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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블로그시작한지1년

[책]레프 톨스토이 <안나 까레니나>


얇지 않은 3권의 책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숙제로 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읽다 말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읽다보니 생각보다 재밌고 안나가 어떻게 자살을 결심하는지 레빈이 어떻게 살아갈지가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다. 고전이라면 촌스러울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지금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생에 대해서, 특히 결혼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에게 필독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이 책 속에 레빈 또한 그러한 인물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느꼈던 것을 레빈이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에 위로가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이런 내용의 고전영화를 좋아했었던 듯 하다. 그러고서는 옳고 그른 것들에 대한 분류가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을 하면서 살아왔다.그런데 살아가다보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진짜 옳은 행동인지 헷갈리는 경우들이 생겼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레빈이 ‘옳게 살아왔으나 그르게 사고했다’라고 깨닫는다.내가 올해 참 많이도 생각한 부분이기에 이 말이 참 마음에 와닿았다.

여전히 편하고 싶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으면서도 정말 푹 쉬었다는 기분이 들만큼 제대로 쉬지 못한다면 시간을 좀더 알차게 보내고 싶은 욕심이 늘 있다. 편하면서도 알차다는 느낌은 책을 통해서 가능한 듯 하여 이제야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된 듯 하다. 나에게 제대로 책 읽기의 첫 책이 <안나 까레니나>이고 이 책을 통해 고전이 아직도 읽히는 이유와 톨스토이가 왜 유명한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10년 뒤쯤 다시 읽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부분에 마음이 가고 레빈에게 더 끌릴지도 궁금하다. 10년 뒤쯤엔 돌리나 키티와 비슷한 마음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책속의 글>

누구나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복잡한 사정을 세세히 알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그러한 사정과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을 자기에게만 일어나 특수한 일이라고 독단하며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복잡한 사정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라고는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법이다.

지금이 영원은 아닐 테니까. 자넨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행동을 했어.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러나 자넨 계속 그렇게 행동해선 안 돼.

‘무거운 짐’을 나르면서 두 손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졌을 때뿐이야. 그리고 이것이 결혼이야. 결혼을 하지 않고 이 ‘무거운 짐’을 질질 끌고 있는 날에는 손이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 사회적으로 여자의 지위가 확고하면 확고할수록 결과는 좋지 않아. 그것은 흡사 두 손으로 무거운 짐을 끄는 것이 아니라 남의 손에서 빼앗는 거나 마찬가지야.(브론스키의 친구 세르푸호프스코이)

스비야쥐스키는 의심할 것도 없이 총명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높은 교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교양을 조금도 내세우는 일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모르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지식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드러내놓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 없이 바르고 착하고 총명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유쾌하고 활발하게 주위의 온갖 사람들로부터 높이 평가되는 일에 매달렸으며, 또 틀림없이 불순한 일 따위는 한 번도 의식적으로 한 적이 없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빈은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이해하지 못했고, 언제나 살아있는 수수께끼를 대하듯이 그와 그의 생활을 보고 있었다. 레빈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스비야쥐스키 마음의 응접실 문에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마다 스비야쥐스키가 가볍게 당황하는 빛을 보이는 것을 알아챘다. 흡사 레빈에게 붙들릴까봐 두려워하는 듯 간신히 알아챌 정도의 놀라움을 눈에 드러내면서, 그는 선량하고도 쾌활하게 저항을 해보이는 것이었다.

콘스탄틴은 지금까지 쭉 하려고 애썼으면서도 할 수 없었던 일, 그가 본 바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주 훌륭히 해내고 있으며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일을 다시 한번 해보고자 시도했다. 말하자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 밖에 내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매 순간 그는 자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미끄러져가는 작은 배의 매끄럽고 행복한 진행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사람이 자기가 직접 그 작은 배에 탔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말하자면 몸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가만히 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발밑에는 물이 있고 그 위를 노저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익숙하지 않은 손에는 그것이 몹시 아프다는 것, 그저 보고만 있을 때에는 손쉬운 것 같았지만 막상 자기가 해보니까 썩 즐겁기는 해도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절망은 자신이 슬픔의 상황에서도 완전히 고독하다는 의식으로 인해 한층 더 깊어졌다. 그가 느끼고 있는 괴로움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를 고관으로서가 아니라, 또 사회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괴로워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가여워해줄 사람은 페테르부르크 뿐 아니라 그 어디에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안나에게 느꼈던 애착은 그의 마음속에서 사람들과 마음으로부터의 관계를 맺으려는 마지막 요구를 제거해버렸다. 교제라고 불릴 만한 것은 많았으나 우정이랄 것은 없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는 식사에 초대할 수 있을만한 사람, 자기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일에 조력을 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 다른 사람의 일이며 정부의 사업에 대해서 기탄없이 의논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많았으나,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관계는 관습과 예절에 의해 정확히 한정된 범위에 속한 것이어서 그 경계 밖으로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종교에 흥미를 가지고 있을 뿐인 신자였다.

아버지는 늘 그와 이야기하면서 실제의 세료쥐아와 전혀 닮지 않았고 책 속에나 있을 것 같은, 그가 멋대로 상상한 어린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세료쥐아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세료쥐아도 아버지에게는 늘 그런 책 속에 있는 어린이처럼 꾸며 보이려고 애썼다.

그는 아홉 살이었다. 아직 어린애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영혼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소중하였다. 그는 마치 눈꺼풀이 눈을 보호하듯이 그것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열쇠 없이는 아무도 자기의 영혼 속에 들여놓지 않았다.

레빈은 이제 자기의 생각을 정확한 말로 표현하려고 고심하는 일없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로서는 꽤 뚜렷하게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표명한 셈이었는데, 바보도 아니고 가식적이지도 않은 두 친구가 입을 모아 그가 궤변을 늘어놓으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 일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는 상황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 수 있는 일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선택한 역할, 러시아 귀족의 핵심을 이루는 부유한 지주라는 역할은 완전히 그의 취미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반년을 지낸 지금은 시시각각으로 더욱 큰 만족을 그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 불행한 아이들 앞에 나는 늘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돼요.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않으면 그 아이들은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만일 그 아이들이 불행하다면 그 죄는 나 한사람에게 있는 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어느 정도로 브론스키에게 귀중한지, 그가 저버린 것을 어느 정도까지 그에게 보상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브론스키는 그녀 생활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있는, 그의 마음에 들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도움이 돼야겠다는 이 희망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사랑의 그물로 그를 붙잡아 싸려고 하는 것에는 적잖이 괴로움을 받았다.

돈을 얻기 위해 치른 노력이 그 돈으로 사들인 것이 주는 만족과 비등한가 어ᄄᅠᆫ가 하는 생각, 그러한 생각은 벌ㅆ 올전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카타바소프가 명쾌하고도 단순한 인생관의 소지자라는 것이 즐거웠다. 레빈은 카타바소프의 명쾌한 인생관은 그의 빈약한 성정에서 유래한 것이라 생각하고, 카타바소프는 카타바소프대로 레빈의 사상의 무질서는 그의 지적 훈련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와 먹고 마시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 모스크바에서 이처럼 오래 지냈기 때문에 자기가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곁에서 떨어져 있을 때는 완전히 그녀를 잊어버리고 차분한 기분이 되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녀의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을 도울 방도가 없다는 무력감이 차츰 강해졌다.

레빈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모든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어떠한 일이 다른 일보다도 중요한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좋은지 나쁜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하는 것도 회피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제 욕심을 채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표도르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진리를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러자 나는 그 암시만으로 그것을 이해해버렸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되는가, 무엇이 옳은 일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오직 하나, 견실하고 의심할 나위도 없이 명백한 지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이성의 밖에 있고 아무런 원인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무런 결과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들춰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알고 있던 것을 의식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과거에 나에게 생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이처럼 생명을 주고 있는 그 힘을 이해한 것이다. 나는 허위에서 해방되어 주인을 인식한 것이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성이 일깨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불합리하니까.

나 자신의 감정에 실망한 거요. 나는 보다 큰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경이로울 만큼 새롭고 유쾌한 감정이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길 바라고 있었던 거요. 그런데, 대신에 갑자기 야릇한 거부감과 가여운 느낌만이...만족보다도 공포와 연민 쪽이 훨씬 컸었소.

이 새로운 감정은 내가 공상했던 것처럼 나를 변화시키지도, 행복하게 만들지도, 갑자기 밝게 해주지도 않았다. 꼭 내 아들에 대한 감정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경이도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 나는 역시 마부 이반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논쟁을 하기도 하고 부적절한 때에 내 사상을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내 영혼의 지극히 거룩한 곳에 남들의 영혼 사이에는, 심지어 아내의 영혼과도 장벽은 쌓일 것이다. 그리고 역시 나의 공포 때문에 아내를 꾸짖기도 하고 뉘우치기도 할 것이다. 또한 나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지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면서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 삶은, 내 온 삶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