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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블로그시작한지1년

임경선의 '나의 남자'

키득거리며 웃고 싶어서 임경선의 책 2권을 주문했다. 당연히 에세이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소설이어서 조금 당황했었다.
임경선이 바라는 남자는 어떤 모습일지...읽을수록 나 또한 한지운 작가의 입장에서 성현을 바라보게 되었다. 성현은 참 매력적이다. 실제로 성현의 까페와 같은 공간이 있다면 나도 그 장소를 사랑했을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지운과 성현이 좀 비겁해보인다. 모두에게 상처주지 않는 그들만의 사랑이라고 미화하기엔 나는 지운처럼은 못 할 것 같다. 메디슨카운티의 사랑을 보고 그들의 사랑에는 위대함을 느꼈다. 3일간의 짧은 사랑,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혼자 간직한 채 현실에 충실한 모습들이 참 대단해보였다. 그러기에 '나의 남자' 속 성현도 자신에게 질척대지 않을 엄마로서 충실한 유부녀인 지운에게 한걸음 다가선 것이 이혼하지 않을 여자여서가 아닐까 싶다. 지운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여자로서의 자신이 너무나 소중해서 인간적인 예의나 도리를 저버린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나는 3년동안 남편과 그렇게도 싸우면서 정말 다시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남자를 꿈꿔본 적이 없기에...평생 일탈이란 걸 꿈꿔보지 않은 내가 비정상인가 싶기도 하다.

<책속의 글>
주인이 만들어낸 섬세하다 못해 예민한 공기가 보기보다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그 배타성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소속감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독립적이니 전혀 걱정할 일이 없었다.
나의 결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배우자가 둔감하다는 것이고, 설사 그 결핍을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도 이해조차 못해준다면 더욱 절망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부는 서로에게 점점 익숙해지고 편해지므로 굳이 솔직하기까지 해서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그렇게 가면을 쓰고 자연스럽게 살아왔다는 것을 본인들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그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은 '하는'게 아니라 '빠지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이 있었다. 배우자가 있음에도 연애를 하는 것은 감기에 걸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담긴 문제였다. 그들은 그 관계를 지속하기로 직접 '선택'한 것이고 그것은 전혀 '불가항력'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연애하기로 했으면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 고백을 한다는 것은 그 순간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연애 상대와 상담 상대를 위험에 빠뜨리는 짓이다.
자신이 그 순간 위로받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위태롭게 할 가능성은 사전에 차단해야 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속죄였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제멋대로지만 그래도 그 이기적인 행동에 책임을 지려 하기 때문에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불안함과 찜찜함이 마음을 좀 먹더라도 그 비밀을 무덤에 갖고 갈 때까지 '혼자' 짊어지고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상담자 본인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다 못해 잔인한 것은 자신의 외도 사실을 배우자에게 고백하는 일이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의 미덕은 이때만큼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상대를 깊은 혼란과 좌절 상태에 빠지게 만들 뿐이었다.
왜 한국 남자들 중에는 '국 없으면 밥 못 먹는 남자'라는 유형이 당당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그 염분 덩어리는 만들기 쉬운 듯하면서도 재료 손질은 은근히 번거로웠다. 음식물 쓰레기도 가장 지저분한 형태로 배출되었다.
밥과 국을 말아 먹는 남편의 식습관은 내 미의식으로는 참을 수 없지만 개인의 취향이기에 존중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유치원생인 윤재가 제 아비와 똑같이 식탁에 앉자마자 무조건 국에 밥부터 호기롭게 말기 시작하는 모습을 볼 땜녀 그 섬세하지 못함에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잘못은 국에게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남편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국이라는 음식을 증오하는 것이다.
남편은 마음만 앞섰던 것인지 호탕한 가장의 선언과는 달리 막상 수족관에 가자 무리해서 가족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게 적지 않게 티가 났다. 태도가 거칠어졌고 별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냈다.
어떻게 그 나이 되도록 과일 하나 깎는 법을 모르나 싶었지만 항상 해주는 누가 옆에 있다 보면 사람은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존재가 된다.
정말 대놓고 부탁하기 미안하니까 저렇게 간접적으로 질문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화가 났다. 부탁하기 미안하면 부탁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 과일 깍는 법을 배우면 본인도 얼마든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아니면 그런 일이기 때문에 할 필요성이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화가 난 대상은 남편 이상으로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이 남자밖에 없었다.
나는 발이 땅에 닿아 있는, 살아 있는 실질적인 노동을 하는 성현이 좋았다. 그의 진지한 노동의 태도를 보노라면 뭐랄까 그가 하는 일상의 노동은 정직하고 옳아 보였다. 특히나 가만히 앉아서 머릿속만 분주하고 산만한 나의 노동에 비해서 말이다.
자기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성현이 좋았다. 고요하고 견고하게 취향과 품위를 간직한 성현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천천히 살아가는, 그리고 제법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성현이 좋았다. 세상 다른 남자들의 허세 가득한 몸짓이 눈에 보이면 보일수록,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드러낼 필요가 없는 자기충족적인 성현이 좋았다. 그는 번잡스럽고 혼잡한 세상 속에서 과묵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자상한, 사랑이 깃든 표정을 보면서 마치 내가 사랑받는 것처럼 행복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본능적이었다. 아이는 자신을 예뻐하는 어른을 귀신같이 잘 파악했다.
윤재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훌륭했다. 그는 이 '작은 손님'을 '미래의 단골손님'이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수평적으로 대했다. 아이의 페이스에 말리거나 끌려다니지 않았고, 질서를 잡아 아이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를 따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