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작가도 나랑 참 닮았다. 솔직히 아직은 미숙하고 어찌보면 누군가에게 조금은 무례해보일 수 있는 느낌. 그간 참 열심히도 남들에게 맞춰 살았지만 정작 스스로 원했고 선택했던 삶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을 듯하다.
정문정작가가 엄마가 되고 나이가 들고 10년 뒤쯤 어떤 글을 쓸지 기대가 되고 궁금하다. 현재는 회피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힘들게 하는 것들은 우선 피하고 보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추스린 후에 상황을 다시 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 나도 현재론 이렇게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10년 뒤에도 지금 모습과 같길 원하진 않는다. 정문정 작가도 나도 조금은 더 마음 편하게 주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동요되지 않길 바래본다.
첫째, 스스로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에서 벗어날 것. 그럴수록 너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주변에 늘어난다. ‘내 인생은 원래 불행해’라고 말하는 걸 그만둬라.
둘째, 일상에서 작은 거절을 조금씩 해볼 것. 거절도 근육이 필요한 일이라 처음에는 어렵지만 작은 것부터 해보다 보면 갈수록 쉬워진다. 의외로, 거절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셋째,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을 것. 자존감이 낮으면 관계를 끝낼 때가 되어도 ‘이 사람 말고 또 누가 나를 사랑해주겠어...’하고 질질 끈다. 일상에서 작은 성취의 경험을 쌓고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면 인간관계에서 자꾸 무리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것들이 바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보니 혼자 과도하게 기대하고 섭섭해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관계의 키를 잡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상대에게 떠맡겨버리고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속상해했구나. 상대 또한 그게 부담스러웠을 텐데...
착한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느 한쪽이 착해야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사실 없어도 상관없는 ‘시시한’ 것 아닐까? 건강한 인간관계는 시소를 타듯 서로를 배려하며 영향을 주고받을 때 맺어진다.
복통이나 배변장애, 가려움증, 폭식이나 거식, 두통, 불안증, 수면장애 등 이전에는 없었던 몸의 이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자신의 마음을 한번 체크해볼 일이다. 단순히 나약해서,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증상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나는 ‘정신으로 몸을 극복한다’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겪어낼 뿐, 내 마음과 육체는 싸워서 이겨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보듬어 함께 가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마음의 균형이 무너질 때 몸은 가끔 에러 메시지를 보내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때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몸을 찬찬히 이해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마음의 문제를 찾아 보듬어줄 때, 몸은 밸런스를 찾아나간다.
사람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가며 성장한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배우며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착한 사람’들은 남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잊어버린다.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인생의 선택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조차 방관자의 자세를 취한다. 진로, 취업, 결혼 같은 중요한 결정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결정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잘못되면 포기하는 것도 빠르고 남 탓을 하는 데도 익숙하다. 주인공이 아닌 관찰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상대의 말보다 나의 직관과 감정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저 사람을 만나기 전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르지? 저 사람 곁에서 나는 더 나빠진 걸까, 더 좋아진 걸까?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모든 것에 대답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잃어버린단다.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고민해 선택한 결과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자신조차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도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작가는 여러 책에서 반복한다. 작가의 에세이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에서도 그는 자신의 성격 중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내 전부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담담한 긍정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고 그 대답을 오래도록 찾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통찰이 아닐까?
기억 또한 보정된 사진 같아서 사실 그 자체보다는 편집과 자기애가 꾸덕꾸덕 뭉쳐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회상할 때는 ‘상처를 주었다’는 기억보다 ‘상처를 받았다’는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것 같다.
내 인생은 롱테이크로 촬영한 무편집본이다. 지루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진다. 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은 편집되고 보정된 예고편이다. 그래서 멋져 보이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알아달라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스스로 충만하면 남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런 기도문이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할 수 있는 일도 놓치게 된다. 전문가의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시간은 가치 있는 데에만 쓰기에도 부족하고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
잘 모르니까,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모르니까, 쉽게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그런 역지사지를 꾸준히 해나가야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 번거롭고 어렵지만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면 좋겠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아니라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고차원의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끝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노력하는 마음, 개개인의 사연을 살피려 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이 우리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소설가 김훈이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관된 모습을 연기할 필요는 없다. 나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 완성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면 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판단을 뒤로하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 중 하나다. 무언가를 보고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이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은 더 많이 보는 사람일 것이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은 여러 입장을 모두 보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자신이 살아보지 않았던 삶까지 살아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아예 대화를 하지 않게 되듯, 변화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게 되므로, 집을 오래 비워두면 집은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이고 이곳저곳 망가져 간다. 매일 쓸고 닦아도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덕에 최소한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이다.
시니컬해지지 말자는 건, 철저하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용기 있게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다. 그러면 최소한, 세상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내 인생과 내 주변은 뭐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나의 공간을 문득문득 침범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를 잘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다.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서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나의 깊은 감정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에게까지 나의 공간을 열어 보일 필요는 없다. 또 사람마다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감각이 달라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훅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관계를 이어가려면 나름의 대처법이 필요하다. 평정을 유지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공간 감각을 고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나를 지키는 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그건 익은 후의 말이다. 우리는 익기도 전에 고개부터 숙여오지 않았던가.
결핍은 그 자체로는 연약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무엇이라고 믿고, 남에게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위대해질 수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한국처럼 서로 자존감을 낮추는 데 바쁘고 권위적인 곳일수록 더더욱 이런 힙합 정신이 필요하다. 남들이 하는 평가를 그대로 믿지 않고,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리스펙하는 것. 그렇게 되면 누군가 “가만히 있으라”라고 할 때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중요도에 따른 시간과 에너지의 분배다. 무례한 사람의 부탁이라면 아예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좋지만, 가끔은 모호한 경우가 있다.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면서도 부탁을 들어주기에는 사정이나 능력이 여의치 않을 때다. 이때는 최대한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거절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 확답을 주면 돼?”하고 물어보는 것이 좋다. 만약 이렇게 물었을 때 급한 일이라 오늘내일 중으로 답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이 부탁에서 당신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탁들 했지만 거절당해 돌고 돌아 당신에게 왔을 확률이 높으니, 덜 미안해하면서 요즘은 바쁜 일이 있어 어렵다고 바로 거절해도 된다. 그토록 급한 일이라면 상대방도 무리한 부탁임을 알고 있고, 안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거절당하더라도 크게 섭섭해하지 않는다.
관계의 기울어진 추를 파악한 상대는 무리한 부탁임을 알면서도 계속 하게 되고, 부탁을 받는 사람은 일그러진 인정욕구와 피해의식이 겹쳐 자꾸만 의기소침해지고 예민해진다. 부탁받은 일을 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이 기껍고 편안한 상태여야 한다. 예의 바르게 부탁을 거절했는데도 자꾸 하소연하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옆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고 싶고 거절도 잘 하고 싶다면, 그건 욕심일 뿐이다. 나에게 상대의 부탁을 거절할 자유가 있듯이, 거절당한 상대가 나에게 실망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희롱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예민한 사람인 거겠지’, ‘그분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하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지하거나 불쾌감을 표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다 보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냥 두고 피해받은 자신을 책망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신의 감정을 믿어라. ‘불쾌하다’는 감정은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허락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색하면서 거부하기가 힘들더라도 최소한 웃지는 말아야 한다.
성희롱적인 발언을 자주 하는 사람 중에는 사람들이 난감해서 웃는 것을 보고 자신이 재치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감정을 믿는 것, 그리고 단호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을 훈육하듯, 알아서 멈출 때까지 반응 없이 쳐다보다가 그래도 계속되면 단호하게 안 된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도 도저히 멈추지 않는다면, 휙 돌아서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다.
스스로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아주는 것이다.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로 그렇게 믿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피하고 싶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기죽지 말자. 매일 조금씩 단호하고도 우아하게 거절하는 연습을 해보는 거다. 거절에 필요한 자신만의 언어를 상요하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일일이 상처받지 않는다’와 ‘상대방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는다’이 두 가지다. 미셸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들 부부를 공격하는 트럼프의 행태를 간적접으로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니다.”
중요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주변의 소음을 낮춰야 한다. 가끔은 남이 자신을 방해할 때 ‘쉿’을 외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작 나의 목소리가 묻혀 세상에 들리지 않게 될 테니까.
남에게 그럴싸해 보이기란 얼마나 쉬운가. 사람들은 자신은 적당한 가면을 골라 쓰고 세상에 나서면서도 남들은 가면을 벗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또 자신은 단순하게 정의되는 걸 싫어하면서 남에 대해서는 다 아는 듯이 판단하곤 한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상처 덜 받고 자존감 높게 살고 싶지만, 그게 가능했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듯하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하지현 교수는 “불안이란 없애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방심하면 금세 살이 찌는 몸을 대하듯, 마음도 비슷한 관점에서 접근해봐야 한다. 실제로 정상 체중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비결은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라 우선 몸과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긴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는 건 감정의 진폭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 언젠가 우울함이 찾아오더라도 빠르게 나아질 수 있는 회복력을 얻는 일이다.
김연수 작가 <소설가의 일>
“그럼에도 작가들은 잘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인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나의 과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나뿐이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들이 말하게 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가자.’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이 모든 관계는 서로 이해관계까 맞아떨어질 때 유지될 수 있다. 회사가 나를 책임지지 않고 회사에서의 관계가 일시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일로써 만난 사람들에게 갑질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나치게 헌신하다가 배신감에 울 일도 없고 말이다. 회사의 명함 말고도 나를 설명해줄 일을 밖에서 자꾸 찾고, 회사 동료가 아니어도 나와 놀아줄 사람을 찾아 나서라. 회사에 대해서는 약간 체념한 채로 일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 사람보다 네가 훨씬 더 소중해. 옆에 있으면 울게 되는 사람 말고 웃게 되는 사람을 만나.”
상처받지 않는 무균실의 환경이란 건 있을 수 없으니, 누구에게나 흠이 나 있을 것이다. 잘 해보려고 했지만 어ᄍᅠᆯ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보석함에 고이 모셔두지 않은 이상 매일 끼고 있는 반지라면 생활 기스를 피할 수 없듯, 살아가는 일에서 상처를 피할 순 없다. 더욱이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처가 있는 법이다. 그건 그냥, 거대한 흠이 아니라 자잘한 생활 기스들인 거다.
상대를 ‘고치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도리어 자신마저 불행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기존의 질문 ‘그 사람은 그것만 빼면 괜찮은가?’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는 틀렸다. ‘그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준임이 분명한가?’와 ‘단점이 개선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인간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후, 그가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일단은 적당한 거리를 둔 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중요한 거다.”-박찬욱
남들이 지적하는 말을 듣고 단점을 없애는 부분만 집중하다 보면 장점도 함께 없어지고 만다.
“기본적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지 말고요. 상대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대로 받아들이세요.”-강경화
이해되지 않는 상대의 반응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하고 드러난 사실 자체만 봐야 한다. 그처럼 적당한 무심함과 둔감함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내가 자꾸 되뇌는 것은 이것이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가치 없는 곳에 쓰지 말 것.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
둘째, 일상에서 작은 거절을 조금씩 해볼 것. 거절도 근육이 필요한 일이라 처음에는 어렵지만 작은 것부터 해보다 보면 갈수록 쉬워진다. 의외로, 거절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셋째,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을 것. 자존감이 낮으면 관계를 끝낼 때가 되어도 ‘이 사람 말고 또 누가 나를 사랑해주겠어...’하고 질질 끈다. 일상에서 작은 성취의 경험을 쌓고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면 인간관계에서 자꾸 무리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것들이 바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보니 혼자 과도하게 기대하고 섭섭해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관계의 키를 잡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상대에게 떠맡겨버리고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속상해했구나. 상대 또한 그게 부담스러웠을 텐데...
착한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느 한쪽이 착해야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사실 없어도 상관없는 ‘시시한’ 것 아닐까? 건강한 인간관계는 시소를 타듯 서로를 배려하며 영향을 주고받을 때 맺어진다.
복통이나 배변장애, 가려움증, 폭식이나 거식, 두통, 불안증, 수면장애 등 이전에는 없었던 몸의 이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자신의 마음을 한번 체크해볼 일이다. 단순히 나약해서,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증상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나는 ‘정신으로 몸을 극복한다’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겪어낼 뿐, 내 마음과 육체는 싸워서 이겨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보듬어 함께 가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마음의 균형이 무너질 때 몸은 가끔 에러 메시지를 보내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때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몸을 찬찬히 이해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마음의 문제를 찾아 보듬어줄 때, 몸은 밸런스를 찾아나간다.
사람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가며 성장한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배우며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착한 사람’들은 남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잊어버린다.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인생의 선택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조차 방관자의 자세를 취한다. 진로, 취업, 결혼 같은 중요한 결정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결정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잘못되면 포기하는 것도 빠르고 남 탓을 하는 데도 익숙하다. 주인공이 아닌 관찰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상대의 말보다 나의 직관과 감정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저 사람을 만나기 전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르지? 저 사람 곁에서 나는 더 나빠진 걸까, 더 좋아진 걸까?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모든 것에 대답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잃어버린단다.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고민해 선택한 결과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자신조차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도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작가는 여러 책에서 반복한다. 작가의 에세이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에서도 그는 자신의 성격 중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내 전부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담담한 긍정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고 그 대답을 오래도록 찾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통찰이 아닐까?
기억 또한 보정된 사진 같아서 사실 그 자체보다는 편집과 자기애가 꾸덕꾸덕 뭉쳐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회상할 때는 ‘상처를 주었다’는 기억보다 ‘상처를 받았다’는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것 같다.
내 인생은 롱테이크로 촬영한 무편집본이다. 지루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진다. 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은 편집되고 보정된 예고편이다. 그래서 멋져 보이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알아달라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스스로 충만하면 남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런 기도문이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할 수 있는 일도 놓치게 된다. 전문가의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시간은 가치 있는 데에만 쓰기에도 부족하고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
잘 모르니까,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모르니까, 쉽게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그런 역지사지를 꾸준히 해나가야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 번거롭고 어렵지만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면 좋겠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아니라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고차원의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끝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노력하는 마음, 개개인의 사연을 살피려 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이 우리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소설가 김훈이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관된 모습을 연기할 필요는 없다. 나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 완성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면 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판단을 뒤로하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 중 하나다. 무언가를 보고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이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은 더 많이 보는 사람일 것이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은 여러 입장을 모두 보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자신이 살아보지 않았던 삶까지 살아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아예 대화를 하지 않게 되듯, 변화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게 되므로, 집을 오래 비워두면 집은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이고 이곳저곳 망가져 간다. 매일 쓸고 닦아도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덕에 최소한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이다.
시니컬해지지 말자는 건, 철저하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용기 있게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다. 그러면 최소한, 세상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내 인생과 내 주변은 뭐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나의 공간을 문득문득 침범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를 잘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다.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서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나의 깊은 감정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에게까지 나의 공간을 열어 보일 필요는 없다. 또 사람마다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감각이 달라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훅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관계를 이어가려면 나름의 대처법이 필요하다. 평정을 유지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공간 감각을 고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나를 지키는 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그건 익은 후의 말이다. 우리는 익기도 전에 고개부터 숙여오지 않았던가.
결핍은 그 자체로는 연약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무엇이라고 믿고, 남에게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위대해질 수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한국처럼 서로 자존감을 낮추는 데 바쁘고 권위적인 곳일수록 더더욱 이런 힙합 정신이 필요하다. 남들이 하는 평가를 그대로 믿지 않고,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리스펙하는 것. 그렇게 되면 누군가 “가만히 있으라”라고 할 때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중요도에 따른 시간과 에너지의 분배다. 무례한 사람의 부탁이라면 아예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좋지만, 가끔은 모호한 경우가 있다.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면서도 부탁을 들어주기에는 사정이나 능력이 여의치 않을 때다. 이때는 최대한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거절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 확답을 주면 돼?”하고 물어보는 것이 좋다. 만약 이렇게 물었을 때 급한 일이라 오늘내일 중으로 답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이 부탁에서 당신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탁들 했지만 거절당해 돌고 돌아 당신에게 왔을 확률이 높으니, 덜 미안해하면서 요즘은 바쁜 일이 있어 어렵다고 바로 거절해도 된다. 그토록 급한 일이라면 상대방도 무리한 부탁임을 알고 있고, 안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거절당하더라도 크게 섭섭해하지 않는다.
관계의 기울어진 추를 파악한 상대는 무리한 부탁임을 알면서도 계속 하게 되고, 부탁을 받는 사람은 일그러진 인정욕구와 피해의식이 겹쳐 자꾸만 의기소침해지고 예민해진다. 부탁받은 일을 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이 기껍고 편안한 상태여야 한다. 예의 바르게 부탁을 거절했는데도 자꾸 하소연하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옆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고 싶고 거절도 잘 하고 싶다면, 그건 욕심일 뿐이다. 나에게 상대의 부탁을 거절할 자유가 있듯이, 거절당한 상대가 나에게 실망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희롱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예민한 사람인 거겠지’, ‘그분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하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지하거나 불쾌감을 표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다 보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냥 두고 피해받은 자신을 책망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신의 감정을 믿어라. ‘불쾌하다’는 감정은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허락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색하면서 거부하기가 힘들더라도 최소한 웃지는 말아야 한다.
성희롱적인 발언을 자주 하는 사람 중에는 사람들이 난감해서 웃는 것을 보고 자신이 재치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감정을 믿는 것, 그리고 단호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을 훈육하듯, 알아서 멈출 때까지 반응 없이 쳐다보다가 그래도 계속되면 단호하게 안 된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도 도저히 멈추지 않는다면, 휙 돌아서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다.
스스로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아주는 것이다.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로 그렇게 믿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피하고 싶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기죽지 말자. 매일 조금씩 단호하고도 우아하게 거절하는 연습을 해보는 거다. 거절에 필요한 자신만의 언어를 상요하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일일이 상처받지 않는다’와 ‘상대방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는다’이 두 가지다. 미셸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들 부부를 공격하는 트럼프의 행태를 간적접으로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니다.”
중요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주변의 소음을 낮춰야 한다. 가끔은 남이 자신을 방해할 때 ‘쉿’을 외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작 나의 목소리가 묻혀 세상에 들리지 않게 될 테니까.
남에게 그럴싸해 보이기란 얼마나 쉬운가. 사람들은 자신은 적당한 가면을 골라 쓰고 세상에 나서면서도 남들은 가면을 벗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또 자신은 단순하게 정의되는 걸 싫어하면서 남에 대해서는 다 아는 듯이 판단하곤 한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상처 덜 받고 자존감 높게 살고 싶지만, 그게 가능했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듯하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하지현 교수는 “불안이란 없애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방심하면 금세 살이 찌는 몸을 대하듯, 마음도 비슷한 관점에서 접근해봐야 한다. 실제로 정상 체중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비결은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라 우선 몸과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긴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는 건 감정의 진폭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 언젠가 우울함이 찾아오더라도 빠르게 나아질 수 있는 회복력을 얻는 일이다.
김연수 작가 <소설가의 일>
“그럼에도 작가들은 잘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인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나의 과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나뿐이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들이 말하게 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가자.’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이 모든 관계는 서로 이해관계까 맞아떨어질 때 유지될 수 있다. 회사가 나를 책임지지 않고 회사에서의 관계가 일시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일로써 만난 사람들에게 갑질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나치게 헌신하다가 배신감에 울 일도 없고 말이다. 회사의 명함 말고도 나를 설명해줄 일을 밖에서 자꾸 찾고, 회사 동료가 아니어도 나와 놀아줄 사람을 찾아 나서라. 회사에 대해서는 약간 체념한 채로 일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 사람보다 네가 훨씬 더 소중해. 옆에 있으면 울게 되는 사람 말고 웃게 되는 사람을 만나.”
상처받지 않는 무균실의 환경이란 건 있을 수 없으니, 누구에게나 흠이 나 있을 것이다. 잘 해보려고 했지만 어ᄍᅠᆯ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보석함에 고이 모셔두지 않은 이상 매일 끼고 있는 반지라면 생활 기스를 피할 수 없듯, 살아가는 일에서 상처를 피할 순 없다. 더욱이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처가 있는 법이다. 그건 그냥, 거대한 흠이 아니라 자잘한 생활 기스들인 거다.
상대를 ‘고치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도리어 자신마저 불행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기존의 질문 ‘그 사람은 그것만 빼면 괜찮은가?’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는 틀렸다. ‘그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준임이 분명한가?’와 ‘단점이 개선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인간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후, 그가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일단은 적당한 거리를 둔 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중요한 거다.”-박찬욱
남들이 지적하는 말을 듣고 단점을 없애는 부분만 집중하다 보면 장점도 함께 없어지고 만다.
“기본적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지 말고요. 상대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대로 받아들이세요.”-강경화
이해되지 않는 상대의 반응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하고 드러난 사실 자체만 봐야 한다. 그처럼 적당한 무심함과 둔감함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내가 자꾸 되뇌는 것은 이것이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가치 없는 곳에 쓰지 말 것.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
정문정작가가 엄마가 되고 나이가 들고 10년 뒤쯤 어떤 글을 쓸지 기대가 되고 궁금하다. 현재는 회피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힘들게 하는 것들은 우선 피하고 보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추스린 후에 상황을 다시 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 나도 현재론 이렇게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10년 뒤에도 지금 모습과 같길 원하진 않는다. 정문정 작가도 나도 조금은 더 마음 편하게 주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동요되지 않길 바래본다.
-책 속의 글-
첫째, 스스로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에서 벗어날 것. 그럴수록 너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주변에 늘어난다. ‘내 인생은 원래 불행해’라고 말하는 걸 그만둬라.
둘째, 일상에서 작은 거절을 조금씩 해볼 것. 거절도 근육이 필요한 일이라 처음에는 어렵지만 작은 것부터 해보다 보면 갈수록 쉬워진다. 의외로, 거절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셋째,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을 것. 자존감이 낮으면 관계를 끝낼 때가 되어도 ‘이 사람 말고 또 누가 나를 사랑해주겠어...’하고 질질 끈다. 일상에서 작은 성취의 경험을 쌓고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면 인간관계에서 자꾸 무리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것들이 바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보니 혼자 과도하게 기대하고 섭섭해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관계의 키를 잡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상대에게 떠맡겨버리고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속상해했구나. 상대 또한 그게 부담스러웠을 텐데...
착한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느 한쪽이 착해야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사실 없어도 상관없는 ‘시시한’ 것 아닐까? 건강한 인간관계는 시소를 타듯 서로를 배려하며 영향을 주고받을 때 맺어진다.
복통이나 배변장애, 가려움증, 폭식이나 거식, 두통, 불안증, 수면장애 등 이전에는 없었던 몸의 이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자신의 마음을 한번 체크해볼 일이다. 단순히 나약해서,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증상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나는 ‘정신으로 몸을 극복한다’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겪어낼 뿐, 내 마음과 육체는 싸워서 이겨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보듬어 함께 가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마음의 균형이 무너질 때 몸은 가끔 에러 메시지를 보내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때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몸을 찬찬히 이해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마음의 문제를 찾아 보듬어줄 때, 몸은 밸런스를 찾아나간다.
사람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가며 성장한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배우며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착한 사람’들은 남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잊어버린다.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인생의 선택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조차 방관자의 자세를 취한다. 진로, 취업, 결혼 같은 중요한 결정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결정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잘못되면 포기하는 것도 빠르고 남 탓을 하는 데도 익숙하다. 주인공이 아닌 관찰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상대의 말보다 나의 직관과 감정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저 사람을 만나기 전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르지? 저 사람 곁에서 나는 더 나빠진 걸까, 더 좋아진 걸까?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모든 것에 대답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잃어버린단다.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고민해 선택한 결과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자신조차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도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작가는 여러 책에서 반복한다. 작가의 에세이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에서도 그는 자신의 성격 중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내 전부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담담한 긍정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고 그 대답을 오래도록 찾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통찰이 아닐까?
기억 또한 보정된 사진 같아서 사실 그 자체보다는 편집과 자기애가 꾸덕꾸덕 뭉쳐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회상할 때는 ‘상처를 주었다’는 기억보다 ‘상처를 받았다’는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것 같다.
내 인생은 롱테이크로 촬영한 무편집본이다. 지루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진다. 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은 편집되고 보정된 예고편이다. 그래서 멋져 보이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알아달라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스스로 충만하면 남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런 기도문이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할 수 있는 일도 놓치게 된다. 전문가의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시간은 가치 있는 데에만 쓰기에도 부족하고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
잘 모르니까,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모르니까, 쉽게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그런 역지사지를 꾸준히 해나가야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 번거롭고 어렵지만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면 좋겠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아니라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고차원의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끝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노력하는 마음, 개개인의 사연을 살피려 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이 우리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소설가 김훈이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관된 모습을 연기할 필요는 없다. 나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 완성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면 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판단을 뒤로하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 중 하나다. 무언가를 보고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이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은 더 많이 보는 사람일 것이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은 여러 입장을 모두 보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자신이 살아보지 않았던 삶까지 살아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아예 대화를 하지 않게 되듯, 변화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게 되므로, 집을 오래 비워두면 집은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이고 이곳저곳 망가져 간다. 매일 쓸고 닦아도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덕에 최소한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이다.
시니컬해지지 말자는 건, 철저하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용기 있게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다. 그러면 최소한, 세상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내 인생과 내 주변은 뭐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나의 공간을 문득문득 침범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를 잘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다.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서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나의 깊은 감정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에게까지 나의 공간을 열어 보일 필요는 없다. 또 사람마다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감각이 달라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훅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관계를 이어가려면 나름의 대처법이 필요하다. 평정을 유지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공간 감각을 고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나를 지키는 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그건 익은 후의 말이다. 우리는 익기도 전에 고개부터 숙여오지 않았던가.
결핍은 그 자체로는 연약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무엇이라고 믿고, 남에게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위대해질 수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한국처럼 서로 자존감을 낮추는 데 바쁘고 권위적인 곳일수록 더더욱 이런 힙합 정신이 필요하다. 남들이 하는 평가를 그대로 믿지 않고,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리스펙하는 것. 그렇게 되면 누군가 “가만히 있으라”라고 할 때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중요도에 따른 시간과 에너지의 분배다. 무례한 사람의 부탁이라면 아예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좋지만, 가끔은 모호한 경우가 있다.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면서도 부탁을 들어주기에는 사정이나 능력이 여의치 않을 때다. 이때는 최대한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거절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 확답을 주면 돼?”하고 물어보는 것이 좋다. 만약 이렇게 물었을 때 급한 일이라 오늘내일 중으로 답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이 부탁에서 당신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탁들 했지만 거절당해 돌고 돌아 당신에게 왔을 확률이 높으니, 덜 미안해하면서 요즘은 바쁜 일이 있어 어렵다고 바로 거절해도 된다. 그토록 급한 일이라면 상대방도 무리한 부탁임을 알고 있고, 안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거절당하더라도 크게 섭섭해하지 않는다.
관계의 기울어진 추를 파악한 상대는 무리한 부탁임을 알면서도 계속 하게 되고, 부탁을 받는 사람은 일그러진 인정욕구와 피해의식이 겹쳐 자꾸만 의기소침해지고 예민해진다. 부탁받은 일을 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이 기껍고 편안한 상태여야 한다. 예의 바르게 부탁을 거절했는데도 자꾸 하소연하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옆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고 싶고 거절도 잘 하고 싶다면, 그건 욕심일 뿐이다. 나에게 상대의 부탁을 거절할 자유가 있듯이, 거절당한 상대가 나에게 실망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희롱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예민한 사람인 거겠지’, ‘그분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하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지하거나 불쾌감을 표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다 보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냥 두고 피해받은 자신을 책망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신의 감정을 믿어라. ‘불쾌하다’는 감정은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허락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색하면서 거부하기가 힘들더라도 최소한 웃지는 말아야 한다.
성희롱적인 발언을 자주 하는 사람 중에는 사람들이 난감해서 웃는 것을 보고 자신이 재치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감정을 믿는 것, 그리고 단호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을 훈육하듯, 알아서 멈출 때까지 반응 없이 쳐다보다가 그래도 계속되면 단호하게 안 된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도 도저히 멈추지 않는다면, 휙 돌아서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다.
스스로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아주는 것이다.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로 그렇게 믿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피하고 싶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기죽지 말자. 매일 조금씩 단호하고도 우아하게 거절하는 연습을 해보는 거다. 거절에 필요한 자신만의 언어를 상요하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일일이 상처받지 않는다’와 ‘상대방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는다’이 두 가지다. 미셸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들 부부를 공격하는 트럼프의 행태를 간적접으로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니다.”
중요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주변의 소음을 낮춰야 한다. 가끔은 남이 자신을 방해할 때 ‘쉿’을 외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작 나의 목소리가 묻혀 세상에 들리지 않게 될 테니까.
남에게 그럴싸해 보이기란 얼마나 쉬운가. 사람들은 자신은 적당한 가면을 골라 쓰고 세상에 나서면서도 남들은 가면을 벗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또 자신은 단순하게 정의되는 걸 싫어하면서 남에 대해서는 다 아는 듯이 판단하곤 한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상처 덜 받고 자존감 높게 살고 싶지만, 그게 가능했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듯하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하지현 교수는 “불안이란 없애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방심하면 금세 살이 찌는 몸을 대하듯, 마음도 비슷한 관점에서 접근해봐야 한다. 실제로 정상 체중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비결은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라 우선 몸과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긴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는 건 감정의 진폭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 언젠가 우울함이 찾아오더라도 빠르게 나아질 수 있는 회복력을 얻는 일이다.
김연수 작가 <소설가의 일>
“그럼에도 작가들은 잘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인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나의 과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나뿐이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들이 말하게 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가자.’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이 모든 관계는 서로 이해관계까 맞아떨어질 때 유지될 수 있다. 회사가 나를 책임지지 않고 회사에서의 관계가 일시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일로써 만난 사람들에게 갑질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나치게 헌신하다가 배신감에 울 일도 없고 말이다. 회사의 명함 말고도 나를 설명해줄 일을 밖에서 자꾸 찾고, 회사 동료가 아니어도 나와 놀아줄 사람을 찾아 나서라. 회사에 대해서는 약간 체념한 채로 일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 사람보다 네가 훨씬 더 소중해. 옆에 있으면 울게 되는 사람 말고 웃게 되는 사람을 만나.”
상처받지 않는 무균실의 환경이란 건 있을 수 없으니, 누구에게나 흠이 나 있을 것이다. 잘 해보려고 했지만 어ᄍᅠᆯ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보석함에 고이 모셔두지 않은 이상 매일 끼고 있는 반지라면 생활 기스를 피할 수 없듯, 살아가는 일에서 상처를 피할 순 없다. 더욱이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처가 있는 법이다. 그건 그냥, 거대한 흠이 아니라 자잘한 생활 기스들인 거다.
상대를 ‘고치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도리어 자신마저 불행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기존의 질문 ‘그 사람은 그것만 빼면 괜찮은가?’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는 틀렸다. ‘그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준임이 분명한가?’와 ‘단점이 개선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인간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후, 그가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일단은 적당한 거리를 둔 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중요한 거다.”-박찬욱
남들이 지적하는 말을 듣고 단점을 없애는 부분만 집중하다 보면 장점도 함께 없어지고 만다.
“기본적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지 말고요. 상대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대로 받아들이세요.”-강경화
이해되지 않는 상대의 반응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하고 드러난 사실 자체만 봐야 한다. 그처럼 적당한 무심함과 둔감함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내가 자꾸 되뇌는 것은 이것이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가치 없는 곳에 쓰지 말 것.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
둘째, 일상에서 작은 거절을 조금씩 해볼 것. 거절도 근육이 필요한 일이라 처음에는 어렵지만 작은 것부터 해보다 보면 갈수록 쉬워진다. 의외로, 거절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셋째,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을 것. 자존감이 낮으면 관계를 끝낼 때가 되어도 ‘이 사람 말고 또 누가 나를 사랑해주겠어...’하고 질질 끈다. 일상에서 작은 성취의 경험을 쌓고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면 인간관계에서 자꾸 무리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것들이 바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보니 혼자 과도하게 기대하고 섭섭해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관계의 키를 잡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상대에게 떠맡겨버리고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속상해했구나. 상대 또한 그게 부담스러웠을 텐데...
착한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느 한쪽이 착해야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사실 없어도 상관없는 ‘시시한’ 것 아닐까? 건강한 인간관계는 시소를 타듯 서로를 배려하며 영향을 주고받을 때 맺어진다.
복통이나 배변장애, 가려움증, 폭식이나 거식, 두통, 불안증, 수면장애 등 이전에는 없었던 몸의 이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자신의 마음을 한번 체크해볼 일이다. 단순히 나약해서,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증상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나는 ‘정신으로 몸을 극복한다’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겪어낼 뿐, 내 마음과 육체는 싸워서 이겨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보듬어 함께 가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마음의 균형이 무너질 때 몸은 가끔 에러 메시지를 보내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때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몸을 찬찬히 이해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마음의 문제를 찾아 보듬어줄 때, 몸은 밸런스를 찾아나간다.
사람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가며 성장한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배우며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착한 사람’들은 남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잊어버린다.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인생의 선택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조차 방관자의 자세를 취한다. 진로, 취업, 결혼 같은 중요한 결정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결정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잘못되면 포기하는 것도 빠르고 남 탓을 하는 데도 익숙하다. 주인공이 아닌 관찰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상대의 말보다 나의 직관과 감정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저 사람을 만나기 전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르지? 저 사람 곁에서 나는 더 나빠진 걸까, 더 좋아진 걸까?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모든 것에 대답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잃어버린단다.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고민해 선택한 결과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자신조차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도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작가는 여러 책에서 반복한다. 작가의 에세이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에서도 그는 자신의 성격 중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내 전부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담담한 긍정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고 그 대답을 오래도록 찾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통찰이 아닐까?
기억 또한 보정된 사진 같아서 사실 그 자체보다는 편집과 자기애가 꾸덕꾸덕 뭉쳐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회상할 때는 ‘상처를 주었다’는 기억보다 ‘상처를 받았다’는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것 같다.
내 인생은 롱테이크로 촬영한 무편집본이다. 지루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진다. 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은 편집되고 보정된 예고편이다. 그래서 멋져 보이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알아달라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스스로 충만하면 남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런 기도문이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할 수 있는 일도 놓치게 된다. 전문가의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시간은 가치 있는 데에만 쓰기에도 부족하고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
잘 모르니까,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모르니까, 쉽게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그런 역지사지를 꾸준히 해나가야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 번거롭고 어렵지만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면 좋겠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아니라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고차원의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끝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노력하는 마음, 개개인의 사연을 살피려 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이 우리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소설가 김훈이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관된 모습을 연기할 필요는 없다. 나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 완성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면 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판단을 뒤로하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 중 하나다. 무언가를 보고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이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은 더 많이 보는 사람일 것이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은 여러 입장을 모두 보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자신이 살아보지 않았던 삶까지 살아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아예 대화를 하지 않게 되듯, 변화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게 되므로, 집을 오래 비워두면 집은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이고 이곳저곳 망가져 간다. 매일 쓸고 닦아도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덕에 최소한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이다.
시니컬해지지 말자는 건, 철저하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용기 있게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다. 그러면 최소한, 세상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내 인생과 내 주변은 뭐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나의 공간을 문득문득 침범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를 잘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다.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서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나의 깊은 감정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에게까지 나의 공간을 열어 보일 필요는 없다. 또 사람마다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감각이 달라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훅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관계를 이어가려면 나름의 대처법이 필요하다. 평정을 유지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공간 감각을 고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나를 지키는 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그건 익은 후의 말이다. 우리는 익기도 전에 고개부터 숙여오지 않았던가.
결핍은 그 자체로는 연약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무엇이라고 믿고, 남에게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위대해질 수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한국처럼 서로 자존감을 낮추는 데 바쁘고 권위적인 곳일수록 더더욱 이런 힙합 정신이 필요하다. 남들이 하는 평가를 그대로 믿지 않고,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리스펙하는 것. 그렇게 되면 누군가 “가만히 있으라”라고 할 때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중요도에 따른 시간과 에너지의 분배다. 무례한 사람의 부탁이라면 아예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좋지만, 가끔은 모호한 경우가 있다.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면서도 부탁을 들어주기에는 사정이나 능력이 여의치 않을 때다. 이때는 최대한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거절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 확답을 주면 돼?”하고 물어보는 것이 좋다. 만약 이렇게 물었을 때 급한 일이라 오늘내일 중으로 답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이 부탁에서 당신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탁들 했지만 거절당해 돌고 돌아 당신에게 왔을 확률이 높으니, 덜 미안해하면서 요즘은 바쁜 일이 있어 어렵다고 바로 거절해도 된다. 그토록 급한 일이라면 상대방도 무리한 부탁임을 알고 있고, 안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거절당하더라도 크게 섭섭해하지 않는다.
관계의 기울어진 추를 파악한 상대는 무리한 부탁임을 알면서도 계속 하게 되고, 부탁을 받는 사람은 일그러진 인정욕구와 피해의식이 겹쳐 자꾸만 의기소침해지고 예민해진다. 부탁받은 일을 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이 기껍고 편안한 상태여야 한다. 예의 바르게 부탁을 거절했는데도 자꾸 하소연하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옆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고 싶고 거절도 잘 하고 싶다면, 그건 욕심일 뿐이다. 나에게 상대의 부탁을 거절할 자유가 있듯이, 거절당한 상대가 나에게 실망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희롱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예민한 사람인 거겠지’, ‘그분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하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지하거나 불쾌감을 표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다 보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냥 두고 피해받은 자신을 책망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신의 감정을 믿어라. ‘불쾌하다’는 감정은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허락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색하면서 거부하기가 힘들더라도 최소한 웃지는 말아야 한다.
성희롱적인 발언을 자주 하는 사람 중에는 사람들이 난감해서 웃는 것을 보고 자신이 재치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감정을 믿는 것, 그리고 단호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을 훈육하듯, 알아서 멈출 때까지 반응 없이 쳐다보다가 그래도 계속되면 단호하게 안 된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도 도저히 멈추지 않는다면, 휙 돌아서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다.
스스로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아주는 것이다.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로 그렇게 믿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피하고 싶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기죽지 말자. 매일 조금씩 단호하고도 우아하게 거절하는 연습을 해보는 거다. 거절에 필요한 자신만의 언어를 상요하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일일이 상처받지 않는다’와 ‘상대방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는다’이 두 가지다. 미셸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들 부부를 공격하는 트럼프의 행태를 간적접으로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니다.”
중요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주변의 소음을 낮춰야 한다. 가끔은 남이 자신을 방해할 때 ‘쉿’을 외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작 나의 목소리가 묻혀 세상에 들리지 않게 될 테니까.
남에게 그럴싸해 보이기란 얼마나 쉬운가. 사람들은 자신은 적당한 가면을 골라 쓰고 세상에 나서면서도 남들은 가면을 벗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또 자신은 단순하게 정의되는 걸 싫어하면서 남에 대해서는 다 아는 듯이 판단하곤 한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상처 덜 받고 자존감 높게 살고 싶지만, 그게 가능했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듯하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하지현 교수는 “불안이란 없애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방심하면 금세 살이 찌는 몸을 대하듯, 마음도 비슷한 관점에서 접근해봐야 한다. 실제로 정상 체중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비결은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라 우선 몸과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긴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는 건 감정의 진폭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 언젠가 우울함이 찾아오더라도 빠르게 나아질 수 있는 회복력을 얻는 일이다.
김연수 작가 <소설가의 일>
“그럼에도 작가들은 잘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인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나의 과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나뿐이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들이 말하게 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가자.’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이 모든 관계는 서로 이해관계까 맞아떨어질 때 유지될 수 있다. 회사가 나를 책임지지 않고 회사에서의 관계가 일시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일로써 만난 사람들에게 갑질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나치게 헌신하다가 배신감에 울 일도 없고 말이다. 회사의 명함 말고도 나를 설명해줄 일을 밖에서 자꾸 찾고, 회사 동료가 아니어도 나와 놀아줄 사람을 찾아 나서라. 회사에 대해서는 약간 체념한 채로 일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 사람보다 네가 훨씬 더 소중해. 옆에 있으면 울게 되는 사람 말고 웃게 되는 사람을 만나.”
상처받지 않는 무균실의 환경이란 건 있을 수 없으니, 누구에게나 흠이 나 있을 것이다. 잘 해보려고 했지만 어ᄍᅠᆯ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보석함에 고이 모셔두지 않은 이상 매일 끼고 있는 반지라면 생활 기스를 피할 수 없듯, 살아가는 일에서 상처를 피할 순 없다. 더욱이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처가 있는 법이다. 그건 그냥, 거대한 흠이 아니라 자잘한 생활 기스들인 거다.
상대를 ‘고치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도리어 자신마저 불행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기존의 질문 ‘그 사람은 그것만 빼면 괜찮은가?’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는 틀렸다. ‘그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준임이 분명한가?’와 ‘단점이 개선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인간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후, 그가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일단은 적당한 거리를 둔 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중요한 거다.”-박찬욱
남들이 지적하는 말을 듣고 단점을 없애는 부분만 집중하다 보면 장점도 함께 없어지고 만다.
“기본적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지 말고요. 상대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대로 받아들이세요.”-강경화
이해되지 않는 상대의 반응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하고 드러난 사실 자체만 봐야 한다. 그처럼 적당한 무심함과 둔감함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내가 자꾸 되뇌는 것은 이것이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가치 없는 곳에 쓰지 말 것.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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