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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블로그시작한지1년

안젤름 그륀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넘기는 것도 귀찮고 글자를 읽는 것도 귀찮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수다를 떨고 싶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살아가는 것...결국 철학, 종교로 귀결되어 버렸다. 나에겐 이런 책들이 내가 왜 어떻게 잘 살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참고서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이 조금더 이해되었다.

<책 속의 글>
자기 자신을 희생자로 느낀다는 것은, 자신은 책임에서 벗어나고 잘못을 항상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뜻한다. 희생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을 그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돕는 것, 고통을 포함한 인간의 삶 전체를 가능한 한 창조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외부에서 가한 고통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세상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 오직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세상의 권세와 타인의 권력에서 자유로운 상태, 내적 외적 강요에서 자유로운 상태이다.

 

Ⅰ.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상처 주지 않는다

1.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하나는 자기 처벌 또는 자기 경멸로서, 심하면 자기 신체를 훼손하기도 한다. 또다른 방법은 무의식적으로 유년 시절에 받은 상처가 되풀이되는 상황을 찾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를 원할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자신의 중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도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고, 아무도 그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해 스스로 형성한 표상 때문에 혼란스럽게 된다.

자신의 참된 자아에 의해 인도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각자는 유일한 존재이며 자신의 고유한 지위를 찾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연극에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역할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올바른 삶을 결정짓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그대는 그대와 함께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끼 때문에, 우리의 갈망 전체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로 향해야 한다. 그 일치는 본성에 해당된다. 본성에 따른 삶이 인간에게 어울리는 삶이다.

‘이제부터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제 생각은 당신의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께서 좋게 보시는 것을 저는 하나도 거부하지 않겠나이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를 인도하십시오. 당신 마음에 드는 옷을 제게 입혀 주십시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관찰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나는 생각에 깊이 잠기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분노를 받아들이지만, 내가 곧 내 분노는 아니다.’ 내 안에는 분노가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이러한 내적 영역은 관찰되지 않는 관찰자, 감정을 알아차리지만 그 감정과 동일화되지 않고 그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내적 증인이다.

재산, 건강, 명예처럼 내 권한 밖에 있는 것은, 내가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 나에게 권한을 행사하지 못한다. 내가 사물에 권한을 부여하는지 않는지 그 여부는, 내가 사물에 대해 만들어 놓은 표사에 달려있다.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닌 표상과 투사의 배후를 묻고, 사물과 사람을 하느님 빛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물 자체는 우리를 결코 적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물들의 거동을 종종 적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자유를 원하면서도, 살던 대로 계속 살기를 바라고, 돈도 충분히 벌고 싶고, 타인에게서 인정도 받고 싶어 한다.

내가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면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그들에게서 호평을 받는지 등에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물론 이때 나는 지혜로워야 하고, 나의 한계를 의식해야 한다. 내가 자유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내 뿌리를 하느님 안에 두고 있다는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까지 나를 지탱하는지를 나는 알아야 한다. 자유 안에서 비로소 나는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성을 체험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유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입히는 상처를 허용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일단 우리가 거절할 경우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어느 집단과 함께 할 때, 온 힘을 다해 참여하면서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며, 옳다고 느낄 경우에는 거절하는 것조차도 자유롭게 해 준다.

 

2.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글

인간의 능력은 참된 표상을 대하는 신중함과 생활방식과 관련된 올바름이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은 끝없이 많은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강해진 상태로 그 고통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아무도 자기 자신을 반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쇠약해지고 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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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자신의 내적인 집을 지은 사람은 어떤 상처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 경솔과 부패와 같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폭풍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태만 때문에 집이 무너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은, 끝없는 많은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강해진 상태로 그 고통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자기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아무도 자기 자신을 반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쇠약해지고 몰락한다.”

“그대가 그대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면, 그대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통해 고통을 겪는 경우가 아니라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주님 안에서 깨어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에서 늘 깨어 있고 분별력을 갖추어 고통스러운 모든 일을 고귀한 마음으로 견디고, 마침내 영원한 불멸의 상급에 다다르도록 하자. 영예와 권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신앙-자유에 이르는 길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하는 사람은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물에 관한 올바른 표상을 지님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상처 주는 일을 끝낸다.

신앙은 건전한 삶의 기술로,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잘 대하는 기술로 묘사된다. 실재를 올바로 바라보는 사람, 사물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기에 그에게 다른 사물들도 더 이상 상처를 입힐 수 없다.

크리소스토모는 신앙을 오직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방식 곧 건전한 삶의 기술로 여기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자기가해의 문제

내가 영적 지도 중에 자주 부딪치는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상황을 반복하여 찾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활 태도에 스스로 높은 요구와 이상을 기대하고 설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그들은 죄책감과 자기비난으로, 때로는 자기비하, 자해, 자기처벌 등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종종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고, 타인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는 자주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이때 자신의 느낌, 곧 자기 마음의 고요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타인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우리가 약간의 사랑으로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 사실과 다르다. 그 생각은 우리 스스로가 실재에 대해 만든 표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상처를 준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그릇된 표상을 만듦으로써 스스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설령 타인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러한 상처를 자기처벌과 자기비하를 통해서 더 확장시키는지, 또는 그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그 상처에서 벗어나는지 여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렇게 실재에 대한 표상을 점검하면, 우리는 상처와 거리를 두게 되고, 우리 삶의 참된 실재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상처받을 수 없는 내적 공간을 만나고, 우리 안에 있는 순수한 하느님 모상,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우리의 신성한 존엄성을 만난다.

 

Ⅲ. 성경에 나오는 자유의 인물들

불가마 속의 젊은이들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항상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 그분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 그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이 세상 임금의 권력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직장에서 우리의 상급자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우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마음껏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들의 호의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들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있다고 우리를 현혹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2. 이집트의 요셉

무언가가 우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신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겪은 위기와 실패의 의미를 발견하고, 모함과 부당한 대우 등의 의미를 깨닫는다.

감옥에서 보내는 시간은 힘들다. 시련 중에는 내적 자유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꿈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삶이 감옥에서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신성한 존엄성을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본회퍼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일을 자유에 이르는 길로 본다. 자유에 이르는 여정에서 죽음은 최고의 축제이다.

델프는 감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자유를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태도로 여긴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내적 자유의 아름다운 공간을 갖게 해 주셨다. 이것은 이 힘든 주간의 은총이며,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 준다. 자신감은 무너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실재는 나에게 서서히 더욱 가깝게 그리고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가 살고 경험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그렇게 절반만이라도, 아니 사분의 일만이라도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제 나는 겨우 인간이 되었다. 이전보다 내적으로 더 자유롭고 훨씬 더 순수하고, 더 참되고 더 실제적이다. 이제야 내 눈이 모든 차원을 보는 입체적인 시각을, 모든 전망을 보는 건강함을 지니게 되었다.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은 사라졌다.” 그는 감옥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실재에 대한 올바른 견해와 관련이 있다. 그가 실재에 대해 가졌던 그릇된 표상은 이제 사라진다. 실재 위에 드리워있던 베일을 하느님께서 친히 벗겨 내시어 그는 하느님 앞에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실재를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된다.

알프레드 델프는 인간의 자유에는 두 가지 근본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경배와 사랑이 그것이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만이 실제로 자유를 체험한다.

델프가 묘사한 자유는 무감각이 아니라, 가장 큰 곤경 한가운데에 있는, 가망이 없는 가장 짙은 어둠 한복판에 있는 내적 자유이다.

인간의 악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것은 정말 무섭다. 그러한 상처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흠집을 낸다. 상처를 입혔던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잘못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이다. 어떤 공허함을 느낄 경우, 즉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묻는다. 혹은 어떤 관계가 불편해지면 항상 그 잘못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들은 이러한 자책으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힘으로써 범인을 통해 받은 상처를 계속 이어간다.

상처는 육신과 영혼을 아프게 한다. 특히 감정의 영역이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내적 영역은 온전하고 건강하게 지속된다. 그곳으로부터,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서서히 마음을 뚫고 지나가고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

상처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숙고하다 보면, 오래된 상처들과 결별하고, 그것들을 놓아 보내면, 언젠가는 더 이상 그 상처가 쑤석거리지 않는 때가 찾아온다. 이러한 시점을 놓치면, 스스로 상처 입히는 일이 시작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을 고통과 동일시하고, 그 결과 고통과 결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익숙하기에 잘 알지만, 고통을 놓아 보낼 경우 그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통과 화해하는 동시에 그것을 놓차 보내고,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과감히 내딛으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기 상처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을 경우 상처받는 그 상황에 반복적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기회를 얻기 위해서 같은 상황을 반복하여 찾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3. 욥

욥은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았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한다. 물론 욥은 자기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자신의 태도에 의문도 품고,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아보기도 했지만, 아직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이것은 독선이 아니라 정직이다. 그는 자신이 적어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결국 욥이 옳다고 선언하신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흙의 먼지로 빚어진, 하느님과 논쟁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고 고백한다.

욥기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는 말이 절대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슬픔 한가운데에서 신앙은,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 부드럽게 비추는 희미한 빛과 같다. 욥은 자신이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는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자녀들은 하느님께서 다시 거두어 가실 수 있는 무상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탄식은 무언가를 온전히 자유롭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비통한 감정을 탄식으로 표현하면, 그 감정은 바뀔 수 있다. 탄식은 징징대는 것과 다르다. 징징대는 것은 자기 주변만을 맴돌고, 결국 자기연민의 늪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탄식을 통해 나는 하느님께 나의 곤경을 알린다. 나는 내 운명을 한탄하고, 하느님께 외친다. 이러한 대화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단지 함께 아파할 수 있을 뿐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 고통에 대한 책임까지 짊어지게 하는 것이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상처들이 있다. 그러한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먼저 엄숙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한동안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 먼저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누고, 그런 다음 그의 고통을 대할 수 있는 방법을 깊이 생각한다.

믿음은 고통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섬광과 같다. 믿음은 고통을 넘어서 하느님을 보여 주는데, 그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서도 우리를 지탱해주신다.

욥은 큰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지켰고, 어쨌든 자신은 올바로 살았다는 사실을 믿었고, 고통은 자신이 불러들인 형벌이 아니라 하느님께 내맡겨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국데 믿었다. 이런 태도를 취할 경우 슬픔의 긴 시간을 보낸 다음, 고통은 새 삶으로, 새로운 생동감과 자유로 변화될 수 있다. 슬픔을 겪어 낸 사람들은 보통 매우 성숙하고 침착한 사람들이다.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자기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내적으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외부에서 가해진 고통을 더욱 크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정말 고통 없이 살아야 한다는 환상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고통에 대한 그릇된 표상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하느님의 손에서 받아들일 경우, 이로 인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체험할 경우,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우리에게 닥친 고통과 불행에 전적으로 반항할 수 있다. 반항에는 자기존중이 포함되어 있다. 탄식 중에도 우리는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 이에 비해 징징대는 중에 우리는 자기연민의 늪에 빠져 자존감을 상실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이 아주 나쁘고, 아무것도 나를 더 이상 돕지 않으며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자기연민에 빠진다.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에 머물기를 고집하고 삶을 거부한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자해 가운데 가장 심각한 자해이다.

4. 바위 위에 지은 집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외부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에 자기 집이 무너지듯이 상처를 입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 좋은 것임을 감지하고도 불편함을 느끼거나 타인의 기대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에 상응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거슬러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Ⅱ. 성경에 나오는 자유의 형상

참된 자아는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상처에서 자유롭고, 우리의 병든 이기적 자아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상처에서 자유롭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은 타인을 통해 받은 상처에 대한 불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무의식적인 삶의 틀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신비의 여정은 우리의 상처를 직접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저편에 있는 영역, 상처받을 수 없는 우리 영혼의 내적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신비의 여정에서 상처받을 수 없는 자아를 발견하기 때문에 참으로 자유롭게 된다. 신비의 여정의 목적은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하나 될 때, 인간은 하느님께서 지어 주신 본래의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선다.

여러분이 선을 위해 열성자가 된다면,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한편으로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룸으로써 그 고통에 대해 내적 자유를 유지하라고 당부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이방인과 나그네”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핍박 받는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인간의 악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해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여러분도 정의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무섭게 하여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황하지 마십시오.’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히 모시고’, 여러분이 품고 있는 희망에 대해 여러분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도록 늘 준비하시오. 하지만 온유하고 공손한 방식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선한 처신들을 비방하려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비방하는 일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거룩히 모시면 타인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권력도 우리를 당황하게 하지 못한다.

‘양심’=내적자아, 영적자아

내적자아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 이 자아와 일치하여 사는 사람은 타인들이 적대시하고 비방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 무엇에도 너 흔들리지 말며, 그 무엇에도 너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께서만 변치 않으신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관건은 무감각이 아니라 사랑의 체험이다. 사랑은 오히려 우리가 완전히 상처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처받음은 자기가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2. 낡은 삶의 틀에서 벗어나기

그리스도인은 내적 자유로 인해 이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그릇된 삶의 틀과, 주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환상에서 벗어났다고 느낀다. 이러한 내적 자유의 근원은 십자가 위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예수님의 값진 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셨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반복하라고 저주받지 않았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온갖 두려움과 근심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체험했다. 그때 자신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 하는지를 더 이상 골똘히 생각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즉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단지 한마디 말씀을 하시자마자 나는 평소처럼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고요와 위로로 충만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항상 내 편에 계신 듯이 여겨졌다. 내가 약간 마음을 모아 집중하거나 내가 지나치게 산만하지 않으면, 그분께서 내 옆에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해방하시어 실재에 이르게 하신다. 그분께서 우리 곁에 계시면, 우리는 실재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낡은 틀을 통해 실재를 어둡게 했던 일을 그만 둘 것이다.

친구의 비난이 착취의 표현일 수 있다는 생각이나 그 친구가 자신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고유한 감정, 이를테면 그 여자 친구를 공격하고 싶은 느낌을 감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틀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뜻이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내가 그분에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내 삶을 헛되고 병들게 만드는 낡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헛되고 자기 파괴적인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는가?’이다. 그 첫 단계는 이러한 틀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 인식이 아직 우리를 그 틀에서 해방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적어도 그 틀과 거리감이 생긴다. 둘째 단계는 그 틀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 틀은 일정한 시간 동안 전적으로 나에게 의미가 있었고, 내가 살아남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내 삶을 방해할 뿐이다. 내가 나의 틀과 화해한다면, 나는 항상 반복하여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다. “아, 네가 다시 거기 있구나. 이미 너를 알고 있지. 너는 조용히 있어도 좋아. 나는 오늘 너를 따르지 않을 거야. 오늘은 네가 필요 없단다.” 그 틀은 반복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 틀과 정면으로 싸우면 싸울수록 그만큼 그 틀은 당사자에게 더욱 영향을 끼친다. 삶의 틀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그 틀과 거리를 둘 수 있고 그 틀을 상대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그 틀이 나를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틀은 항상 반복하여 나타나지만, 나는 그 틀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는다. 이 운동은 나선형이다. 우리는 항상 반복하여 발전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지만, 그때마다 더 높은 수준에 이른다. 언젠가는 그 틀이 더 이상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알맞은 행동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 만남은 우리를 낡은 틀의 권력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쉽게 노예로 만드는 초자아의 폭력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쉽게 노예로 만드는 초자아의 폭력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틀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크리소스토모가 강론에서 늘 반복하여 강조했던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사람은 누구에 의해서도 상처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자유롭게 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계속 받는다.

3.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

인간은 마치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법을 어기고, 율법과 삶의 규범에 개의치 않고 행동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법을 어기고, 율법과 삶의 규범에 개의치 않고 행동한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욕망에 지배된다.

신중함은, 사물과 자신의 올바른 관계를 알았기 때문에 세상의 사물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의로운 사람은 타인을 바르게 대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정당한 요구를 깊이 숙고하고,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타인에게 공정하고 정당한 것을 준다.

경건은 또한, 모든 사물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느님을 통해서 실재를 바라보면, 나는 더 이상 환상을 만들지 않는다.

둘째 태도는 정의이다. 그리스도인은 ‘의롭게’ 살 것이다. 그는 올바르게, 자기 존재에 합당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에게 부당한 일을 하지 않으며, 자신의 내적 질서를 파괴하지 않으며 살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셋째 태도는 ‘경건’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릴 때에만 우리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다. 경건은 또한, 모든 사물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느님을 통해서 실재를 바라보면, 나는 더 이상 환상을 만들지 않는다. 그때 소유와 명예 같은 세속적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내가 사물을 올바로 바라보면, 나도 올바로 살 수 있다. 따라서 경건은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본질에 상응하는 존재 방식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사는 존재 방식이다.

희망 안에서 사는 사람만이 올바르게 산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현현을 행복하게 희망하며 사는 사람은 세속적인 일에 진력하여 집착하지 않으며, 욕망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이 느낌에서 선행에 대한 열성이 나타난다.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게 올바르고 자유롭게 사는 능력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 존재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스토아 철학이 내적으로 자유롭기를 원하는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익힌다. 하느님의 은총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자애와 자비는 그리스도인을, 신중하고 자유롭게 사는 인간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산다.

신중함이란 사심 없이 사물을 보는 것, 사물을 나의 이기적 자아와 뒤섞지 않은 채 정당하게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의 이기적 자아의 영향을 받아서 자주 흐려져 있다. 우리가 신중하고 의롭게 살 경우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우리 자신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살 수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제대로 보는 방식을 교육하고, 사물과 우리 자신을 그 본질에 걸맞게 대하는 법을 교육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과 관련시키고 또한 자기 자신과 세상을 하느님을 통해서 제대로 삶을 살도록 교육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나에게 나타나실 정도로, 그분께서 내 영혼의 거리를 활보하시며 어디에서나 당신의 호의와 갈채를 선포하실 정도로 내 인격과 더불어 나는 소중하다. 그때 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닿지 않거나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긍정에서 제외되는 곳은 하나도 없다.

신중함은 오늘날 초인격 심릭학이 말하는 ‘의식’이라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참된 실재를 인식하는 상태이며, 현재를 의식하며 매순간 온전히 현존하는 상태이다. 신중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으로 산다. 그는 깊이 들여다본다. 그는 세상의 근본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다른 가능성, 참된 삶 곧 의식하고 깨어있고 온전히 현존하는 삶의 기술을 깨닫는다. 의식적으로 사는 사람, 신적 실재와 대면하고 사는 사람은 사람들의 기대에서 자유롭다. 사회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고 믿고, 그 요구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담을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주지 않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라는 경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살라는 고행의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 경고는 그들의 참된 실재, 말하자면 그들의 신적 존엄성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우리 본질에 걸맞게 살고, 의롭고 올바르고 조화롭게 참된 자아와 일치하여 살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수많은 사람이 60세가 되어서야 자신의 삶이 유린되었으며, 자신이 착각하여 자기 삶을 유린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의롭고 올바르게” 산 것이 아니라, 오직 타인의 비위를 맞추고,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노력했다. 자기 자신에게 당당한 것이 아니라 계명에 당당하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으면, 우리가 ‘경건하게’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살면, 인간의 비극 전체를 발견하게 딘다. 인간의 비극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무시하고, 환상을 좇으며,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놀라운 기적에 대한 감동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으로 인해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심오한 존엄성이다. 이것은 우리를 세상의 권력에서 해방시킨다. 이로ㅆ 우리는 비로소 인간 존재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경건함은 하느님의 질서 안에 머무르고,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경외하며 존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건전한 삶의 기술이다.

4.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기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열린 눈’으로 온전히 현재를, 지금을 살기 때문에 밀도 있는 삶을 살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

덕행의 사슬은 ‘믿음’으로 시작한다. 믿음에서 덕, 유능함, 힘이 나온다. 더 의식적으로, 새로운 힘을 갖추어서 살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솟아나며 결코 고갈되지 않는 하느님의 샘, 결코 소진되지 않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간다. 덕과 힘에서 ‘앎’ 곧 영지가 나온다. 영지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재를 올바르게 보는 것,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또 생각하신 실재를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앎에서 ‘절제’가 나온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충동적으로 (자신을) 결정하지 않는다. 절젠느 포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포기는 혹독한 고행이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의 결과이다. 절제에는 ‘인내’, 항구함, 안정감, 지구력 등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희생자로 느낀다는 것은, 자신은 책임에서 벗어나고 잘못을 항상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뜻한다. 희생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을 그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돕는 것, 고통을 포함한 인간의 삶 전체를 가능한 한 창조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외부에서 가한 고통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세상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 오직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세상의 권세와 타인의 권력에서 자유로운 상태, 내적 외적 강요에서 자유로운 상태이다.

 

Ⅰ.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상처 주지 않는다

1.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하나는 자기 처벌 또는 자기 경멸로서, 심하면 자기 신체를 훼손하기도 한다. 또다른 방법은 무의식적으로 유년 시절에 받은 상처가 되풀이되는 상황을 찾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를 원할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자신의 중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도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고, 아무도 그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해 스스로 형성한 표상 때문에 혼란스럽게 된다.

자신의 참된 자아에 의해 인도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각자는 유일한 존재이며 자신의 고유한 지위를 찾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연극에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역할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올바른 삶을 결정짓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그대는 그대와 함께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끼 때문에, 우리의 갈망 전체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로 향해야 한다. 그 일치는 본성에 해당된다. 본성에 따른 삶이 인간에게 어울리는 삶이다.

‘이제부터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제 생각은 당신의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께서 좋게 보시는 것을 저는 하나도 거부하지 않겠나이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를 인도하십시오. 당신 마음에 드는 옷을 제게 입혀 주십시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관찰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나는 생각에 깊이 잠기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분노를 받아들이지만, 내가 곧 내 분노는 아니다.’ 내 안에는 분노가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이러한 내적 영역은 관찰되지 않는 관찰자, 감정을 알아차리지만 그 감정과 동일화되지 않고 그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내적 증인이다.

재산, 건강, 명예처럼 내 권한 밖에 있는 것은, 내가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 나에게 권한을 행사하지 못한다. 내가 사물에 권한을 부여하는지 않는지 그 여부는, 내가 사물에 대해 만들어 놓은 표사에 달려있다.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닌 표상과 투사의 배후를 묻고, 사물과 사람을 하느님 빛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물 자체는 우리를 결코 적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물들의 거동을 종종 적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자유를 원하면서도, 살던 대로 계속 살기를 바라고, 돈도 충분히 벌고 싶고, 타인에게서 인정도 받고 싶어 한다.

내가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면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그들에게서 호평을 받는지 등에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물론 이때 나는 지혜로워야 하고, 나의 한계를 의식해야 한다. 내가 자유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내 뿌리를 하느님 안에 두고 있다는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까지 나를 지탱하는지를 나는 알아야 한다. 자유 안에서 비로소 나는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성을 체험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유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입히는 상처를 허용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일단 우리가 거절할 경우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어느 집단과 함께 할 때, 온 힘을 다해 참여하면서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며, 옳다고 느낄 경우에는 거절하는 것조차도 자유롭게 해 준다.

 

2.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글

인간의 능력은 참된 표상을 대하는 신중함과 생활방식과 관련된 올바름이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은 끝없이 많은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강해진 상태로 그 고통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아무도 자기 자신을 반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쇠약해지고 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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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자신의 내적인 집을 지은 사람은 어떤 상처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 경솔과 부패와 같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폭풍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태만 때문에 집이 무너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은, 끝없는 많은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강해진 상태로 그 고통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자기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아무도 자기 자신을 반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쇠약해지고 몰락한다.”

“그대가 그대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면, 그대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통해 고통을 겪는 경우가 아니라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주님 안에서 깨어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에서 늘 깨어 있고 분별력을 갖추어 고통스러운 모든 일을 고귀한 마음으로 견디고, 마침내 영원한 불멸의 상급에 다다르도록 하자. 영예와 권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신앙-자유에 이르는 길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하는 사람은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물에 관한 올바른 표상을 지님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상처 주는 일을 끝낸다.

신앙은 건전한 삶의 기술로,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잘 대하는 기술로 묘사된다. 실재를 올바로 바라보는 사람, 사물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기에 그에게 다른 사물들도 더 이상 상처를 입힐 수 없다.

크리소스토모는 신앙을 오직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방식 곧 건전한 삶의 기술로 여기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자기가해의 문제

내가 영적 지도 중에 자주 부딪치는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상황을 반복하여 찾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활 태도에 스스로 높은 요구와 이상을 기대하고 설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그들은 죄책감과 자기비난으로, 때로는 자기비하, 자해, 자기처벌 등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종종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고, 타인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는 자주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이때 자신의 느낌, 곧 자기 마음의 고요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타인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우리가 약간의 사랑으로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 사실과 다르다. 그 생각은 우리 스스로가 실재에 대해 만든 표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상처를 준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그릇된 표상을 만듦으로써 스스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설령 타인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러한 상처를 자기처벌과 자기비하를 통해서 더 확장시키는지, 또는 그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그 상처에서 벗어나는지 여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렇게 실재에 대한 표상을 점검하면, 우리는 상처와 거리를 두게 되고, 우리 삶의 참된 실재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상처받을 수 없는 내적 공간을 만나고, 우리 안에 있는 순수한 하느님 모상,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우리의 신성한 존엄성을 만난다.

 

Ⅲ. 성경에 나오는 자유의 인물들

불가마 속의 젊은이들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항상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 그분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 그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이 세상 임금의 권력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직장에서 우리의 상급자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우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마음껏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들의 호의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들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있다고 우리를 현혹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2. 이집트의 요셉

무언가가 우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신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겪은 위기와 실패의 의미를 발견하고, 모함과 부당한 대우 등의 의미를 깨닫는다.

감옥에서 보내는 시간은 힘들다. 시련 중에는 내적 자유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꿈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삶이 감옥에서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신성한 존엄성을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본회퍼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일을 자유에 이르는 길로 본다. 자유에 이르는 여정에서 죽음은 최고의 축제이다.

델프는 감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자유를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태도로 여긴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내적 자유의 아름다운 공간을 갖게 해 주셨다. 이것은 이 힘든 주간의 은총이며,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 준다. 자신감은 무너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실재는 나에게 서서히 더욱 가깝게 그리고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가 살고 경험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그렇게 절반만이라도, 아니 사분의 일만이라도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제 나는 겨우 인간이 되었다. 이전보다 내적으로 더 자유롭고 훨씬 더 순수하고, 더 참되고 더 실제적이다. 이제야 내 눈이 모든 차원을 보는 입체적인 시각을, 모든 전망을 보는 건강함을 지니게 되었다.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은 사라졌다.” 그는 감옥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실재에 대한 올바른 견해와 관련이 있다. 그가 실재에 대해 가졌던 그릇된 표상은 이제 사라진다. 실재 위에 드리워있던 베일을 하느님께서 친히 벗겨 내시어 그는 하느님 앞에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실재를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된다.

알프레드 델프는 인간의 자유에는 두 가지 근본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경배와 사랑이 그것이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만이 실제로 자유를 체험한다.

델프가 묘사한 자유는 무감각이 아니라, 가장 큰 곤경 한가운데에 있는, 가망이 없는 가장 짙은 어둠 한복판에 있는 내적 자유이다.

인간의 악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것은 정말 무섭다. 그러한 상처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흠집을 낸다. 상처를 입혔던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잘못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이다. 어떤 공허함을 느낄 경우, 즉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묻는다. 혹은 어떤 관계가 불편해지면 항상 그 잘못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들은 이러한 자책으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힘으로써 범인을 통해 받은 상처를 계속 이어간다.

상처는 육신과 영혼을 아프게 한다. 특히 감정의 영역이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내적 영역은 온전하고 건강하게 지속된다. 그곳으로부터,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서서히 마음을 뚫고 지나가고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

상처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숙고하다 보면, 오래된 상처들과 결별하고, 그것들을 놓아 보내면, 언젠가는 더 이상 그 상처가 쑤석거리지 않는 때가 찾아온다. 이러한 시점을 놓치면, 스스로 상처 입히는 일이 시작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을 고통과 동일시하고, 그 결과 고통과 결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익숙하기에 잘 알지만, 고통을 놓아 보낼 경우 그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통과 화해하는 동시에 그것을 놓차 보내고,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과감히 내딛으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기 상처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을 경우 상처받는 그 상황에 반복적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기회를 얻기 위해서 같은 상황을 반복하여 찾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3. 욥

욥은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았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한다. 물론 욥은 자기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자신의 태도에 의문도 품고,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아보기도 했지만, 아직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이것은 독선이 아니라 정직이다. 그는 자신이 적어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결국 욥이 옳다고 선언하신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흙의 먼지로 빚어진, 하느님과 논쟁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고 고백한다.

욥기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는 말이 절대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슬픔 한가운데에서 신앙은,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 부드럽게 비추는 희미한 빛과 같다. 욥은 자신이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는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자녀들은 하느님께서 다시 거두어 가실 수 있는 무상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탄식은 무언가를 온전히 자유롭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비통한 감정을 탄식으로 표현하면, 그 감정은 바뀔 수 있다. 탄식은 징징대는 것과 다르다. 징징대는 것은 자기 주변만을 맴돌고, 결국 자기연민의 늪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탄식을 통해 나는 하느님께 나의 곤경을 알린다. 나는 내 운명을 한탄하고, 하느님께 외친다. 이러한 대화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단지 함께 아파할 수 있을 뿐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 고통에 대한 책임까지 짊어지게 하는 것이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상처들이 있다. 그러한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먼저 엄숙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한동안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 먼저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누고, 그런 다음 그의 고통을 대할 수 있는 방법을 깊이 생각한다.

믿음은 고통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섬광과 같다. 믿음은 고통을 넘어서 하느님을 보여 주는데, 그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서도 우리를 지탱해주신다.

욥은 큰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지켰고, 어쨌든 자신은 올바로 살았다는 사실을 믿었고, 고통은 자신이 불러들인 형벌이 아니라 하느님께 내맡겨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국데 믿었다. 이런 태도를 취할 경우 슬픔의 긴 시간을 보낸 다음, 고통은 새 삶으로, 새로운 생동감과 자유로 변화될 수 있다. 슬픔을 겪어 낸 사람들은 보통 매우 성숙하고 침착한 사람들이다.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자기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내적으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외부에서 가해진 고통을 더욱 크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정말 고통 없이 살아야 한다는 환상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고통에 대한 그릇된 표상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하느님의 손에서 받아들일 경우, 이로 인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체험할 경우,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우리에게 닥친 고통과 불행에 전적으로 반항할 수 있다. 반항에는 자기존중이 포함되어 있다. 탄식 중에도 우리는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 이에 비해 징징대는 중에 우리는 자기연민의 늪에 빠져 자존감을 상실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이 아주 나쁘고, 아무것도 나를 더 이상 돕지 않으며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자기연민에 빠진다.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에 머물기를 고집하고 삶을 거부한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자해 가운데 가장 심각한 자해이다.

4. 바위 위에 지은 집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외부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에 자기 집이 무너지듯이 상처를 입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 좋은 것임을 감지하고도 불편함을 느끼거나 타인의 기대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에 상응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거슬러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Ⅱ. 성경에 나오는 자유의 형상

참된 자아는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상처에서 자유롭고, 우리의 병든 이기적 자아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상처에서 자유롭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은 타인을 통해 받은 상처에 대한 불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무의식적인 삶의 틀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신비의 여정은 우리의 상처를 직접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저편에 있는 영역, 상처받을 수 없는 우리 영혼의 내적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신비의 여정에서 상처받을 수 없는 자아를 발견하기 때문에 참으로 자유롭게 된다. 신비의 여정의 목적은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하나 될 때, 인간은 하느님께서 지어 주신 본래의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선다.

여러분이 선을 위해 열성자가 된다면,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한편으로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룸으로써 그 고통에 대해 내적 자유를 유지하라고 당부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이방인과 나그네”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핍박 받는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인간의 악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해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여러분도 정의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무섭게 하여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황하지 마십시오.’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히 모시고’, 여러분이 품고 있는 희망에 대해 여러분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도록 늘 준비하시오. 하지만 온유하고 공손한 방식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선한 처신들을 비방하려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비방하는 일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거룩히 모시면 타인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권력도 우리를 당황하게 하지 못한다.

‘양심’=내적자아, 영적자아

내적자아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 이 자아와 일치하여 사는 사람은 타인들이 적대시하고 비방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 무엇에도 너 흔들리지 말며, 그 무엇에도 너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께서만 변치 않으신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관건은 무감각이 아니라 사랑의 체험이다. 사랑은 오히려 우리가 완전히 상처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처받음은 자기가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2. 낡은 삶의 틀에서 벗어나기

그리스도인은 내적 자유로 인해 이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그릇된 삶의 틀과, 주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환상에서 벗어났다고 느낀다. 이러한 내적 자유의 근원은 십자가 위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예수님의 값진 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셨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반복하라고 저주받지 않았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온갖 두려움과 근심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체험했다. 그때 자신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 하는지를 더 이상 골똘히 생각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즉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단지 한마디 말씀을 하시자마자 나는 평소처럼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고요와 위로로 충만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항상 내 편에 계신 듯이 여겨졌다. 내가 약간 마음을 모아 집중하거나 내가 지나치게 산만하지 않으면, 그분께서 내 옆에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해방하시어 실재에 이르게 하신다. 그분께서 우리 곁에 계시면, 우리는 실재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낡은 틀을 통해 실재를 어둡게 했던 일을 그만 둘 것이다.

친구의 비난이 착취의 표현일 수 있다는 생각이나 그 친구가 자신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고유한 감정, 이를테면 그 여자 친구를 공격하고 싶은 느낌을 감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틀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뜻이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내가 그분에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내 삶을 헛되고 병들게 만드는 낡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헛되고 자기 파괴적인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는가?’이다. 그 첫 단계는 이러한 틀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 인식이 아직 우리를 그 틀에서 해방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적어도 그 틀과 거리감이 생긴다. 둘째 단계는 그 틀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 틀은 일정한 시간 동안 전적으로 나에게 의미가 있었고, 내가 살아남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내 삶을 방해할 뿐이다. 내가 나의 틀과 화해한다면, 나는 항상 반복하여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다. “아, 네가 다시 거기 있구나. 이미 너를 알고 있지. 너는 조용히 있어도 좋아. 나는 오늘 너를 따르지 않을 거야. 오늘은 네가 필요 없단다.” 그 틀은 반복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 틀과 정면으로 싸우면 싸울수록 그만큼 그 틀은 당사자에게 더욱 영향을 끼친다. 삶의 틀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그 틀과 거리를 둘 수 있고 그 틀을 상대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그 틀이 나를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틀은 항상 반복하여 나타나지만, 나는 그 틀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는다. 이 운동은 나선형이다. 우리는 항상 반복하여 발전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지만, 그때마다 더 높은 수준에 이른다. 언젠가는 그 틀이 더 이상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알맞은 행동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 만남은 우리를 낡은 틀의 권력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쉽게 노예로 만드는 초자아의 폭력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쉽게 노예로 만드는 초자아의 폭력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틀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크리소스토모가 강론에서 늘 반복하여 강조했던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사람은 누구에 의해서도 상처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자유롭게 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계속 받는다.

3.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

인간은 마치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법을 어기고, 율법과 삶의 규범에 개의치 않고 행동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법을 어기고, 율법과 삶의 규범에 개의치 않고 행동한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욕망에 지배된다.

신중함은, 사물과 자신의 올바른 관계를 알았기 때문에 세상의 사물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의로운 사람은 타인을 바르게 대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정당한 요구를 깊이 숙고하고,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타인에게 공정하고 정당한 것을 준다.

경건은 또한, 모든 사물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느님을 통해서 실재를 바라보면, 나는 더 이상 환상을 만들지 않는다.

둘째 태도는 정의이다. 그리스도인은 ‘의롭게’ 살 것이다. 그는 올바르게, 자기 존재에 합당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에게 부당한 일을 하지 않으며, 자신의 내적 질서를 파괴하지 않으며 살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셋째 태도는 ‘경건’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릴 때에만 우리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다. 경건은 또한, 모든 사물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느님을 통해서 실재를 바라보면, 나는 더 이상 환상을 만들지 않는다. 그때 소유와 명예 같은 세속적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내가 사물을 올바로 바라보면, 나도 올바로 살 수 있다. 따라서 경건은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본질에 상응하는 존재 방식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사는 존재 방식이다.

희망 안에서 사는 사람만이 올바르게 산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현현을 행복하게 희망하며 사는 사람은 세속적인 일에 진력하여 집착하지 않으며, 욕망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이 느낌에서 선행에 대한 열성이 나타난다.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게 올바르고 자유롭게 사는 능력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 존재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스토아 철학이 내적으로 자유롭기를 원하는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익힌다. 하느님의 은총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자애와 자비는 그리스도인을, 신중하고 자유롭게 사는 인간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산다.

신중함이란 사심 없이 사물을 보는 것, 사물을 나의 이기적 자아와 뒤섞지 않은 채 정당하게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의 이기적 자아의 영향을 받아서 자주 흐려져 있다. 우리가 신중하고 의롭게 살 경우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우리 자신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살 수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제대로 보는 방식을 교육하고, 사물과 우리 자신을 그 본질에 걸맞게 대하는 법을 교육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과 관련시키고 또한 자기 자신과 세상을 하느님을 통해서 제대로 삶을 살도록 교육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나에게 나타나실 정도로, 그분께서 내 영혼의 거리를 활보하시며 어디에서나 당신의 호의와 갈채를 선포하실 정도로 내 인격과 더불어 나는 소중하다. 그때 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닿지 않거나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긍정에서 제외되는 곳은 하나도 없다.

신중함은 오늘날 초인격 심릭학이 말하는 ‘의식’이라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참된 실재를 인식하는 상태이며, 현재를 의식하며 매순간 온전히 현존하는 상태이다. 신중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으로 산다. 그는 깊이 들여다본다. 그는 세상의 근본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다른 가능성, 참된 삶 곧 의식하고 깨어있고 온전히 현존하는 삶의 기술을 깨닫는다. 의식적으로 사는 사람, 신적 실재와 대면하고 사는 사람은 사람들의 기대에서 자유롭다. 사회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고 믿고, 그 요구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담을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주지 않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라는 경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살라는 고행의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 경고는 그들의 참된 실재, 말하자면 그들의 신적 존엄성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우리 본질에 걸맞게 살고, 의롭고 올바르고 조화롭게 참된 자아와 일치하여 살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수많은 사람이 60세가 되어서야 자신의 삶이 유린되었으며, 자신이 착각하여 자기 삶을 유린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의롭고 올바르게” 산 것이 아니라, 오직 타인의 비위를 맞추고,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노력했다. 자기 자신에게 당당한 것이 아니라 계명에 당당하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으면, 우리가 ‘경건하게’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살면, 인간의 비극 전체를 발견하게 딘다. 인간의 비극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무시하고, 환상을 좇으며,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놀라운 기적에 대한 감동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으로 인해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심오한 존엄성이다. 이것은 우리를 세상의 권력에서 해방시킨다. 이로ㅆ 우리는 비로소 인간 존재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경건함은 하느님의 질서 안에 머무르고,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경외하며 존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건전한 삶의 기술이다.

4.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기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열린 눈’으로 온전히 현재를, 지금을 살기 때문에 밀도 있는 삶을 살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

덕행의 사슬은 ‘믿음’으로 시작한다. 믿음에서 덕, 유능함, 힘이 나온다. 더 의식적으로, 새로운 힘을 갖추어서 살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솟아나며 결코 고갈되지 않는 하느님의 샘, 결코 소진되지 않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간다. 덕과 힘에서 ‘앎’ 곧 영지가 나온다. 영지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재를 올바르게 보는 것,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또 생각하신 실재를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앎에서 ‘절제’가 나온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충동적으로 (자신을) 결정하지 않는다. 절젠느 포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포기는 혹독한 고행이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의 결과이다. 절제에는 ‘인내’, 항구함, 안정감, 지구력 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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