하던 그 행위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마음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입니다.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들어온 대상에 측은한 마음이 생겨 사랑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인 삶, 즉 수동과 능동의 경계를 확정할 수 없는 삶의 형태입니다.
내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내 생각대로 되면 기쁘고 내 생각대로 안 되면 화가 납니다. 분노의 감정이 깊어지면 그 분노는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내 뜻과 생각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생각대로 될 때는 즐길 줄도 알지만 안 돼도 그 안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괴로워 한다면 그것이 무질서이고, 그것을 질서 잡는다는 것은 내 뜻을 내려놓아 '기도가 되고 안 되고'에 좌우되지 않고 하느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삶의 주인이 하느님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실상 내 삶을 지배하는 주인은 나의 감정이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경우,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가족, 그리고 죽고 없는 사람들이 나의 주인으로 행세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될 때 상처받고 고통받고 분노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생각대로 살아가려는 생각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상처 받고 고통받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당신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잠심의 상태에 있게 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잡히는 삶이 아닌 부리는 삶을 살며, 상처를 입어도 적게 입고, 마음 상태도 평온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잡히는 삶을 사느냐 부리는 삶을 사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린 일이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늘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잠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무엇이든 올바른 행위가 되지만 생각의 틀을 가진 사랑은 올바른 사랑의 행위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잠심의 사랑은 에고(자아)의 사라짐을 의미하고 감사로 충만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행위가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듯' '무엇을 하는가'(외면)가 아니라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가'(내면)에 눈을 떠야 합니다. 진정한 명품은 '소유'의 의미보다 '가치'의 의미가 더 크듯이 명품 인생을 살고 싶다면 겉보다 내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겉은 수시로 변할 수 있지만 내면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심의 사랑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저 사랑을 할 뿐이고 사랑이 되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잠심의 기도는 사랑이고 사랑은 제대로 하는 기도로 향해 가는 첫걸음이며, 아무것도 구걸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단지 그것이 좋아서 할 뿐입니다.
잠심 감각이 키워지면 '만들어진 나'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인간과 사회 등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어 '내 생각대로 보는 세상'에서 '보여지는 세상'으로 바뀌게 되고 전과 다른 분위기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과 경험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앎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사랑으로, 지혜로 바뀌어야 합니다. 잠심의 실천은 사랑이고, 앞으로 할 사랑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사랑입니다.
잠심의 삶은 어딘가에 '좋아하는 일' 또는 '좋아할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현재를 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되 그 앎이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 여기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지식과 경험이 지혜로 바뀌려면 숙성 단계,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의 가난은 물질의 무소유가 아니라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물질의 노예가 아닌 물질을 부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에크하르트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진국의 풍요로움을 맛보고 돌아갔을 때 전과 똑같은 마음을 유지한다면 계속해서 행복하겠지만, 맛본 풍요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재물을 쌓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 전과 같은 행복이 있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참 행복이란 '얻고, 못 얻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얻었다거나 못 얻었다는 사실을 알되 그것이 영향을 주지 않는 상태에 있는 잠시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은 가난한 마음에서 출발하며, 가난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 생각, 비전, 거룩함,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허구 속에 살면서 그 허구가 진리인 양 믿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재물에 중독되어 있고, '만들어진 나'(생각의 틀) 속에 잠들어 있고, 허황된 것에 자기 최면이 걸려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거짓을 진실로 꾸며 반복해서 말하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면 중독이 되고 일종의 강박관념이 생기면 그것을 멈추기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허무함을 느끼면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데 그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달아나려 하는 자신을 먼저 대면해야 합니다.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는 삶이라는 막연한 목표가 아니라 정확한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목표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는 삶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돈을 소유할 때는 기꺼이 소유할 줄 알고, 측은한 마음이 동하면 어떤 사람을 위해 기꺼이 쓸 줄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잠심입니다. 결국 잠심이 되지 않을 때는 생각이 발동하게 되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오게 되어 자신이 그 돈에 영향을 받지만 잠심이 되는 사람은 생각을 내려놓기 때문에 그 돈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연습을 하되 역할 혼동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연습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역할은 이것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뿐이고, 지속적으로 연습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를 하면서 '알되 그 앎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삶'을 목표로 하고 '나는 그저 할 뿐'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나아가면 됩니다.
재물을 제대로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첫째는 외적 태도로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고, 둘째는 내적 태도로 소유물에 대한 초연함(내적인 자유)입니다.
내게 지금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합니다. 이러한 합리화가 자신을 방어하는데 도움을 줄지는 모르지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는 실패나 상처를 더 부각시키며 자신을 포장하기에 급급한 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실패나 상처를 감수하고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말입니다. '...때문에' 못 한다는 것으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겠다는 태도로 바꾸는 것이 잠심의 시작이고 '다시 태어남'의 참된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나의 태도를 하느님 중심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 이렇게 다시 태어나는 삶이어야 합니다. 물의 세례가 나를 위한 것, 내가 새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성령의 세례는 타인을 위한 것, 타인을 사랑하는 삶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죽거나 포기하는 삶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으로, 다시 시작하는 삶에서 사랑의 삶으로, 사랑의 삶에서 사랑하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면서 사랑하는 삶으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과거, 현재와 미래의 삶을 보며 계속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례입니다.
회개는 단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보면, 사고와 감정에서 변화가 생깁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낯섦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계속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 낯섦을 발견할 수 있는 관찰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잠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낯섦을 찾기보다는 익숙함을 고집하곤 합니다.
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우리는 자연 앞에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지진, 쓰나미 그리고 태풍을 단순한 재앙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지진은 내부의 뜨거움으로 불안전한 지구가 안정을 되찾으려고 지각을 움직이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지진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진을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재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의 입장에서는 안정을 찾기 위해서 지진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지구의 입장에서는 안정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 잠심에서 자연을 볼 때 자연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이며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자유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자유는 나를 변화시켜 하느님 닮은 '참 나'를 만들어 갑니다. 또한 자아실현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무능함의 극치가 아니라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전체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목숨이 중요한 줄 알지만 그것이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을 만큼 사랑을 하게 됩니다.
참된 자유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으며 명성, 칭찬, 비난 등에 집착하지 않고 단지 사랑할 뿐입니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그의 과거와 상처 받은 사건에 자꾸 맴돌게 되지만, 자유로운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며 현재의 순간 안에 있고 진리와 자유 안에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아무도 그를 좌지우지하지 못하며, 그저 그 사랑 안에 거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리는 참되고 믿어야만 하는 명제나 이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실재, 사랑의 실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내 안에 현존하실 때 사랑을 하게 되고 사랑을 하는 만큼 나 자신은 더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나만의 세계 밖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것들 안에서 얻게 되는 자유입니다. 나만의 세계밖으로 나가면 차이와 낯섦을 만나게 되는데 그 차이와 낯섬을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극복할 것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참된 자유는 잠심을 통해서 상대와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드러나며,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고 성찰하면서 비판적인 것들을 수용하여 그 속에서 선택과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하는 말에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닌 독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딪힘이 없고, 차이가 없는 곳에 가는 것을 여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란 능동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조건에서 능동성을 발휘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잠심의 상태에서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상대방과 대화할 때 내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말하는 능동성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주제가 나와도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달렸으며,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하고, 제약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의 제한이라는 차이를 경험하게 될 때, 즉 부여받은 조건에서 자신이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참 행복'은 원인이 없습니다. 누구도, 무엇도, 어떤 일도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할 때, 그때 비로소 당신에게 행복은 찾아올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진정한 일치는 하느님과 나 사이에 어떠한 장애도 없는, 즉 모든 필터가 제거된 상태에서 가능합니다. 그 필터는 '만들어진 나'에 의한 생각, 욕망, 욕심, 집착, 고정관념, 방식, 이념, 가치관, 과거의 경험들, 종교관, 하느님에 관한 속성이나 관념 그리고 체험 등과 같은 것입니다.
필터가 있는 상태에서 하는 행위나 필터를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의 행위는 사랑을, 용서를 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안 되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용서가 안 되지만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상태입니다. 반면에 필터가 없는 상태에서는, 사랑하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용서하는 또는 용서가 되는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필터를 제거하려고 노력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실습하여 필터로부터 점점 더 해방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그만큼 사랑과 용서는 자연스럽게 수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잠심을 방해하는 필터들을 없애기 위한 훈련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생각이 흘러가게 놓아두기'입니다. 이는 외부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오관을 통해 들어오는 상들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 흘러가게 놓아두기'를 잘하기 위한 훈련은 '현재에 머물기'이며, 현재에 잘 머무르기 위해 우선해야 할 중요한 실습은 '판단 중지'입니다. 잠심이란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판단을 중지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일이나 인간관계가 내 생각이나 내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미래에 잡히면 상상 속에 살게 되고, 과거에 잡히면 현재의 순간을 놓치게 됩니다. 결국 현재에 머문다는 것은 미래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현재의 순간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들어진 나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나'는 사물, 지식, 관념, 행위와 같은 것에 붙잡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만들어진 나'에 붙잡혀 있으면, 문제가 있을 때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해결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앎(지식)이 '만들어진 나(생각의 틀)'라는 필터를 만들기 때문에 한계를 가지지만, 그 '생각의 틀'을 정화할 수 있는 내적 힘을 기른다면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만들어진 나'로부터 해방되는 잠심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 '세 가지 훈련'이 중요합니다. 첫째는 객관화하여 보는 것, 즉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감정의 뿌리를 찾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감정의 뿌리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객관화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새로 맛 들이게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객관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고, 기도하는 동안 잠심하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객관화를 통하여 마음을 세상 가운데 두면서도 하느님을 놓치지 않고 내면의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객관화 훈련은 우리가 사물을 접하면서도 영혼이 분산되어 해체되는 자아상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주시하고 다잡는 일을 말합니다. 이 객관화는 한적한 곳에서 일체의 생각을 멈추고 활동을 중지하는 특별한 수행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서 마음의 중심 혹은 내면을 잃지 않도록 하는 마음의 훈련입니다.
제대로 보려면 내 판단을 중지하고 상대방의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작할 때는 목표를 세워 그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그다음 단계는 그 목표를 놓으려고 하고, 마지막 단계는 그 목표가 사라지는 것 즉 목표를 알면서 목표가 나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잠심입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나중에는 노력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자연스러워집니다.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기껏 소리의 울림만을 알 뿐이지만 마음까지 내려놓고 그것을 넘어 가슴으로 들을 때 비로소 타인과 제대로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단면적이어서 한쪽에 대해서 잘못된 편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우리 자신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나의 전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나 자신이 나에 대한 가장 심한 편견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내 식으로 보는 나, 내 식으로 보는 하느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같은 상황에서도 이렇게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은, 각자가 '만들어진 나'의 방법대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알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내려놓을 때만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지금 접시를 닦고 있다면 이때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생각은 내려놓고 오직 접시 닦고 있는 나를 보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접시를 닦으면서 '얘들이 좀 깨끗이 먹지, 왜 늘 이모양이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지금 보고 있는 풍경으로 바꾸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다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임입니다. 이 받아들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확신'하여 알아듣게 되는 것이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이고, 이것이 기도 속에서의 잠심입니다. 우리는 이 감각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잠심 상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상태로서 '만들어진 나'에 의해서 생긴 나의 견고한 틀, 선입견, 고정관념 등에 갇혀 있지 않고,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내적 자유를 누리며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잠심 상태에서 일을 하게 되면 일을 한다는 능동적인 생각이 들지 않고 일이 되어진다는 수동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잠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신을 내세우게 되지만 잠심이 되면 자신을 내세우는 의도적인 면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과 의지가 매우 약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잠심은 변함이 없는 항구함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도 항구함을 확보하고 유지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잠심은 인간이 변할 줄 알면서 그 변함에서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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