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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블로그시작한지2년

홍성남 <새장밖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는 다르셨습니다. 사람들의 불안감을 치유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종이 아니라 벗으로 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을 우리 영혼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영혼이 티없이 맑아지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그렇지 못한 자신이 얼마나 믿던지요. 그러다가 마치 중풍환자처럼 마음이 마비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머릿속은 그저 멍하기만 했습니다.
'그래,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나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내 안의 아이가 대성통곡
지금은 제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갑니다.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암덩어리처럼 자리 잡은 불안감을 치유해주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정말 운 좋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버릴지언정 주님은 절대로 나를 미워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돌아보는 시간 역시 하느님 앞에서 석고대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죄가 우리 영혼을 불행의 길로 이끄는 잘못된 부름에서 깨어나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의 삶으로 돌아서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길임을 인정하면 성당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외부의 어떤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알려면 건강한 인생의 롤모델이 필요합니다. 가정이 정서적으로 불안한 경우, 밖에서 롤모델을 찾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요.
이런 경우는 착하다고 칭찬할 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자기 앞가림은 못하고 남의 뒤나 봐주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늘 제 옆에서 보고 계셨습니다.
머리가 허연 중노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오그라든 제 손은 팔자인 줄 알았는데, 주님은 손을 뻗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속에 스스로 만든 감옥을 직접 깨부수고 나오라는 말씀이었지요.
비로서 편안하게 해달라는 절박한 기도에 주님이 왜 응답하지 않으셨는지 이해되었습니다. 주님은 내가 당신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서기를,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실패와 좌절 안에서 더욱 굳건해지길 원하셔서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어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 없는데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으며, 나와 거리를 두실지라도 주님은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충족되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불만을 갖고 짜증을 내는 악습이 있습니다. 오히려 모자라거나 힘들 때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요.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이 귀하고, 물건이 귀하고, 시간이 귀하다는 것, 세상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몸이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귀한 은총을 얻게 됩니다.
"저는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처럼 받아주셔서 제 영혼을 치유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길바닥이고, 돌밭이고, 가시덤불입니다. 그런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길바닥이 가시덤불이 기름진 흙이 될 때까지 잘 돌보십시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
'나는 절대 그런 신부가 되지 않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그런 마음을 가질수록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보면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스스로 합리화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고요.
지금은 그냥 내 안의 가시덤불을 인정합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 숨 쉴 틈이 생기고, 더 이상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심이 덜 생깁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존재이고, 그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복도 따라온다는 이치를 주님은 역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작은 필요라도 되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것이 작은 불씨가 되어서 큰불을 만들기 때문이지요. 그저 불 꺼진 재처럼 사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지나가는 개가 오줌이나 쌀 뿐 도움을 청하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쌓이는 것은 외로움뿐이지요. 무엇이라도 좋으니 남에게 도움 되는것 하나를 장만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백팔십도 바꿔줄 것입니다.
신앙생활 믿음의 농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하느님이 마음속에 심어놓으신 씨앗을 얼마나 잘 키우는지가 핵심임을 깨달았습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알아가면 함께하는 사람들과 생명체들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저절로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믿으라고 소리치는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한다면 오히려 조용히 기도하겠지요. 여러분의 자녀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 안에 계신 분은 우리 아버지십니다"하고 매일 소리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효자다? 아니면 미친놈이네?'
주님이 야단치신 진짜 이유는, 제자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즉 자신감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지가 저리고 움직이지 못할 만큼 몸이 뻣뻣하게 굳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대개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에 불안감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뇌가 불안을 느끼면 몸의 말초 신경계의 활동이 증가하면서 여러가지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불안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런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라고, 나는 모른다고 벌러덩 누워버리듯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혹은 제자들이 불안에 시달리다 못해 배 안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흔들어 깨운 것처럼 솔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 시간이 날 때마다 산을 오르면서 몸과 마음의 힘을 키우는 것이 좋습니다.
육체적인 병에 걸렸을 때는 고통의 의미를 찾기도 하고 인생의 한계를 느끼기도 하면서 일면 정신적인 소득을 얻지만, 정신적인 병에 걸렸을 때는 아뭄것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표현해야 합니다. 마음의 근육을 충분히 사용해야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과거는 현재의 나를 알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 즉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매달려서 시간을 낭비할 일이 아니라는 것,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일은 손을 놓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는 것, 정작 신경 쓸 일은 통제 가능한 미래라는 것을 얘기해줘야 합니다. 마음이 현재에 머물러야 건강한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죄책감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감정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죄책감이 없다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죄책감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다는 것이지요. 지나친 죄책감은 심리적인 균형을 깨뜨려 다른 사람들과 건강하게 통교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특히 지나치게 혐오하는 사람이 결국 내 자아의 일부라는 사실도 이제 압니다. '내 탓이오'의 의미가 투사를 멈추라는 것임을 압니다.
지금 가장 미워하고 혐오하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일부입니다(전부는 아닙니다). 그 일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래야 내적 힘이 강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덜 분노하고,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더 노력하고 몰입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유념해야 할 점은 나에게 주어진 육체이더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의 모든 신체 부위들은 모욕적인 대우를 받거나 혹독하게 노동하면서 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병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몸이 벌이는 시위입니다.
몸을 잘 돌보아야 영혼도 건강해진다는 것을, 몸은 예민하고 대화를 원하는 존재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식사가 검소해도 몸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마음으로 먹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프면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사과합니다.
가족 중 누군가에게 병이 났다거나, 사고를 당하는 나쁜 일이 생겼을 때 당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친 사람을 병원에 데려갈 생각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거나 심지어 실신을 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지나친 책임감 때문입니다. 가족의 행복이 순전히 자신의 책임에 달려 있다는 무거운 강박관념을 갖고 있으며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자신을 비난하게 됩니다.
이때는 웃선 자기비난을 멈춰야 합니다. 그 다음 잣니을 짓누르는 강박관념들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그 일을 꼭 내가 책임져야 하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로 구분해서 마음의 짐을 줄여야 합니다.
마음이 옹색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이상하게 미운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거든 훌훌 털고 불편한 여행을 떠나십시오. 그리고 낯선 사람, 낯선 음식을 충분히 접하고 오십시오.
불안감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나 상황을 일단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적 기재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급하게 대충 일을 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어린아이가 하기 어려운 일을 얼렁뚱땅 끝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실 것을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일하십시오. 그래야 성급하게 일을 처리해 실패하는 것을 줄일 수 있습니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세속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마음의 미성숙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속은 하느님을 모시지 않는 마음의 자리입니다. 입으로는 기도해도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면 성직자의 옷으로, 수도자의 옷으로, 성물로 온몸을 감쌌어도 그 마음은 세속입니다.
공부 조금 했다고 본당에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기보다 혼자 해결하려고 잔머리를 쓰고, 잘 안 되면 짜증을 부리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머리 좋은 척 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당신 하느님이 보시기에 저는 참 재수 없는 놈이었을 겁니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잘 보이고 싶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자신의 모습에 감동 받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느님은 눈먼 이에 비유하신 겁니다.
자녀는 부모를 통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배웁니다. 하지만 늘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녀들이 그 부모에게 갖는 실제 감정은 지겨움입니다.
그런데 왜 성인이 되어서는 부모에게 연민을 느낀다고 할까요? 이는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기 위한 방어 감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위의 칭찬에 부응하다보니 실제 감정은 억압하고 자신을 연출하는 것이지요. 이런 자녀들은 말로만 효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부모는 인생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녀 앞에서 그런 감정을 무분별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모로 인정 받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기는 쉬우어도 부모 노릇 하기는 어렵습니다.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손에 잡을 수 없는 구름 기둥만 보며 여러가지 유혹에 흔들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님은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동안 견뎌온 세월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무리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자신을 잘 추스르시고, 주님께 향하는 항해의 길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가장 높은 가치에 마음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가장 높은 영적 상태가 됩니다.
또 기도는 마음을 흩뜨리는 혼란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마치 풍랑 속을 헤매는 선원들에게 빛을 비추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약해 보이지만 강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영적 체험과 몸의 건강을 원한다면 홀로 있어야 합니다. 단조로운 환경에서 홀로 지내는 시간을 가지면 영적인 힘이 생깁니다. 주님이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다 산으로 가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이 불행의 길을 갈 때 우리는 마음 아파하고 우울해합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머리로 해결해보려는 무의식적인 자만심을 버리고, 나의 힘을 넘어선 일과 마주했을 때는 무조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이면 잃을 게 많다고 생각할 때, 아이는 본래 마음과 전혀 다른 언행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삶은 자기기만이며, 결국은 사람들을 잃게 되지요. 변두리 인생으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욕구가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서 사람들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건드려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는 단호하고 까칠해야 합니다. 물론 뒷전에서 내 험담을 하고 다닐 것은 감수해야 하지요.
다른 사람의 잘못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도 어느 정도는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주님도 바르게 살기 힘들어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야단은 치셨지만 결코 버리거나 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수술을 하는 것은 저 자신이지만 그 수술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는 신의 뜻입니다. 처음에는 제 실력만 믿고 수술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의 생명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수술을 할 때 기도하기 시작했지요."
가족이나 친한 사람이 불행의 길을 갈 때 우리는 마음 아파하고 우울해합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머리로 해결해보려는 무의식적인 자만심을 버리고, 나의 힘을 넘어선 일과 마주했을 때는 무조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저는 약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우파와 좌파로 갈린 이 나라의 문제가 사실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분열적인 마음, 편집증적 콤플렉스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매일 도끼로 종교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쇳덩어리처럼 단단한 콤플렉스를 깨뜨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은 임종의 순간이 편안합니다. 평생 다듬어온 자신의 영혼만 지니고 세상을 떠나니 뒤에 남겨둔 세상에 미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낮은 수준의 가치만 추구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임종의 순간이 편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합니다. 내 손에서 멀어져가는 것들, 손에 쥐고 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임종을 편히 맞으려면 평생 마음을 다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 낯선 사람들의 모임에 끼곤 합니다. 아무 대접해주지도 않고 아무 관심 보이지 않는 상황에 저를 던져놓고 그동안 심리적 비만을 줄여보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둘러싸여 있었을 때보다 낯선 곳에 떨어졌을 때 내적으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넓어질 경우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선택의 폭이 넓을수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깁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로 씨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당은 수도원이 아니라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곳입니다. 만약 의인들을 위해 오셨다면 성당은 수도원이 되어야 할 테지만, 주님은 성당이 병자들, 죄인들을 위한 곳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인생의 성숙함은 많은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평범한 진리는 신앙생활에서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 놓인 다양한 길들을 가십시오. 그 길에서 온갖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경험들이 여러분의 내적 성장을 도울 것입니다. 너무 우아하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구정물처럼 여겨지는 감정들도 기꺼운 마음으로 맛보십시오. 그래서 둘째아들처럼 진정한 어린아이가 되길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 영역을 넓혀가면서 점점 마음이 건강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 쉰이 넘어서야 비로소 이를 깨닫고, 남은 힘을 술 마시고, 노는 데가 아니라 인생 경험을 쌓는 데, 마음 공부를 하는 데 쏟으려고 나름 노력 중입니다.(또 잘난 척)
매일의 마음공부가 내 안의 아이를 성숙하게 키워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는 주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참으로 내 사람이고, 누가 나를 망치려는 사람인지 식별되기 시작합니다. 식별의 눈이 생기는 날, 내 마음이 주님께 더 가까이 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너무 열심히, 너무 많이 하지 말고 매일 조금씩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은총이 내려질 것입니다.
결국 팔자는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인생길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가끔 팔자 탓을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고통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팔자가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도 사실은 최선의 선택에 따르는 고통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감내해내지요. 아무 노력 없이, 수월하게, 좋은 팔자를 거저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의 힘을 키우면 다가오는 어려운 날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대면하고자 하는 용기가 생깁니다. 마치 자기보다 덩치 큰 선수와 맞서려하는 작은 선수처럼 말입니다. 저도 마음의 힘을 키우기 전에 구멍에 머리만 숨기고 엉덩이를 드러낸 토끼처럼 피할 생각만 했지만 이제는 힘겨움이 예상되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역기를 듭니다. 다가오는 것들을 번쩍 들어 올려 패대기치려고요.
주님은 섬김을 이야기하십니다. 섬김이란 참으로 깊은 의미를 갖는 말이지요. 섬김이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내 안의 어두움, 내 안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통찰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보게 해주십시오. 길을 열어주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이 끝이 아닙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을 때, 바로 그때 인생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눈먼 거지처럼 소리를 치십시오. 주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 것처럼 자신을 믿으십시오.
마음공부를 하면, 마음의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주님이 보이고, 책이 보이고 또한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이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 눈뜸의 기쁨을 얻으면, 신앙생활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결국은 일이 안 되게 합니다.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들어차 늘 복잡하고, 몸과 마음은 지칠 정도인데 막상 해놓은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항상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얻습니다.
우유부단한 성격은 오랫동안 제대로 일해보지 않고, 무언가 성취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성격적 특성잉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런 사람들에게 봉사활동을 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들에게는 반드시 적은 돈이라도 벌어 오게 해야 합니다. 우유배달이라도 시켜야 하지요. 자칫 봉사활동으로 인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면서도 남을 돕는다는 명분을 주어 다시 자기기만에 빠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의 세계는 복잡하고 미묘해서 알기 어렵지만, 자기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하고 불안을 덜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거나 혹은 가정에 무언가 편하지 않은 점이 있을 때, 고민하는 대신 자신만의 작은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하시기를 권합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커다란 은총을 얻을 것입니다.
시샘과 부러움은 비슷한 듯하지만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된 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자신 역시 어떤 일에 몰두해 열심히 하는 것은 부러움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반면 시샘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게으르게 안주하면서 자신의 과거나 들먹입니다.
마음이 건강하면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솔직히 표현하고 훌훌 털어버립니다. 반면 약하면 마음속에서 감정은 마구 요동을 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마음은 병이 들어가지요.
감추기만 하면 숨겨놓은 물걸레처럼 마음속 어딘가가 썩어들어가서 주변에까지 악취를 풍깁니다.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십시오. 그리고 솔직하게 표현하십시오.
원망을 들어줄수록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로 빠져 들어가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들게 나서서 자기 인생을 변화시키느니 다른 사람들이 주는 위로를 들으며 인생을 즐기는 쪽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못 들은 척하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원망 많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자세입니다.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일할 때 편하듯이, 사랑도 내가 줄 때 더 편합니다. 준다는 것은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처 입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주는 것을 받는다는 것은 받고 싶지 않아도 받아야 할 경우가 있거나, 받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원활한 흐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병적인 상태로 빠지기 쉽습니다.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주고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들을 가르치고 싶고, 무엇인가 말해주고 싶을 때가 실은 마음이 가장 미성숙할 때입니다. 듣는 사람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른채 자기 기분에 도취도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사람의 마음이 성숙한 것일 리 없지요.
남들의 잘못이 너무나 잘 보이고, 남들에게 잔소리하고 싶을 때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공부에 게을러서라는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문제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지, 내가 바라고 기대고 싶은 아버지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으신 것은 그들이 자신의 인생,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엉뚱한 것에 소모하는 것을 막고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즐겁게 가질 수 있을까요? 우선 짜증이나 노여움이 생겼을 때는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이 좋습니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난 상태는 마치 자동차 엔진이 과열된 상태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잠시 동안이라도 뒤틀린 생각을 떨쳐버리고, 가능하면 싫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좋아하는 것을 화제로 삼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은 환경이나 외적 자극에 민감하기에 좋은 조건을 마련해주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화를 풀고 즐거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을 잘 다독여주고 달래주면 건강한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환난에 뒤이어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들이란 바로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봉쇄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만나는 사람을 만나고, 늘 하던 일을 하고, 늘 가던 곳을 가는 것이 봉쇄생활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요.
몸을 잘 돌보아야 영혼도 건강해진다는 것을, 몸은 예민하고 대화를 원하는 존재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후로 몸을 위해서 '아무거나 먹자'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식사가 검소해도 몸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마음으로 먹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프면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사과합니다.
몸은 우리 영혼이 하느님과의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하는 친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홀대해도, 아무리 아파도 절대로 곁을 떠나지 않고 늘 함께해주는 가족 같은 것입니다. 그런 몸을 지키는 것을 귀찮아하고 아무거나 먹이고 학대하는 일은으 죄입니다.
건강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만큼 그동안 혹사 당한 몸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혹시 몸에 좋지 않은 일을 한 기억이 나거든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는 잘 돌보아줄 것을 결심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육체적인 고통은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이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정신적인 학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정받지 못하고 정신적인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는 커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학대합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 자주 다치지요. 주위 사람들은 왜 그렇게 부주의하냐고 타박할 뿐 이들의 아픔을 보지 못합니다. 이는 또 다른 학대가 되어 더 심하게 다치는 결과를 낳지요. 몸을 자주 다치는 사람은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할 게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학대를 받지는 않았는지 혹은 자학하는 습관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즐거운 대화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비반하는 것은 자신이 무식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님은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루 종일 깨어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알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수많은 선택들을 합니다. 물론 행복하기 위함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것이 끝까지 행복을 줄 수 있는지, 그 결과까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순간의 만족감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지금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맞아야 할 날이 오게 마련이지요.
주님을 팔아넘기는 것이 유다에게는 왜 최선의 선택이었을까요? 유다는 아마 파랑새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지적인 면에서 뛰어날 뿐 아니라 지금처럼 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늘 제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습니다.
파랑새 콤플렉스란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 자신에게 걸맞은 장소나 자리가 따로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파랑새 콤플렉스에 걸리면 무엇을 하든 만족이 없고 겉멋 들린 삶을 살게 됩니다. 얼핏 상당히 진취적으로 보이나 이상적인 미래만 쫓다보니 현재가 부실한 것이 문제이지요. 살림은 빠듯한데 소비는 지나쳐서 빚에 쪼들리는 삶을 사는 경우가 여기 해당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무서워한다는 것은 처벌과 관련되어 있지요. 이런 행동을 하면 하느님이 나를 싫어하셔서 버리시거나 처벌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존경하는 스승을 어려워하면서도 애정을 갖는 것과 비슷합니다. 두려움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우리에게는 그림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그림자, 보고 싶지 않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림자, 꿈에 나타나는 거대하고 음습한 또 하나의 나. 주님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흔들리는 질문을 한 제자들은, 자신도 유다와 마찬가지로 스승을 팔아넘기라는 유혹을 받고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림자는 또 하나의 나로 부정할 대상이 아니라 대화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림자를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나치게 거룩하고,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훌륭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런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여러분을 망가뜨린 것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혹에 약하고 죄에 약한 존재이지요. 자신의 약함을 하느님 앞에서 드러내는 것, 자기 자신을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이며 참회입니다. 고백하는 이들을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할 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일들까지 주님께 모두 고백해 마음의 편안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육화도 부족해서 아예 당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주님을 떼어내려는 소리들이 우리의 마음을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성체를 영할 수 있는 자세는 죄짓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지은 죄가 부끄러운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마음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깨달음입니다. 자기 삶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즉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을 말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구원을 어떤 대가의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성숙한 사람은 내세의 삶의 조건에 대해 집착하지 않습니다. 단지 스승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길을 살면서 수행의 기쁨을 느낄 뿐입니다.
우리도 마음이 누더기 같아지면 수선해가면서 살면 됩니다. 개의치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당신을 세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도 용서하셨습니다.
마음이 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강한 척하는 것 뿐입니다. 그 껍질을 벗기고 나면 누구나 두려움에 떠는 내재아가 숨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약한 존재이기에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하느님이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약한 자의 기도를 하십시오. 주님 앞에 허세 부리지 말고, 초라한 마음을 드러내십시오. 병원에서 건강을 자신하는 환자가 가장 어리석듯이 하느님 앞에서 당당한 척하는 사람 역시 허세꾼에 불과합니다.
추상적인 '인간'은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지만 내 옆에 있는 구체적인 '사람'을 사랑하기는 힘든 것이 평범한 우리입니다. 내 마음의 불완전함과 나약함을 알고 나니 남들을 비난하기가 전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문제를 직면하기 싫어하고, 마음자리를 바꾸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저항이 일어납니다. 현재 상태에 안주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익숙한 것의 편안함 때문에 심리적인 게으름을 부리는 것이지요.
변화하려는 마음에 저항이 일어나는 또 다른 이유는, 기존의 것들을 실패한 것으로 여기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또 변화의 시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불안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화는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을 위한 좋은 기회입니다. 주님은 답답하고 경직된 당신 종교인들에게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심리적인 감옥 안에 사는 것에 길들여진 그들은 주님께 온갖 저항을 하고, 심지어 주님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심적 상태가 얼마나 병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감당할 만한 고통일 경우에는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고통은, 고통을 없애기 위한 노력 자체가 괴로움이 되고 인생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하느님이 왜 그냥 두시는지 그 뜻을 깊이 묵상하면서 고통을 안고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고통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지나면 밝은 끝이 있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고통스러울수록 식사를 잘하고, 운동도 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해서 잘 이겨내야 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죽을 인생입니다. 모래시계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등바등 살지만 다들 시한부 인생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수명만큼 다 살아야 합니다. 힘든 고비만 지나면, 고통을 잘 감수할 수 있는 힘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체면은 심리적으로 힘없는 사람들이 세우는 마음의 벽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남들의 이목을 의식한 나머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체면을 따지는 자신으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마음속의 경직된 부분을 풀어야 합니다. 속 뒤집기를 해야 합니다. 단단하게 굳은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굳은 땅은 삽으로 속 뒤집기를 해야 하지요.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딱딱하게 마음이 굳어 있으면 성장도 할 수 없습니다.
영성가들은 마음의 성장은 불편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속을 뒤집는 데 불편하지 않을 리 없지요.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를 거부하기 위한 변명을 합니다. 물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치아가 썩는 것은 본인의 문제이니까요.
누군가를 비판할 때 차라리 그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느껴져서입니다.
인생이 꼬이고 마음도 배배 꼬였을 때, 불행하고 절망스럽고 원망스러울 때, 세상 모든 것이 밉고 싫고 그래서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을 때, 우리 마음에는 잔인함이 깃듭니다.
잔인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마음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지요. 하루하루 자기 마음을 행복하게 만드는 훈련이야말로 가장 큰 공부가 아닌가 합니다.
편 가르기 하는 사람, 분노가 많은 사람, 자기 반성을 하지 않는 사람, 끊임없이 뒷전에서 험담을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해서 애꿎은 이들의 마음에 분노를 일게 하는 사람, 기도보다 자리를 차지하는데 연연해하는 사람, 지나치게 질투심이 많은 사람, 무슨 일이든 혼자 해결하려는 사람.....이런 이들이 마음의 병자들입니다.
'네가 그런 이릉ㄹ 해서 뭐 하려고. 네까짓 게 뭔데' 하는 가슴에 대못박는 소리는 밖에서만 들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하는 말에는 오기라도 생기지만 내 안에서 울리는 소리는 깊은 좌절감으로 밀어넣습니다. 인류 역사의 모든 수행자들이 자기 안의 저항으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낫을 잡았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라틴 격언처럼,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라'는 부처님 말씀처럼 마음공부를 할 때는 전사의 마음으로 저항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돌보는 상담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우울증 환자로 살 것인가는 나 자신의 근성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나는 날 우리는 인생을 다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공부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전쟁이기도 합니다.
고생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저 적당히 두려워하십시오. 주님도 두려워하셨습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함부로 인생길을 가지 않도록 제어하고, 그 길에서 다칠 가능성을 줄여주는 꼭 필요한 감정이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도, 두려움이 없는 것도 병입니다.
고생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두려움을 완전히 버리지는 마십시오. 특히 하느님 앞에서는.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데까지 한껏 해낸 사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또 무엇인지요. 미쳐 날뛸 것 같은 욕망도 어지러이 헤매던 온갖 상념도 텅 빈 성당 안에서는 주눅 든 듯 주춤합니다.
그 시간에 잠시 생각해봅니다. 필요 없는 곳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지 말자는 기특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반성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거나 잊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당신을 찾는다는 의미이지요.
사실 신앙은 마음의 문제가 있는 이들이 주로 찾습니다.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기 행위의 동기가 마음에 걸리거나 자기 본성이 드러날까봐 마음 졸이고,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소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이들이 사회의 도덕적 붕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적당한 죄책감은 건강한 것입니다. 죄책감이 없는 경우가 문제입니다. 입으로는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파괴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수많은 이들을 다치게 합니다.
심한 죄책감으로 인해 보속하는 마음으로 많은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도를 많이 하는데도 주님은 점점 더 멀어지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주님이 연민을 가지고 보시는 대상은 흠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상처투성이인 사람들, 마음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치유자로, 인생의 구원자로 다가오십니다.
쇼생크탈출
"죄수들은 처음에는 교도소 담장을 미워한다. 그 다음에는 익숙해지고, 오래 살다보면 그것에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교도소가 인생의 전부가 된다."
마음의 감옥에서 살고 있다면 과감하게 탈출하십시오. 그러려면 같이 길을 가는 친구를 꼭 만드십시오. 그러면 외로움도 덜고 내적인 성장도 저절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불안이란 대개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측에서 비롯되므로, 자신의 앞날과 가족들의 안위는 하느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심리치료에서는 지나치게 역할에 매달리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역할을 따라 사는 삶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신감과 사회성이 약한 사람들은 싫어도 역할을 맡아보아야 합니다. 맡아보아야 마음의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혼자서 지내지 마십시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특히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단체의 장을 기꺼운 마음으로 맡으시기 바랍ㄴ디ㅏ. 그 역할은 보약처럼 입에는 쓰지만 매우 가치 있는 무언가를 줄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떠오르는군요. 일병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아 나선다는 내용이지요. 한 사람에 대한 전체의 관심이 결국은 그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소속감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영화입니다. 사목이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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